때로 침묵은 가장 큰 폭력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오늘은 발성 연습부터 다시 해 보기로 했어요. 아무래도 시나리오가 어둡기도 하고, 제가 맡은 배역이 음침하기도 하니까… 근데 아무리 봐도, 어딜 가야 제대로 배울 수 있을지 감이 안 오는 거예요.”
작게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졌으나,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도형 혼자만 중얼중얼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해성이 형.”
다음 말을 이어 가려다 이름을 불렀다. 맞은편에 앉은 그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영자 신문을 읽고 있었다. 기사를 죽 훑으며 똑같은 레몬차를 마시던 해성이 슬쩍 눈을 굴려 제 앞에 앉은 도형을 바라보았다.
“어, 듣고 있어.”
무미건조한 대답이었다. 시선을 계속 마주한다거나, 신문을 덮고 그에게 집중해 주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결혼 2년 차, 아무리 해도 사이가 가까워지지 않아 조급해하던 도형은 기어코 해성과 함께 부부 클리닉 상담을 받았다.
그때 받은 처방이었다.
매일 1시간씩은 서로의 이야기를 할 것.
각자의 하루를 털어놓고, 공감대를 형성할 것.
첫 시도는 좋았다. 조금 지루해 보였으나, 해성은 곧잘 자신의 이야기를 했고 도형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여 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일주일이 지나자 그는 본래의 모습을 찾아갔다.
도형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고, 급기야 손에 책이나 신문을 쥔 채 시선을 마주하지 않았다. 눈으로 무언가를 보고 있어도 도형의 말은 들어 줄 수 있다는 말이 덧붙었다.
“…이제, 형 이야기 해 주세요.”
하지만 도형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대로 자신이 멈춘다면, 결혼 생활은 파국을 맞이해 결국 상처밖에 남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까.
신문을 접은 해성이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한 손으로 미간을 꼬집다가, 그대로 얼굴을 아래로 쓸어내렸다.
조금 전까지 비치지 않던 피곤함이 얼굴에 선명했다. 꼭 이야기를 해야 하냐는 눈빛이 형형하게 드러났다.
온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저만이 이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어떻게든 정상적인 궤도로 올려 두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아서.
발밑이 와르르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다음 작품 시나리오 검토하고. 집에서 낮잠 자고, 운동했어.”
“시나리오는 좋은 거 많이 들어왔어요?”
“뭐….”
“낮잠 잘 때 너무 밝지 않아요? 암막 커튼 새로 달까요? 아, 운동은 매일 다니던 피트니스 간 거예요? 나도 거기 등록할까. 형이랑 같이 운동하면-”
“도형아.”
말을 뚝 끊어 버리는 묵직한 목소리에 도형이 숨을 덜컥 참는다.
“피곤해.”
툭 튀어나온 해성의 말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응시하던 도형이 고개를 푹 떨어트렸다.
“내일 하자.”
애정이나 다정함, 온기 따위는 없는 손길이 머리에 머무른다.
두어 번 툭툭 두드려 주는가 싶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내일 언제요? 되묻는 질문은 속에서 맴돌 뿐이었다. 어제도 그랬잖아요, 뒤이어 맴도는 것은 전날부터 반복되던 상황에 대한 불만이었고.
“…네. 잘 자요, 형.”
도형이 할 수 있는 건, 이미 방으로 들어가 버린 해성의 뒤꿈치에 인사를 건네는 일뿐.
해성의 모습이 서서히 어둠 속으로 파묻혀 갔다. 꼭, 페이드아웃 효과를 준 것처럼.
과거라는 깊은 늪으로 빠져들고 있던 그때.
“야! 김도형!”
저를 바라보며 한숨을 푹 쉬는 우태의 모습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듣고 있어?”
“……어?”
“하, 참. 다시 설명할 테니까 잘 들어.”
모두가 떠났지만 끝까지 곁에 남아 준 사람 중 하나였다.
슬럼프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던 그때부터, 해성과 이혼 도장을 찍었던 그 순간까지.
“아니야, 듣고 있었어. 설명 안 해 줘도 돼. 며칠 뒤에 전체 미팅이고, 대본 리딩 들어가기 전에 제작 발표회 있다는 거잖아. 그리고 바로 제작진 엠티랑 대본 리딩이고.”
또박또박 대답하는 도형의 말에 우태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이 그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괜찮은 거 맞지? 정말 복귀해도 되는 거야?”
“해야지. 나 감독님이 다시 불러 주신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네가 힘들면-”
우태의 말에도 도형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그가 건넨 시나리오를 집어 힘껏 그러쥐었다.
“할래. 하고 싶어. 다시, 연기하고 싶어. 형.”
꼭 다짐과도 같은 제 말에 우태가 입술을 힘껏 짓씹는 게 보였다.
쓴웃음이 절로 나왔다. 저보다 더 화를 내는 우태의 모습에 괜히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하… 다 좋은데, 주연이 왜….”
“알아, 해성이 형인 거.”
“야이씨, 이제 와서 형은 무슨 형. 너 그 자식, 아니. 정해성이 무슨 짓 했는지 잊었어?”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냉정한 판단과 소신 있는 발언에 갈채를 받는 정해성. 그리고, 아직 성장이 필요한 배우 김도형.
그 때문일까. 해성을 볼 때마다 그의 말이 떠올랐고, 그가 입을 열 때마다 쏟아질 말에 대한 두려움이 생겼다.
눈을 떠 보니 도형은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뒤였고, 해성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됐다.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기 전까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지. 물론, 지금도 마음속 응어리는 여전히 남은 상태겠지만.
“그래도 연기는 해야지. 그게 내 일이잖아.”
애써 웃는 도형의 모습에 우태가 또다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러고는 도형에게 넘겨준 대본을 힐끔 보더니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크게 이야기했다.
“그래, 김도형. 너 다시 할 수 있어. 하고 싶은 거 다 해! 어? 형이 인마, 작품이란 작품은 싹 가져와서 얼마든지 밀어줄 테니까. 너는 연기만 해. 우리 도형이 저 바닥에서 아득바득 올라온 거, 세상 사람들 다 알아. 그러니까 미친 듯이 연기만 해. 알았어?”
“응, 알았어.”
도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 시간을 견뎌 왔다. 컴컴한 어둠 속에 덩그러니 서서 자신을 갈고닦는 일에 전념했다.
연기 레슨을 다시 받기 시작했고, 피부과를 다니거나 운동을 다니는 일도 빼먹지 않았다.
단 하나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이 빛을 볼 순간이었다.
가만히 생각하던 도형의 어깨를 팡팡 두드려 주던 우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아! 그럼 새로운 시작을 다짐한 기념으로 우리, 고기 먹으러 갈까?”
어차피 병원에도 가야 한다. 히트사이클 주기가 불규칙해진 덕분에 새로 약을 받기로 했다.
“고기 먹으러 가기 전에 병원부터 들르자, 형. 제작 미팅도 있을 거고, 조금 더 지나면 포스터 촬영도 해야 하니까 억제제는 미리 챙겨야 할 것 같아.”
“그래, 그러자. 병원 갔다가 고기 먹자!”
큰 소리로 말하며 웃는 우태의 모습에 도형이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도형은 우태와 고기를 실컷 먹고, 술을 마신 다음 날에도 어김없이 헬스장으로 향했다.
운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내내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는 느낌이 어쩐지 좋았다. 오늘도 보람차게 하루를 시작하는 것만 같아서.
지우드
도형아
내일 나 감독님이랑 미팅 잡혔다
꼭꼭 숨겨놨던 비장의 카드도 꺼낸다고 하시네
비장의 카드? 우태의 메시지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긴, 자신의 상대역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 배역 이름이 서온영이라는 건 공개됐지만, 그 배역을 맡은 배우까지는 비밀리에 부쳐져 그 누구도 알지 못했지.
기사가 뜬 것도 없었다. 몇몇 사람들이 추측성 글을 게시하며 이 사람이 아니겠느냐, 라고 했지만 제작사 측에서는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지우드
그래?
내일 온영이 배역 맡은 사람 누군지 공개하실 생각인가 봐
알았어
형도 오늘은 푹 쉬고 내일 봐
오랜만에 정신이 없는 하루겠구나 싶었다. 허리를 곧게 세운 뒤, 앞을 바라본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항상 하천 길을 애용했다. 가볍게 뛰기에도 좋고, 사람이 많지 않아 혹 자신을 알아보기라도 할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니까.
러닝을 끝내고 하천을 따라 올라왔다. 천천히 길목을 걸어가는데, 집 앞을 서성거리는 누군가의 모습이 보였다.
“최유찬?”
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건, 환하게 웃는 유찬이었다.
“도형아!”
후다닥 달려오던 유찬은 기다렸다는 듯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이상하지. 분명 스스로도 작은 키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유찬의 품에 쏙 들어가는 게 기분이 미묘했다.
당황해 그를 슬쩍 밀어냈다. 그리고 제집을 한번, 유찬을 한번 돌아보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갑자기 무슨 일이야?”
“그냥 보고 싶어서 왔지.”
“똑바로 말해. 무슨 일이야.”
“진짠데. 너는 이런 말은 그냥 넘기더라.”
결국, 볼멘소리를 내는 유찬을 바라보며 웃고 말았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던 그 시절, 자신을 붙잡아 주던 사람 중 하나였다. 다시 일어설 수 있다며 끊임없이 기운을 북돋아 주고, 틈만 나면 저를 찾아와 시간을 함께 보내던 친구.
데뷔 연도가 같아 동기라고 불리던 두 사람은 도형이 해성과 결혼하고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도 함께였다.
병원을 소개해 주고, 편하게 운동할 수 있는 곳을 알아봐 주고. 연기 학원까지 연결해 준 사람이 바로 유찬이었다.
도형의 모든 순간 힘이 되어 준 사람. 그가 일어설 수 있도록 아주 작은 발판이 되어 준 존재. 그 때문인지 유찬이 무척 소중해졌다.
“할 말이 있어서 왔어.”
“할 말? 그게 뭔데?”
시무룩해진 유찬의 얼굴이 환하게 폈다. 도형의 손을 힘껏 붙잡은 그가 어깨를 활짝 펴고 신이 나서 입을 열었다.
“우리 앞으로 자주 보게 될 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도 자주 보잖아.”
“지금보다 더, 자주, 많이.”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였지만, 이렇게까지 말을 돌리는 걸 보면 지금 당장 그 뜻을 말해 주지 않을 게 분명했다.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왔어? 너 스케줄은?”
“지금 바로 가야 돼.”
“뭐? 그럼 전화로 하면 되잖아. 늦으면 어쩌려고 여기까지 와.”
“다 계산하고 움직였으니까 걱정하지 마. 근데 나 좀 서운하다.”
서운해? 왜? 도형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아직 완전히 나아지기는 글러 먹은 모양이었다. 서운하다는 그 한마디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고, 제가 뭘 잘못한 건지 뭘 실수한 건지 고민에 빠지는 걸 보면 말이다.
어, 짧게 입을 달싹거리던 도형의 모습에 유찬이 크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농담이야, 농담. 그냥 한 말이니까 너무 그렇게 쳐다보지 마.”
“야, 나 땀 흘렸어! 운동하고 왔다니까!”
그의 손길을 피하느라 차마 얼굴을 보지 못했다. 조금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던 것 같은데.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며 그의 손을 피하는데, 뒤에서 빵! 하는 클랙슨 소리와 속도를 올리는 바퀴 소리가 들렸다.
“도형아!”
짤막한 외침과 함께 유찬의 손이 허리를 단단히 받쳐 끌어당기는 게 느껴졌다. 당황해 고개를 돌리자, 한껏 상기된 그의 얼굴이 보였다.
차는 쌩 지나갔지만, 두 사람은 그 자리에 굳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도형은 유찬의 옷을 힘껏 쥐고 있었고, 유찬은 도형의 등을 단단하게 받쳐 그를 잡고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유찬의 얼굴을 처음 본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가슴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한참 그를 바라보다 겨우 정신이 들었다. 당황한 마음에 그를 슬쩍 밀어냈다.
“고, 고마워.”
머쓱해하는 도형을 바라보던 유찬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말려 올라갔다.
“정신 좀 똑바로 차려. 애가 이렇게 허술해서 어디 내놓겠어?”
“아빠도 아니고….”
“그래, 물가에 애 내놓은 기분이다. 됐냐?”
재차 웃으며 손을 뻗던 유찬이 허공에서 손을 힘껏 말아 쥐었다. 그러곤 바지 주머니로 손을 욱여넣은 뒤, 괜히 뒤꿈치를 두어 번 들었다가 내려놓으며 쓰게 웃었다.
“아무튼, 너 자주 볼 거라고 생각하니까 좋아서. 그래서 이야기하러 온 거야.”
“그게 무슨 뜻이냐니까. 뭔지 알아야 나도 좋아하든, 축하하든 할 거 아니야.”
“축하받을 일은 아니고.”
유찬은 말을 얼버무렸다. 의뭉스러운 표정에 무언가 이야기를 하려던 그 찰나, 정신없이 울리는 유찬의 핸드폰 알람 소리가 들려왔다.
“아오, 저 성질. 아무튼 나 갈게. 조만간 봐!”
어휴, 두어 번 고개를 가로젓던 유찬이 한숨을 쉬며 뒷걸음질 쳤다. 손을 번쩍 올려 휘휘 흔드는 그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져 있었다.
“어? 놀러 온다는 거야? 야, 유찬아. 최유찬!”
이름을 부르며 따라갔지만, 원하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벤에 올라타 사라지는 유찬의 모습을 가만히 쳐다볼 뿐.
“…뭐야, 진짜.”
당황스럽다는 듯 눈을 깜빡거리던 도형이 어깨에 힘을 탁 풀었다. 어쩐지 유찬의 손이 닿은 허리로 열이 오르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