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행복의 또 다른 이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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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비행 끝에 캐나다에 도착했다.
도착 첫날에는 쉬어야 한다는 나 감독의 말에 배우를 비롯한 모든 스태프들이 호텔로 들어왔다.
사람들에게 양보를 하던 유찬과 도형은 가장 늦게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우태와 유찬의 매니저는 스태프 회의에 참석해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타국에 왔으니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회의가 길어질 것 같아 두 사람도 먼저 방에 올라가기로 했다.
침묵을 지키던 유찬이 무언가 떠오른 듯, 도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도형아, 우리 오늘 밤에….”
 
맥주나 한잔할까, 했지만.
알파와 오메가는 방이 나뉘어져 있다. 배우와 스태프들 모두 마찬가지였다.
 
“응, 맥주는 한국 돌아가서.”
 
그 마음을 모를 리가 없지.
언제나 맥주 한 잔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으니까.
도형의 말에 유찬은 웃어 버렸다. 그래, 알았어. 짧게 대답하는 그의 얼굴에 미소가 만개했다.
잠시 후, 도형이 머무를 층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그럼 나 간다. 내일 봐. 푹 쉬고.”
“응, 너도 푹 쉬어. 내일 보자.”
 
유찬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도형은 바깥 복도에서 손을 흔들었다.
문이 서서히 닫히고, 그 틈이 점점 비좁아졌지만.
유찬은 끝까지 도형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가 몸을 돌려 제 방이 있는 곳으로 향하느라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도.
 
“…하.”
 
유찬은 한숨을 터트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혼자 시작한 마음이니 접는 것도 혼자 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도형에게 제 마음을 강요해서도, 알아 달라 애원해서도 안 된다.
이미 그는 제게 친구로 남자는 말을 남겼고, 저만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니까.
 
“한심하다. 최유찬.”
 
중얼거리던 유찬이 한 손으로 머리를 마구 헝클였다.
 
“한심해.”
 
속이 답답했다.
차라리 시간을 되돌려 도형에게 고백하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때, 자신이 마음을 삼켰더라면.
그 찰나 도형에게 제 마음을 전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이 마음을 쉽게 정리할 수 있었을까.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금세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렇다고 해도 저는 도형에게 기어코 고백을 하고 말았으리라는 확신이 생겼기에.
 
“맥주나 한잔이 뭐냐.”
 
결국, 조금 전 말이 영 멋없었다며 자신을 탓하는 것이다.
이 먹먹함과 답답함은 언제 나아질지, 그 시기라도 알고 싶은 마음이 절실했다.
 
***
 
방에 도착해 짐을 풀고, 전달받은 의상을 미리 꺼내 옷장에 걸어 두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오니 금세 온몸이 노곤노곤해졌다.
침대에 털썩 누워 천장을 올려다본다.
 
“…아.”
 
툭 터진 탄식 뒤로 따라오려는 말을 애써 삼켜 보려고 하지만.
 
“정해성 보고 싶다.”
 
결국, 억누르지 못한 채 중얼거리고 말았다.
해성의 이름 세 글자와 섞인 제 진심에 괜히 부끄러워졌다. 키득거리며 웃다가 침대 위를 이리저리 굴렀다.
 
“아, 진짜!”
 
못 견딜 정도로 좋다.
해성이, 그를 부르는 이 순간이.
제 머릿속에 남아 떠나지 않는 것만큼, 해성 또한 그러리라는 사실이.
베개를 힘껏 끌어안으며 숨을 가다듬는데, 누군가 벨을 눌렀다.
반사적으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누구세요?”
 
혼자 자는 게 익숙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저 예상치 못한 사람의 방문이 익숙하지 않을 뿐.
 
“나야. 우태.”
 
하지만 우태의 목소리를 들으니 걱정이 한결 가라앉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룸 안의 패널로 우태의 얼굴을 확인한 뒤, 문을 열었다.
 
“이거 주려고.”
 
우태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회의가 꽤 힘들었던 건지, 눈 밑이 퀭하게 변해 있었다.
그는 눈을 꾹꾹 누르며 다른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건넸다.
 
“이게 뭐야?”
“너 추위 잘 타잖아. 정해성이 꼭 가져가라고 챙기길래 가져왔다.”
“형이?”
“어. 서프라이즈라고 전해 달라더라.”
 
도형의 눈이 올망졸망해졌다.
전기장판을 받아 든 그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자, 우태는 한숨을 푹 쉬며 주변을 돌아봤다.
 
“도형아. 지금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지만.”
“응! 표정 관리. 얼굴 관리.”
 
말이나 못 하면.
우태는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린 도형을 흘겨보며 들어가라 손짓했다.
 
“피곤할 테니까, 얼른 쉬어.”
“응. 형도. 내일 봐.”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고.”
 
도형은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남긴 채 우태와 인사했다.
문을 닫고, 방에 들어오자마자 전기장판을 힘껏 끌어안았다.
그러곤 침대 위로 쓰러져 이리저리 굴렀다.
어쩐지, 우태의 캐리어가 제법 크다고 했다.
로케는 며칠 되지도 않는데 무슨 짐을 저렇게 많이 챙겨 왔나 했더니.
 
“이거였어.”
 
끙, 앓는 소리를 냈다.
해성이 보낸 마음이 제게 닿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전기장판을 끌어안은 채 침대를 이리저리 구르던 중, 도형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연락해야지.”
 
잘 받았다고, 고맙다고 말을 해야 했다.
메시지를 보낼까 하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 번쯤은 이런 걸 해 보고 싶었으니까.
자고 있을까, 깨우면 안 되는데. 그런 걱정을 뒤로한 채 당장의 욕심에 따르는 일.
길고 긴 신호 끝에, 해성이 전화를 받았다.
 
[응, 도형아.]
“형, 고마워요.”
 
대뜸 던진 고맙다는 말에 해성이 옅게 웃었다.
그와 함께 핸드폰 너머로 들리던 TV 볼륨이 낮아졌다.
 
“집이에요?”
[응. 오늘은 오후에 나가. 화보 촬영.]
“우리 형 바쁘네.”
[우리 형?]
“그럼 남의 형이에요?”
[그건 아니지.]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던 두 사람은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의 숨소리가 무척 좋았다.
가슴을 간질이다가, 이내 온몸이 저릿해질 정도로.
 
[얼른 침대에 깔아 놔. 그리고 누워서 통화해. 비행 길어서 힘들었을 텐데.]
“나야, 비즈니스석 타서 괜찮았어요. 같이 온 스태프들이 힘들었죠.”
[그래, 너답다. 아무튼 빨리 누워.]
“그럼 끊지 말고 기다려요.”
[예, 그러겠습니다.]
 
그마저도 좋았다. 장난스러운 존댓말까지도 제 속을 간지럽게 만든다.
도형은 싱글벙글 웃음을 지우지 못한 채 침대에 전기장판을 깔았다.
온도를 적당히 맞춰 놓고 위에 누웠다. 아직 열이 오르지도 않았는데 따뜻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누웠어요.”
[잘했어. 거긴 어때, 많이 춥지?]
“응. 엄청 추워.”
[눈은?]
“아직 안 내리는데. 내일은 내린대요. 다행이에요. 작중 배경이 겨울이라서.”
[하나도 안 다행인데.]
“왜요?”
[내가 거기에 없으니까.]
 
이어지는 말에 도형은 숨을 꾹 참았다.
아니, 터지려는 웃음을 참았다. 이불을 목 끝까지 끌어 올려 눈을 꾹 감았다가, 몸을 돌렸다.
 
“그러게. 같이 누워 있으면 좋을 텐데.”
[다음에 같이 가자.]
“언제?”
[종방연까지 마치고.]
 
미래를 기약하는 대답에 또다시 설렐 법도 한데, 도형은 괜히 겁이 났다.
만약 해성이 제게 이토록 끌리는 게, 같은 드라마를 작업하는 찰나의 순간에 잠시 흔들린 거라면.
예전의 그 감정과 다를 바 없다고 한다면.
무수히 많은 생각과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형, 우린 무슨 사이에요?
우리가 나눈 밤은, 어떤 의미예요?
형은 나에 대한 마음이 어때요?
 
“응. 그러자.”
 
하지만 질문은 던질 수 없었다.
그저 속으로 삼킨 채 핸드폰을 힘껏 쥘 뿐.
 
[…김도형 목소리 섹시했어. 조금 전에.]
 
조금 전의 고민을 다 잊게 할 만큼 엉뚱한 대답이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참 우습다.
그가 준 전기장판, 함께 오자는 약속. 그리고 해성의 목소리.
하나둘 모인 것들이 야릇한 기분을 만든다.
 
“조금 더 섹시한 소리도 낼 수 있는데.”
 
도형이 두 다리를 바르작거리며 침대 위에 엎드렸다.
강하지 않은 압박은 전기장판의 열기를 그대로 흡수하게끔 도와준다.
더운 숨을 뱉으며 손을 천천히 움직였다.
얇은 바지는 처음부터 입지 않은 것처럼 되어 버렸다.
손바닥에 닿는 맨살의 감촉에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싫은가?”
[쉿. 집중하는 중.]
 
이게 뭐라고 온몸이 저릿할 정도로 섹시할 일인가.
도형은 집중하고 있다는 해성의 말에 눈을 질끈 감았다.
핸드폰은 전기장판 위에 올려 둔 채, 남은 손마저 이불 속으로 숨겼다.
이불이 조금씩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얌전히 누워 있던 도형의 몸이 점점 움츠러들었다가, 곧게 펴졌다가, 배배 꼬였다.
누군가 꼭 제 몸을 맘대로 다루는 것만 같았다.
느껴지는 건 제 손이 맞는데, 해성의 얼굴을 떠올리니 그가 저를 맘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마저 일었다.
 
“형… 해성이, 형.”
 
그를 부르는 순간마저도 애틋하다. 가슴이 간질거리다가 이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결국, 욕심은 배가 된다. 끝을 내야만 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시간을 끌게 됐다.
입에서 터져 나오는 달뜬 소리가 도통 가라앉지 않았다.
 
“누가, 들을까 봐, 겁나.”
 
간신히 한 마디, 한 마디를 뱉으며 베개 위로 얼굴을 묻었다.
시간을 끌고 끌었지만, 결국 끝은 찾아온다. 마침내 눈앞이 번쩍거리다, 새하얗게 번지기를 몇 번.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전기장판 위에 올려 둔 핸드폰을 들었다.
아무 말이 없는 해성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온다.
스피커폰으로 들은 걸까. 그게 아니면, 숨을 죽이고 있던 걸까.
어땠냐고 물어보려는 순간.
 
“…어?”
 
도형이 본 건, 전원이 나간 핸드폰이었다.
얼마나 당황한 건지, 잽싸게 침대 아래로 내려가 가방을 뒤적거렸다.
아래로 찬바람이 휭 불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잽싸게 어댑터를 꽂아 핸드폰에 연결했다.
톡, 톡.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기를 몇 번.
얼마 지나지 않아 화면에 빛이 들어왔다. 찬 바닥에 내려 두니 그나마 핸드폰이 식은 모양이었다.
 
“…아, 거기서 전원이 나갈 게 뭐야.”
 
아쉬운 건지. 민망한 건지.
아니, 두 마음이 모두 공존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쥔 채 끙끙 앓았다.
해성이 들었을까. 아니, 어느 순간부터는 듣지 못했을 것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찰나. 진동 소리가 들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해성의 이름이 찍혀 있었다.
 
“혀엉….”
[김도형.]
 
이어지는 해성의 목소리가 제법 낮았다.
 
[너….]
 
하아, 터지는 한숨이 거칠었다.
무어라 말을 하려는데, 해성의 한마디가 그의 숨을 가로막았다.
 
[너 형 미치는 꼴 보고 싶지.]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입술을 꽉 깨물고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꼭 해성이 앞에 있는 것처럼.
 
“아니, 형. 그게 아니라.”
[일단.]
“네?”
 
사뭇 진지해지는 목소리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가, 애꿎은 허벅지만 꾹꾹 누르며 기다리는데 짙은 탄식이 들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이건 기분이 좋지 않다거나, 화가 난 게 아니다.
억눌러야 하는 것들 때문에 답답한 것이다.
제 뜻대로 되지 않아 애가 탈 때 들을 수 있는 소리.
 
“형.”
[와서 보자.]
 
가슴이 덜컹 떨어진다.
참 우습지. 조금 전 그렇게 열감에 취해 놓고, 또다시 해성과의 밤들을 떠올린다는 게.
이어지는 해성의 말에 도형도 못 이기겠다는 듯 탄식을 터트리며 웃었다.
 
[한국 와서 보자. 도형아. 형, 이미 미친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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