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그러니까, 우리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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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어쩔 거니.”
 
세리의 날카로운 말에 도형이 우물쭈물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옆자리에는 유찬이, 맞은편에는 해성이 앉아 침묵을 더해 주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 떡하니 올라와 있는 건, 세 사람의 삼각관계를 암시하는 기사가 실린 임시 발행면.
발뺌을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으로 사무실까지 왔지만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건 사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도형의 집을 드나드는 해성과 유찬의 얼굴이 또렷하게 찍혔다. 거기다가 해성은 나오는 모습까지 찍혔으니, 뭐. 변명할 거리도 없지.
 
“어떡할까요, 조 대표님. 차 대표님.”
 
세리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양쪽에 앉은 남자들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왼쪽에는 유찬과 차 대표가, 오른쪽에는 해성과 조 대표가 있었다.
성질을 억누른 채 기다려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세리는 코웃음을 쳤다. 하아. 길게 한숨을 쉬며 가만히 생각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어 말을 이어 갔다.
 
“그래, 두 사람은 상관없겠지.”
 
비웃듯 말하던 세리가 종이를 집어 들어 사진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한차례 숨을 삼킨 그녀가 있는 힘껏 신문을 구겨 쥐었다.
 
“대외적으로 이미지 좋아, 평판 좋아. 이런 스캔들로 흔들릴 일도 없고.”
 
탁! 신경질적으로 신문을 내려놓은 세리가 고개를 돌려 한숨을 토해 냈다.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 눈빛에 짜증이 그득 묻어 있었다.
어깨에 닿지 않는 단발머리도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듯, 크게 흔들린다.
그때, 헛기침을 하던 조 대표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슬쩍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윤 대표님 입장에서도 나쁜 일은 아닐 텐데요.”
“…아, 그렇게 생각하세요. 조 대표님?”
“생각해 보세요. 김도형 배우, 이제 막 다시 시작하려고 발돋움하고 있는데.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그것만큼 속 쓰린 게 또 어디 있겠습니까. 노이즈 마케팅, 뭐 그렇게 생각하면-”
 
말을 더 잇지 못한 건, 세리의 날 선 시선 때문이었다. 눈을 부릅뜬 그녀가 조 대표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에.
세리는 이 바닥에서 유명했다. 일명 미친 딱따구리.
어떤 상황이든, 무슨 일이든 가리지 않고 쪼아 결국 원하는 걸 얻어 내는 성격에서 비롯된 별명이었다.
특히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답변이나, 수긍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성격이 확연하게 드러났다.
이해하고 수긍할 때까지 상대를 쏘아붙이고는 했다. 물론, 그럼에도 수완과 능력이 좋아 두루두루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잘못 걸렸다. 조 대표가 머쓱한 웃음으로 시선을 피했다. 이상하게 세리의 기세는 좀처럼 짓누른다거나, 이겨 먹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정해성 배우는 아무 타격 없을 줄 아나 봐요? 이혼한 전남편 집에 당당히 찾아간 정해성. 시기도 참 좋아, 뒤풀이가 끝나자마자 김도형을 찾아간다? 하! 이렇게 물어뜯기 좋은 이야기가 또 어디 있을까!”
 
참다못해 말을 쏟아 내던 세리가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신문을 툭 건드렸다. 예민함을 감추지 않은 채 씨근거리던 그녀가 숨을 크게 몰아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렇게 한참 숨을 고르다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허리를 곧게 세웠다. 분노로 이글거리던 눈이 금세 냉정을 되찾았다. 제 앞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보는 표정이 냉철하게 굳어 있었다.
 
“김도형 배우, 아니… 우리 도형이. 여기까지 다시 올라오는 데 참 많이 노력했어요. 충분히 힘들었고, 애썼어요.”
“뭐, 그렇게 감성팔이 하면 우리 유찬이도.”
 
차 대표가 입을 열었지만, 차갑게 얼어붙은 세리의 표정에 금세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흠, 짧은 헛기침을 뱉던 그가 머쓱한 듯 고개를 돌려 저 멀리를 훑는다.
세리는 끝까지 차 대표를 노려보다가,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도형을 돌아봤다.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애착이 담겼으나 한편으론 안타까움이 스몄고, 신뢰가 쌓여 있는 만큼 속상한 마음이 오롯이 드러나는 시선.
 
“…겨우 올라온 이 친구 손, 내가 직접 밟고 싶지 않아요. 다시 떨어트리기엔, 김도형한테 거는 기대가 아주 크거든.”
 
도형은 아랫입술을 뭉근히 짓씹었다.
듣기에는 좋은 말이지만, 또 다른 속내가 숨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윤세리 대표님.”
 
그 미묘한 공기를 깨트린 건, 해성의 목소리였다.
 
“걱정할 이유가… 있습니까?”
 
세리의 미간이 좁아진다. 조금 전, 기사를 보고도 저런 말을 한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정해성 씨한테는 별거 아니겠지만-”
“최유찬 씨. 김도형 씨 집에 왜 갔습니까?”
 
세리의 말을 단칼에 끊어 낸 해성이 유찬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지 않아도 날카롭게 치켜 올라간 눈매가 더 매서워 보였다.
 
“걱정이 됐으니까요. 술까지 먹어서 힘들어 보였고.”
“그럼, 저는 왜 김도형 씨를 찾았을까요. 윤 대표님?”
 
세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해성의 다음 말을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
이마를 긁적거리던 해성이 제 앞에 놓인 임시 발행면을 집어 들었다. 기사를 내려다보던 그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하루 이틀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이런 기사에 일희일비할 때는 지나지 않으셨을까요.”
 
고개를 가로젓던 해성이 다시 테이블 위로 신문을 탁, 던져두고 반대쪽 다리를 꼬아 앉았다. 여유 넘치는 그의 표정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용하세요. 정해성과 김도형의 입장.”
“…이용하라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요.”
“김도형 씨는 뒤풀이 때부터 컨디션이 저조했고.”
 
말을 잠시 잇지 않던 해성이 고개를 돌려 유찬을 바라봤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집으로 일찍 귀가했으나, 정해성은.”
 
잠시 숨을 삼킨다. 지금 자신의 결정은 무척 충동적이다. 도형뿐만이 아니라, 저에게도 어떤 여파를 미칠지 모른다.
하지만 유찬이 그런 선택을 하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미친 짓을 해야 한다면, 적어도 그 주체는 저여야만 한다.
 
“그 모습조차 눈에 밟혀서, 김도형을 따라갔다. 왜? 전남편이니까. 아직… 나는 그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해성이기에 허락되는 자신감일지도 모른다. 솔깃한 이야기이기는 했으나, 세리는 이런 모험이 달갑지 않은 사람이었다.
 
“오히려 도형이가 역풍을 맞을 수도 있어요. 정해성 씨.”
“네, 윤 대표님 말대로 역풍을 맞을 수 있으니 저기. 최유찬 씨의 도움이 필요하죠.”
 
모두의 시선이 유찬에게 향한다.
 
“최유찬 씨는 김도형 씨가 걱정돼서 집에 찾아온 겁니다. 뭐, 실제로도 그런 거지만. 병원이라도 데리고 가고 싶어서 왔다고 하면 될 거예요. 두 사람 친분이야 익히 알려져 있고.”
“…….”
“윤 대표님. 어차피 완벽한 회피는 없습니다. 어떤 말을 덧붙여도 김도형 씨를 향한 화살은 날아올 거예요.”
 
해성의 시선이 도형에게 향했다. 그에게 이런 일이 처음이라는 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저렇게 주눅이 들었고, 걱정 어린 표정으로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일 테지.
이럴수록 당당해지라고, 다른 방도를 찾아 도망가자는 말을 하고 싶지만. 지금의 저는 그런 말조차 쉽게 건넬 수 없는 입장이다.
그렇다면 도망갈 길을 만들어 주면 그만이다. 시작점에 함께 서 있는 것도 운이 따라 준 것일 테니까.
 
“하지만, 이 경우는 조금이라도 그 화살을 돌릴 수 있죠. 멋진 척, 태연한 척 살다가 이런 순간에 김도형에게 매달리는 정해성. 친구를 위하는 마음으로, 한달음에 뛰어와 준 최유찬. 꽤 괜찮은 그림이라 생각하는데요. 김도형 씨 입장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만.”
 
해성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소파에 기대어 앉았다. 여전히 도형을 향한 눈빛은 거두어지지 않은 채였다.
 
“저는 동의합니다.”
 
유찬이 냉큼 말을 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던 그가 기사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도형이는 새벽 내내 아파서 정신도 못 차렸었어요. 그러니 정신을 차리자마자 괜한 스캔들에 휘말릴까 정해성 씨를 내보낸 겁니다. 저 역시, 도형이가 걱정돼서 집으로 찾아간 거고. 처음부터 끝까지 작품을 위한 일로 가져가면, 모든 눈길은 도형이가 아닌 저와 정해성 씨에게 향하겠죠.”
 
유찬의 대답에 깜짝 놀란 차 대표가 고개를 돌렸다. 휘둥그레진 눈이 그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유찬아, 그러면 네 이미지가….”
“어차피 제작 발표회 때도 의미심장하게 말한 저예요. 여기서 애매하게 나가는 게 더 이상할 거라고요. 기자들한테 먹잇감 던져 주는 거나 다름없고.”
“최유찬.”
“어차피 드라마의 연장선이에요. 조금 전에 조 대표님도 그러셨잖아요. 노이즈 마케팅, 괜찮다고. 이 정도는 오히려 가십거리로 딱 좋죠. 그러니까 허락해 주세요. 대표님.”
 
흔들리지 않는 유찬의 대답에 차 대표가 앓는 소리를 내며 이마를 짚었다. 조 대표에게 뭐라고 말을 해 보라 눈짓하지만, 대답이 돌아올 리가 없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해성이었으니까. 대표마저도 감 놔라 배 놔라 하기 어려운 사람.
세리 역시 할 말을 찾지 못해 침묵만 지키고 있을 때, 해성이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열었다.
 
“김도형 씨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리고 도형의 시선이 다시금 해성에게 향한다. 저를 마주하는 그 매서운 눈매가 이전처럼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던 그 눈빛마저도, 지금은 속내가 여실히 드러난다.
그러니 다시 한번 곱씹게 된다. 왜, 어째서 이럴 때만. 하필, 이런 순간에만.
도형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세리를 마주했다. 어떻게 할 거냐는 듯, 저를 채근하는 시선을 보다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30분이라도요.”
 
함부로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해성과 유찬에게마저 비뚤어진 시선을 안겨 줄 수 있는 일이었으므로.
하지만 도형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어떤 입장 표명도 없이 기사를 내보낸다면, 저는 다시 역풍을 맞게 될 것이다.
 
“그래, 조금만 쉬고 와. 30분이면 돼?”
“네. 30분이면 충분해요.”
 
도형이 어색하게 웃자, 세리는 조 대표와 차 대표에게 커피나 한잔하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들이 모두 바깥으로 나가고, 사무실에는 세 사람만이 남게 됐다.
 
“내 말대로 해.”
 
해성의 말에 유찬이 표정을 찡그리며 날카로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도형이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최유찬 씨도, 저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친구로서 하는 말입니다.”
“선배로서 하는 말이고.”
 
조금도 굽힐 생각이 없는 두 사람의 모습에도 도형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바닥을 내려다보며 조금 전 해성의 말을 곱씹을 뿐.
 
“…형 말대로 하라는 건.”
 
마침내 도형이 입을 열자, 해성과 유찬이 그를 돌아본다.
할 말을 찾지 못해 벙끗거리는 입, 난감하다는 듯 이리저리 훑어보는 눈동자. 그런 도형의 모습에 해성이 입 안쪽 여린 살을 꽉 짓씹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미안해. 실언이었어.”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흉부를 부풀렸다가, 제 모습으로 돌아오게 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나를 이용해. 그리고 도망가.”
 
도형의 눈빛이 흔들린다.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힘껏 그러쥔 채, 해성을 가만히 마주했다.
 
“정해성의 그림자에서. 나와 얽히는 그 모든 이야기에서 도망가란 뜻이야. 쓸데없는 건 이쪽에서 전부 끌어안을 테니까.”
 
담담하게 대답하는 해성의 말에 도형은 한참이나 그 이야기를 곱씹어야만 했다. 그리고 픽 코웃음을 터트리고는 고개를 숙여 맞잡은 제 손을 내려다봤다.
 
“…꿈같은 이야기네요.”
“아니.”
 
단호한 대답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당신이기에 확신할 수 있는 거란 말을 하려다가, 이어지는 말에 이내 입을 꾹 닫고 말았다.
 
“이제부터 네 그림자에 갇히는 건, 내가 될 테니까. 너는… 도망갈 수 있어. 김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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