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자각의 소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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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찬과의 촬영 이후, 해성은 원인 모를 불면증을 앓았다.
 
“관리 하면 정해성. 정해성 하면 관리. 와, 이번에 그 법칙이 깨지네.”
 
놀리는 듯, 걱정하는 듯 말하는 성혁의 핀잔에도 해성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불면증의 원인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부정하며 피하고 있을 뿐.
오랜만에 도형과 촬영하는 날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유진의 회사와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는 도형의 연구소로 가 그에게 이직을 제안하는 신.
그래서인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다른 배우들보다 일찍 촬영장에 도착해 대본을 한참 들여다보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대본을 넘기며 미리 체크해 둔 부분을 한참 살피는데, 누군가 해성의 앞에 불쑥 다가왔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고개를 슬쩍 들자 보이는 건, 자신의 절친한 친구 역할을 맡은 임하경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제법 날카롭게 생긴 인상. 남자라고 하기에는 도형만큼이나 왜소한 몸을 가졌다.
 
“…아,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으레 그렇듯, 인사치레로 한마디를 던진 해성이 다시 대본으로 시선을 옮겼다.
기분이 좋다는 방증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귀찮아서 고갯짓으로 대충 넘겼을 사람이었다. 물론, 그런 까칠함이나 예민한 모습도 유명했기에 그 누구도 토를 달지 않았다.
정해성이니까. 대한민국 명실상부한 인기 배우, 정해성.
인사를 남긴 것만으로도 충분하겠지 싶어 다시 대본을 훑는데, 이번엔 하경이 그의 곁에 앉았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활짝 웃으며 묻는 말에 곁눈질로 그를 살피던 해성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뭐.”
“요 며칠 선배님 컨디션이 영 안 좋다는 소문이 들려서 걱정하던 참이었어요.”
“괜찮습니다.”
 
다소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하경은 아랑곳 않은 채 그에게 바짝 붙었다.
해성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던 그가 놀란 듯 너스레를 떨었다.
 
“그나저나, 선배님 관리 어디서 받으세요? 피부가 너무 좋은데.”
 
그러곤 가까이 다가와 해성의 볼에 손끝을 댔다.
갑작스럽게 닿는 낯선 감촉.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순간이었다. 해성은 들고 있던 대본으로 그의 손길을 막았다.
 
“선배, 선배. 그렇게 말하면서 함부로 손대는 건 누가 가르쳤습니까.”
“네? 아니, 저는….”
“알랑거리면서 치대면 좋아할 줄 알았던 모양인데,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행동입니다.”
 
뒤이어 해성의 날카로운 시선마저 맞닿자, 하경은 움찔거리며 손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죄송합니다. 저는, 그냥….”
“조심합시다.”
 
제가 아니더라도 다른 배우들 또한 마찬가지일 거라 말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하경의 행동을 친근함의 표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을 테니까.
그들의 취향이나 생각까지 자신이 일반화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취향은 존중해 줘야지.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볼일 끝났습니까?”
 
질문을 던지면서도 해성의 시선은 하경에게 닿아 있지 않았다.
얼굴 한쪽을 가리던 대본을 펼친 뒤, 자신이 읽던 페이지를 천천히 찾고 있을 뿐.
 
“끝났으면 가서 대사 한마디라도 더 외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
“나는 연기에 진심이지 않은 사람과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곁에 앉아 있던 하경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뒷짐을 진 채 두어 걸음 해성에게서 멀어지더니, 그를 향해 빙긋 웃는다.
 
“그런데 옛날엔 왜 그러셨을까요.”
 
순간, 대본을 살피던 해성의 눈이 그대로 굳는다. 대본을 쥐고 있던 손끝에 힘이 실렸다.
 
“아니,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번에는 왜 그러셨을까요?”
 
목소리에 섞인 웃음이 퍽 얄미웠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를 마주했다.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 그거, 며칠 전 선배님 모습 아닌가요? 아, 이 말도 실례가 될 수도 있겠네요.”
 
줄줄이 말을 뱉던 하경은 싱긋 웃으며 두어 걸음 다시 뒤로 물러났다.
 
“이따 촬영하면서 뵙겠습니다. 수고하세요.”
 
해성이 무어라 말을 얹기도 전에, 하경은 종종걸음으로 그의 시야에서 벗어났다.
대체 왜 온 걸까. 한숨을 푹 쉬던 그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지만 이제 와 대본이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그대로 의자에 몸을 기대앉으며 하경과의 대화를 곱씹었다.
연기에 진심이지 않은 사람과 일하고 싶지 않은 정해성.
그리고 며칠 전, 연기에 진심이지 못했던 제 모습.
신인 배우마저도 눈치챌 정도였나. 헛웃음을 터트리며 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도형이 너도, 이런 내가 웃기겠지….’
 
하지만 끝끝내 속에 맴도는 말은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언젠가 물어볼 수 있는 날이 올까. 묻고 나면, 김도형은 웃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가슴 한구석에 한숨이라는 커다란 돌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촬영장은 이미 분주했다.
여기저기서 움직이는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눈 도형은 나 감독의 근처에 마련된 제 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오늘 촬영에서 보여야 할 예현의 감정선과 모습에 대해 나 감독과 한참 이야기한 뒤, 다시 대본에 집중했다.
<별을 담은 잔>의 주인공은 분명 네 사람이었지만, 촬영을 할 때마다 새삼 깨닫게 된다.
결국, 이 이야기의 진짜 주인공은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예현이라는 것을.
자신의 길을 개척하고, 찾아가고, 종래에는 저를 온전히 마주해 주는 이에게 마음을 내어 주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알고 있기에 더욱 중압감이 생긴다. 잘해 내야만 한다는 사실이 자신을 움직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도형 선배.”
 
한참 대본에 몰두하고 있는데, 곁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곳엔 저를 보며 활짝 웃고 있는 하경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일찍 오셨네요.”
“뭐, 주연급은 아니지만… 열심히 해야 앞으로의 일도 탄탄대로 아니겠어요?”
“일찍 움직인다는 건 그만큼 부지런하다는 이야기니까요. 다음에는 저도 조금 더 일찍 와야겠네요.”
 
도형은 넉살 좋게 받아치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곤 대본으로 시선을 옮겼다.
다시 집중하려던 찰나, 이번에는 하경이 도형의 곁에 앉았다.
 
“선배. 우리, 셀카 한 장 찍을래요?”
“셀카요?”
“최근에 SNS를 다시 시작했거든요. 그런데 영 올릴 사진이 없어서요. 촬영 중인 건 팬들도 아는데, 여기 근황을 다 찍어 올리긴 힘드니까. 그리고 제가 이렇게 대화 몇 마디 나눠 본 것도 도형 선배가 유일하거든요. 안 될까요?”
 
원래 이렇게 살가운 사람이었나. 분명 합숙 리딩 때는….
잠시 생각하던 도형이 고개를 살짝 가로젓고는 하경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네. 그래요. 어려운 일도 아닌데요, 뭐.”
 
그래. 셀카 한 장이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지.
 
“고마워요. 역시, 도형 선배는 들어줄 것 같았어요.”
 
도형의 허락에 핸드폰을 꺼내던 하경이 맞은편을 쳐다봤다. 이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해성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맞다. 저 궁금한 게 있는데.”
 
하경의 시선은 여전히 해성을 향한 채였다. 빙긋 미소를 짓던 그가 천천히 도형을 돌아봤다.
 
“뭔데요?”
“해성 선배님, 원래 누가 만져도 아무렇지 않게 가만히 있어요?”
“…네?”
“아니, 피부가 너무 좋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홀린 듯이 얼굴을 이렇게, 만졌는데.”
 
하경이 도형의 한쪽 볼을 톡 건드렸다. 깜짝 놀라면서도 저지 한 번 하지 않는 그를 보다가, 이번에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 쥐듯 매만진다.
 
“선배처럼 아무 반응이 없더라고요. 그냥, 저만 가만히 쳐다보시던데.”
“…그랬군요.”
 
합숙 리딩 때처럼 함부로 만지지 말라 저지해야 했는데, 자꾸만 주변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아니, 그보다는 당황해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그중 가장 큰 건 해성의 이야기였다.
 
얼굴을 만졌는데도 아무 제재를 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지켜봤다.
 
오래 전, 자신이 얼굴을 만지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던 사람이었다. 표정이 굳거나, 제 손을 피하는 일이 다반사였는데.
웃을 수 없었다. 사람이 많이 바뀌었다며 농담으로 넘겨도 될 이야기인데, 좀처럼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언젠가 저를 향해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던지던 그의 모습은 지워진 지 오래였다.
이윽고 하경의 얼굴이 또렷하게 두 눈에 들어왔다.
날렵한 콧대와 고양이 같은 눈매. 새하얀 피부와 언제나 자신감에 넘치는 듯 또랑또랑 빛나는 눈동자.
 
‘해성이 형이… 이런 타입을, 좋아했구나.’
 
그럴 수도 있지. 아니, 그럴 수밖에 없지.
매사 자신감이 넘치는 듯한 하경의 모습은 해성이 제게 바라던 것들을 떠올리게 했다.
알게 모르게 요염한 말투와 손짓, 사람을 파고드는 듯한 화법.
혼자만의 동굴로 파고 들어가 생각을 거듭하는 저와 정반대의 모습이니 호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한참 생각에 빠져 있는데, 찰칵. 사진을 찍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어느새 하경이 셀카를 한 장 찍은 뒤였다.
 
“어? 하경 씨.”
 
그리고 다시 한번 찰칵. 이번에는 놀란 도형의 얼굴이 담겼다.
 
“아, 귀여웠다. 이번 사진 진짜 귀엽게 나왔어요.”
“…신호라도 주시지.”
“선배는 꾸민 모습보다 이렇게 자연스러운 게 더 잘 나오던데. 몰랐어요?”
 
정말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묻는 하경의 모습에 도형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가요.”
“그렇대도요! 선배한테도 보내 주고 싶은데. 혹시 번호 알려 줄 수 있어요?”
 
가장 난감한 순간이었다.
매니저를 통해서 보내 달라 말하면 되는데, 괜히 머뭇거리게 된다.
 
“아, 맞다. 내가 번호를 받기엔 너무 무명이다. 그쵸?”
 
어색하게 웃는 하경의 모습에 도형이 깜짝 놀란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어요. 번호 알려 드릴게요. 핸드폰 주세요.”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되는데.”
“무리 아니에요. 괜찮아요.”
“고마워요.”
 
하경은 살짝 웃으며 핸드폰을 건넸다.
도형이 번호를 찍어 주는 사이, 하경은 해성이 있는 쪽을 가만히 지켜봤다.
역시, 저를 노려보는 눈이 매섭다. 저 시선의 이유는 뭘까. 한참 생각하다가 싱긋 미소를 짓는다.
 
“하경 씨, 여기요.”
 
그리고 도형이 건네는 핸드폰을 받아 들며 그의 손목을 살짝 움켜쥐었다.
해성을 향하던 시선이 서서히 도형에게 돌아간다.
 
“고마워요.”
 
하경은 도형의 손목을 매만지며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 순간, 낮은 발소리가 두 사람을 향해 가까워졌다.
 
“김도형 씨.”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그곳엔 단단히 표정이 굳은 해성이 있었다.
 
“네, 선배님.”
“대사 좀 맞춥시다.”
 
목을 긁는 듯한 목소리에 도형이 대본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저요?”
 
당황한 나머지 제게 한 말이 맞냐는 바보 같은 질문을 던지고 말았지만, 해성은 개의치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김도형 씨 말고 누가 있습니까.”
 
대체, 해성은 왜 이렇게 화가 난 걸까. 정말 하경이 마음에 든 걸까.
괜한 생각들이 머리를 빠르게 스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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