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미련은 후회에서 비롯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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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말에 구원을 받는 건 위험한 일이라고 했다.
그 손길에 익숙해지는 것도, 자신이 서 있는 곳에 지지대가 되어 줄 누군가를 세워 두는 것도.
 
“…고마워.”
 
그래서 더욱 노력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제게 손을 내밀더라도 그 온기에 익숙해지지 않도록. 두 번 다시 저 혼자 쓰러지는 꼴을 반복하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버텨 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순간, 유찬이 전한 마음이 그 모든 다짐을 흔들리게끔 한다.
결국, 그 감정을 채 갈무리하기 위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래도 좀 모순이기는 하다. 너 힘든 거 싫어서 도와준 건데, 또 나랑 엮이면….”
 
머뭇거리는 유찬의 목소리에 도형이 고개를 들어 올린다.
 
“또다시 과거에 엮이면, 나는 영영 벗어나지 못할 거야. 내가 이야기한 대로 그동안 많은 노력을 해 왔고, 벗어나고 싶어서 발버둥까지 쳤는데 또 거기에 갇히면… 이번엔 정말 낭떠러지를 만난 기분이 들 것 같아.”
 
유찬은 그런 도형을 보며 쓰린 속을 재차 삼켜야만 했다.
이럴 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는지, 어떤 대답으로 그를 응원해야 하는지. 어디에서도 배운 적이 없었다.
사람을 응원하고 위로하는 데 특출한 재능이 있는 건 아니라지만, 그 정도 능력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도형이 쓰러질 것 같을 땐 붙잡아 주고, 흔들릴 때면 세워 주고, 갈피를 잡지 못할 땐 함께 길을 찾아 주는 역할을 했으니까.
그런데 왜, 지금은 그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바보처럼 입만 꾹 닫고 있는 걸까.
 
“그리고 사실 떳떳하니까 괜찮아. 친구 사이에 무슨. 기사에서 나오는 감정들, 결단코 없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어. 안 그래?”
 
웃으며 말하는 도형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에 입을 뗄 수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친구 사이. 그러니 기자들이 어떻게 떠들어도 떳떳해지는 게 옳다.
그게 전부 사실일 텐데.
 
“…그렇지, 아마도.”
 
단번에 수긍하는 일이 왜 이렇게 힘들게 느껴지는 걸까.
 
“네 말이 맞아.”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 있는데도 웃는 것 같지 않다. 입꼬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도형이 네 말이, 맞아.”
 
재차 다짐하듯 이야기하는 건, 앞서 나가는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 위함이다.
몇 번인가 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 맞아. 마지막으로 되새기는 한마디를 억지로 집어삼킨 뒤, 그의 어깨를 힘껏 쥐었다가 놓는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그러지 마. 나 생각해 주는 사람 너밖에 없다는 거 잘 아는데, 가능성도 없는 일로 괜히 구설수 휘말리는 건 좀 그렇잖아.”
 
가능성이 없는 일이다.
그 말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유찬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둘러 말하고 있었지만, 싫다는 뜻이겠지.
분위기를 전환하고자, 너스레를 떨며 환한 미소와 함께 물었다.
 
“가자, 저녁이나 같이 먹을까?”
“아, 미안. 오늘 가족들 만나기로 했어. 제작 발표회 끝나고 나면 크게 한턱 쏘겠다고 말해 놨거든.”
“그래, 그럼 잘 만나고 와. 나랑 밥 먹는 건 다음으로 미루면 되지.”
“어차피 조만간 또 만나잖아. 드라마도 같이 찍는데 뭐, 그때 보자.”
“그래, 그때.”
 
유찬은 겨우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전엔 안 보는 거야? 묻고 싶었지만, 도형이 알고 있는 것을 제가 모를 리 없었다.
줄줄이 쌓인 스케줄을 모조리 끝마쳐야 <별을 담은 잔>을 촬영하는 데 큰 문제가 없으리라는 사실을.
결국, 도형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보자는 인사 또한 속으로 꾹꾹 삼켜 냈다.
지금이라도 손을 뻗는다면 잡힐 텐데, 그 후에 이어질 상황에 머리가 하얗게 변한다. 손가락 하나 뻗지 못한 마음만이 도형의 곁에 우뚝 설 뿐이었다.
달칵, 문이 닫히기 무섭게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지만.
 
“…대체, 뭘 원하는 거야.”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을 한숨으로 토해 낸다. 머리를 쓸어 올리는 유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찾아가길 잘했지.
혼자 속으로 끙끙 앓고 있는 것보다야 훨씬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기실로 돌아가는 유찬의 매니저와 살짝 목 인사를 나누고, 우태에게 다가갔다.
 
“이야기는 잘했어?”
“응, 잘 끝났어.”
“너는 무슨 성질을 그렇게 내고 그래. 보는 내가 다 무섭더라.”
“…내가 언제 그랬-”
 
저 때문에 화를 낸 것뿐이라고 말하려다가 입을 꾹 닫았다. 조금 전, 유찬이 그런 생각은 절대 하지 말라고 일러두었으니까.
그런 도형을 보던 우태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나저나, 최유찬도 대단하다. 어떻게 거기서 그런 말을 하냐. 추측성 기사 쏟아지면 피곤한 건 피차 마찬가지일 텐데. 거기 소속사 대표님이 또 노발대발하면 어쩌려고.”
“내 말이 그 말이야. 괜히 그런 말 했다가 여기저기서 오해라도 사면….”
 
말을 채 잇지 못한 건, 복도를 돌아서자마자 보인 해성의 모습 때문이었다. 벽에 기댄 채 팔짱을 끼고 있던 그는 미간을 좁힌 채 도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별거 아닌 듯 지나쳐야만 했다. 보지 않은 척, 눈도 마주치지 않은 척. 머릿속으로는 그렇게 해성의 곁을 유유히 지나가는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지만….
현실은 달랐다.
 
“야, 도형아.”
 
우태가 저를 부르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 자리에 오랫동안 남아 해성을 바라보고 있었겠지.
 
“어? 어, 가자. 형.”
 
간신히 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럽게 해성의 앞을 지나치려는데, 제 손목을 꽉 붙잡는 악력이 느껴진다.
당황해서 고개를 돌리자,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을 마주했다.
가슴이 덜컹 떨어진다. 분명 기억에 있는 눈빛이다. 자신이 겪어 본 그 언젠가의 시선과 비슷했다.
 
“이야기 좀 합시다. 김도형 씨.”
 
다소 사무적인 말투와 고압적인 태도 또한, 그 시절과 다르지 않다.
 
“최유찬 씨랑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할 말을 잃었다. 적어도 대답할 시간은 줘야 할 거 아니야.
이제는 해성의 말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의아할 정도로 제게 관심을 쏟는 그였지만, 휩쓸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네, 아무 사이도 아닙니다.”
“내가 보기엔 아무 사이 같던데.”
 
해성의 한마디에 도형이 입술을 힘껏 눌렀다. 울컥 차오르는 감정을 애써 갈무리하며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그게 정해성 씨와 무슨 상관입니까? 제가 최유찬 씨와 무슨 사이라고 한들, 정해성 씨가 신경 쓸 이유도 없지 않을까요.”
 
해성의 입이 굳게 닫힌다. 흔들리는 눈동자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에서 그 기분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도형은 꼿꼿한 태도로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앞으로는 이런 식으로 사람 붙잡지 말아 주세요. 기자라도 마주친다면, 곤란한 건 저뿐만이 아닐 겁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해성을 가만히 바라보던 도형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러고는 고생하셨습니다, 짧게 떨어지는 한마디만을 남겼다.
차에 올라타 도로를 달리는 순간에도 도형의 머리를 가득 채우는 건, 당황한 듯 흔들리던 해성의 눈동자였다.
왜 그런 걸까.
도형에게 해성은 커다란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였다. 이따금 잔가지가 흔들리고, 나뭇잎이 저들끼리 몸을 부딪치기는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아래에서 나무를 올려다보는 도형에게는 작은 소음 한번 제대로 닿지 못했다.
언제나 자신이 처리하고, 해결하고, 갈무리하기 마련이었다. 곁에 있는 도형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거나, 불만을 토로하고 걱정하는 모습을 보인 적은 없었는데.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묻는 해성의 얼굴은 꼭,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닌 것만 같아서 이질감과 함께 의구심이 밀려온다.
물론, 이 감정이 얼마나 쓸데없는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굳이 자신이 캐내려 하지 않아도 되는 일. 그런 사람.
어서 머릿속에서 떨쳐 내야 할 일이라는 것도 아는데 해성의 모습이 뇌리에 정확하게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야, 김도형!”
 
생각을 이어 가던 즈음, 우태의 우렁찬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 어, 왜?”
“몇 번을 불러도 듣지를 않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어… 아무것도 아니야.”
“참 나, 너 오늘 본가로 가면 되냐고 물었잖아. 인마.”
 
아, 짧게 탄식하던 도형이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러고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집에 와 계시대. 집으로 가면 돼.”
“그래, 내려 주고 갈 테니까 맛있는 거 많이 먹어. 아니, 아니다. 적당히 먹어. 모레 화보 촬영부터 들어간댔어. 다들 스케줄이 안 맞아서 맞는 시간이 모레뿐이라고 하더라. 얼굴 부으면 안 되니까, 적당히. 알았냐? 적당히!”
“알았어. 걱정하지 마.”
 
너스레를 떨며 대답하던 도형이 한숨을 푹 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는다.
그럴 때마다 어슴푸레하게 떠오르는 건 해성의 눈빛이다. 어째서 저를 그렇게 쳐다본 걸까. 왜, 유찬과의 관계에 그토록 집착하며 묻는 걸까.
이전에는 자신이 누구와 무얼 하든 신경도 쓰지 않았으면서.
SNS에 주야장천 올라오는 사진들을 봤을 리도 만무하지만, 보았다는 가정을 두더라도 해성은 제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누구냐는 둥, 어디에서 알게 되었냐는 둥. 한 번쯤 할 법한 말들조차 제게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자신이 만들어 둔 저만의 울타리를 온전히 가꾸는 일에 더 치중하던 사람이었지.
그런데 왜, 모든 것이 끝난 것도 모자라 무너져 내린 이 상황에서 저에 대해 그토록 궁금해하는 걸까.
의구심의 끝은 결국, 전날 밤 제게 걸려 온 전화 한 통으로 갈무리된다. 왜 하필, 그런 순간에 자신을 찾아서 혼란스럽게 하는 건가.
원망을 곱씹던 도형이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렸다. 빠르게 지나가는 바깥을 한참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미묘하게 일렁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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