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산을 넘고 나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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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와 논란이 끊임없이 이어졌지만, 촬영은 계속됐다.
부상 때문에 입원을 하게 된 하경으로 인해 작가는 그의 배역을 다른 인물로 대체했다.
하경이 맡은 배역 자체가 그다지 비중이 높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2주라는 시간이 흘렀고, 어느새 마지막 신을 촬영하는 날이 다가왔다.
 
“오늘 마지막이니까, 다들 힘내 봅시다. 누구 하나 욕심 안 내는 사람 없잖아, 여기!”
 
나 감독의 멘트에 모두가 소리 내어 웃었다.
본격적으로 촬영이 시작됐다. 모종의 사건으로 오해하던 혜아와 유진이 서로의 마음을 다시금 확인하는 장면.
그 오해를 푸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건 예현과 온영, 두 사람이었다.
촬영은 별다른 탈 없이 순조롭게 이어졌다.
그러나 마지막 촬영이라는 말이 모두에게 부담 아닌 부담이 된 모양이었다.
 
“감독님. 바스트 한 번 더 따도 괜찮을까요?”
 
벌써 같은 장면만 서너 번 촬영을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 감독은 싫은 기색 없이 배우들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사람들에게 ‘마지막 화’라는 단어가 얼마나 크게 닿을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혜아가 잠시 머물던 옥탑방에서의 조촐한 파티.
<별을 담은 잔>의 이름과 어울리도록, 촬영 시간은 한밤중이었다.
제법 서늘한 바람에도 배우들은 누구 하나 불평불만을 내비치지 않았다.
 
“12부 45신. 혜아와 예현이 마지막 대사, 테이크 5 갑니다.”
“액션!”
 
나 감독의 신호와 함께 소연의 눈빛이 달라졌다.
고단함이나 피곤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뿌듯하게 미소 짓는 혜아가 도형의 눈앞에 있다.
 
“고마워요.”
 
혜아의 대사에 예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다.
말없이 고개를 돌려 그녀를 가만히 지켜볼 뿐.
그 눈빛에는 많은 감정이 서려 있어야만 했다.
자신의 사람이 되어 주지 않았던 옛 사랑, 그렇기에 더욱 반짝이며 빛나는 게 아닌가 하는 씁쓸함. 더불어 더는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어느새 멀어진 제 마음까지.
이제는 ‘동료’라는 이름이 더욱 잘 어울리는 감정 변화가 표정과 눈빛에 모두 드러나야만 했다.
 
“예현 씨 아니었으면… 나 꼼짝없이 유진 씨 오해할 뻔했어. 제대로 된 속마음도 물어볼 용기가 없었거든. 그래서 고마워요.”
 
예현은 웃는다. 한참 무언가 생각하다가, 손에 쥔 술잔을 한 번. 다시 혜아를 한 번 번갈아 보더니 어깨를 으쓱거린다.
 
“사람이 원래 그렇지 않나? 말하지 않으면 모르고, 묻지 않아도 모르고. 말과 행동에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사랑할수록 그 용기는 줄어드는 거.”
“…….”
“내가 혜아 씨 등 떠민 건 맞지만, 본인이 용기가 없었다면 또 달랐겠지.”
“그건 그래.”
“그러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다는 말이에요.”
 
예현은 혜아를 돌아본다. 과거의 사람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그저 갈무리를 어떻게 하느냐, 마음에 어떤 모양과 색으로 남기느냐의 차이일 뿐.
그에게 혜아는 어떤 존재였을까. 대본을 보며 도형이 수없이 골몰하던 부분이었다.
그렇게 해서 내린 결론은 하나.
 
“보란 듯이 혜아 씨의 행복을 정립하는 모습.”
 
예현에게 있어 혜아는 이정표 혹은 지침서.
첫사랑은 아니었으나 그만한 감정을 불러일으킨 존재였으며.
천문학자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느끼게 해 준 계기였다.
더 나아가, 자신의 사랑과 행복을 지키는 방법을 알고 있는 강인한 사람.
무미건조하고 딱딱했던 예현의 삶에 불어온 봄바람.
그게 예현에게 박힌 혜아의 정의였다.
 
“덕분에 나도 움직일 수 있었어요.”
“그럼 예현 씨는요?”
 
이어지는 물음에 술을 홀짝이던 예현이 혜아를 힐긋거린다.
촬영장은 고요했다. 나 감독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모니터를 주시했고, 해성 또한 도형이 연기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확실한 성장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대본을 받은 날부터 예현이 되어 살아왔음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었으니까.
 
“예현 씨의 행복을 찾았어요?”
 
원래 대본이라면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야 했는데.
도형은 자기도 모르게 해사하게 웃고 말았다. 수줍은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다시 들어 올리며 그녀와 눈을 마주한 채로.
꾸미거나 계산한 미소가 아니었다.
받아칠 대사에 그대로 녹아든 미소였기에, 나 감독도 굳이 컷을 외치지 않았다.
모두가 도형의 감정 연기에 감탄하고 있었다.
 
“텅 비어 있는 잔을 쥔 기분이었는데.”
 
덤덤하게 뱉는 대사였으나, 그 목소리에 미묘한 떨림이 묻어 있었다.
손에 쥔 술잔을 내려다보던 예현은 그대로 혜아를 돌아본다.
반대로 이 장면에서는 환하게 웃어야만 했는데.
 
“어느 날, 어느 순간. 별이 쏟아졌어요. 제 앞에.”
 
은은한 미소만 머금고 있었다.
그렇지만 눈빛은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결정과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듯.
 
“예현 씨!”
 
뒤에서 온영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예현이 살짝 뒤를 돌아본다.
얼른 와서 고기를 먹으라 채근하는 온영을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혜아를 마주했다.
 
“그렇게 채워졌어요. 쥐고 있던 그 잔이.”
 
그 말을 끝으로 예현은 손에 쥔 잔을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곤 모두가 모인 자리로 가서 유진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며, 혜아에게 가 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이어지는 건 나란히 앉아 손을 꽉 잡는 예현과 온영의 모습.
그리고 딱 붙어 앉아 미래를 이야기하는 유진과 혜아의 모습이었다.
추후에 내레이션을 입힐 네 사람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길고 긴 침묵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컷! 오늘 찍은 것 중에 제일 좋아!”
 
나 감독의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배우들이 한숨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 감독은 감격에 찬 표정으로 네 사람을 바라보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뱉고. 다시 고개를 숙이고.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나 감독이 스피커와 연결된 무전기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드라마 마지막 신을 찍고 난 뒤, 나 감독이 버릇처럼 하는 통과 의례였다.
 
“이렇게 추운 날씨에도 고생해 준 촬영 팀, 미술 팀, 의상 팀, 소품 팀. 그리고 모든 스태프들. 고맙습니다. 대본 속 아이들을 살아 숨 쉬게 만든 배우 여러분들도 고맙습니다. 이렇게 오늘, <별을 담은 잔> 촬영을 마무리합니다. 모두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또 다른 모습으로 시작하기 위한 마침표를 찍는 것뿐입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끝을 알리는 인사와 고생했다는 격려의 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자, 마지막으로 배우들도 한마디씩 해야지. 나태석이랑 일하는데 이게 빠질 수 있나!”
 
그리고 마지막 통과 의례.
배우들이 한마디씩 남기는 일이었다.
가장 처음으로 무전기를 잡은 건 소연이었다.
 
“이거, 종방연 때 할 말인데. 벌써 하는 거예요?”
“그럼. 해야지.”
“정말, 감독님은 여전하시다니까.”
 
머쓱하게 웃고 있었지만, 소연의 눈가는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참 말을 잇지 못하던 소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늘 느끼는 거지만, 나 감독님과 촬영을 할 땐 마음이 따뜻해져요. 제가 왜 오늘의 전소연이 됐는지 다시 한번 생각할 수 있었어요. 다들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정말, 정말… 고마워요.”
 
애써 눈물을 삼키던 소연이 잽싸게 해성에게 무전기를 넘겼다.
흠, 짧게 헛기침하던 해성은 소연을 한번 힐긋거리고, 나 감독을 가만히 쳐다봤다.
 
“원래 이런 자리에서는 말을 길게 하지 않는 게, 성격입니다만.”
 
모두가 한 번씩 웃음을 터트린다.
음, 길게 고민하던 해성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따금 그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정해성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다양한 경험을 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물론, 배부른 소리라는 거 잘 압니다.”
 
원래 저렇게 말이 길었어?
해성과 작업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너도나도 놀라 수군거렸다.
나 감독도 적잖게 놀랐으나,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해성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번 작업은 달랐습니다. 정해성이기에 감사했습니다. 정해성이란 이름이 있기에, 이 드라마를 함께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루하루 현장을 버티게 해 준 스태프 여러분들에게 정말, 너무 감사드립니다.”
 
늘 고생하셨습니다. 딱 한마디로 끝내던 예전의 해성과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모두 그런 해성의 변화에 환호했다.
 
“멋있다 정해성!”
 
어디선가 들리는 외침에 스태프들은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분위기를 몰아, 다음으로 무전기를 잡은 건 유찬이었다.
 
“네. 짧고 굵게 가겠습니다. 다른 제안 포기하고, 이 드라마를 선택한 일. 그게 제 인생 최고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우렁찬 목소리가 이어졌고, 유찬은 부끄러운 듯 도형에게 재빨리 무전기를 넘겼다.
 
“아, 이런 거 어색하다고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우는소리를 하는 유찬에 스태프들이 웃음을 터뜨리는 사이, 나 감독의 시선이 도형에게 향했다.
도형은 무전기를 쥔 채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자리에 오도카니 서서 생각을 이어 가던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횡설수설 말이 나오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죄송합니다. 그냥, 저는, 지금 이 순간조차 꿈같아서요.”
 
애써 웃던 도형이 고개를 숙인다. 시큰해지는 코를 한번 훌쩍거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말을 이어 갔다.
 
“다시는 카메라 앞에 서지 못할 거라 생각했고. 두 번은 연기를 하지 못할 것 같았고. 이렇게… 마지막 순간을 체감하는 게, 더는 없으리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더욱, 이 순간이 제게 감회가 새롭습니다. 벅차요.”
 
해성이 잠시 얼굴을 굳히다가, 이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어쩌면 자신이 저지른 과오는 늘 꼬리표처럼 따라다니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감내해야만 한다. 그러기로 마음먹었으며, 그래야만 한다.
행동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이었으므로.
 
“더 나은 김도형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별을 담은 잔>으로 저는, 한 계단 더 높이 올라온 기분이에요. 정말, 너무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들 감사합니다.”
 
결국, 벅차오르는 마음을 삼키지 못한 채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너무 많은 의미가 담긴 작품이었다.
김도형의 시작이자 끝이었던 작품의 연작.
그곳에서 다시 시작했다. 새로이 발을 내딛고,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이 순간이 도형에게는 그저 꿈처럼 느껴졌다.
 
“고생하셨습니다!”
“김도형 멋있다!”
“나태석 감독님 최고다!”
 
여기저기서 튀어나오는 목소리와 함께, 서로에게 보내는 박수가 이어졌다.
<별을 담은 잔> 마지막 촬영. 새카만 밤하늘은 아름다웠고, 공기는 청아했다.
환하게 웃는 사람들과 거둔 유종의 미.
모두에게 소중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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