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The And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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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 돌아올 즈음, 게슴츠레한 눈을 뜨기 무섭게 허리가 욱신거렸다.
기상과 함께 통증이 동반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매일 아침 겪는 통과 의례와도 같았는데.
오늘처럼 필름이 뚝 끊긴 적은 없었다.
 
“…어제.”
 
혼자 중얼거리던 도형이 전날을 생각해 내려 애썼다. 한참 기억을 더듬거리던 그 찰나,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게 하나 있었다.
 
‘…형.’
 
해성을 나직이 부르며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뒤이어 떠오르는 건 제 위에 자리한 해성의 모습.
달뜬 표정과 밀려오는 열감에 일그러진 얼굴. 그리고 저들을 감싸던 불그스름한 노을빛까지.
 
“미쳤다.”
 
도형이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귀 끝까지 벌겋게 달아오르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진짜, 미쳤어. 김도형.”
 
해성과 밤을 보내는 게 처음은 아니라지만, 자신이 적극적인 순간은 없었다.
민망함에 몸서리칠 때쯤, 곤히 자고 있던 해성이 슬쩍 눈을 떴다.
 
“…당돌한 김도형.”
 
이어지는 말에 도형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옆을 돌아보자, 픽 웃는 해성이 보였다.
 
“깜짝 놀랐네. 우리 도형이한테 이렇게-”
“그, 그만! 그만.”
 
그의 말을 듣는 게 민망하기 이를 데가 없어서, 도형은 손을 뻗어 해성의 입을 틀어막았다.
 
“기, 기억 안 나요. 나 진짜 몰라. 그러니까 그만 말해요.”
 
거짓말, 해성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눈을 더 마주하고 있을 수가 없어서, 도형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씨, 씻고 올게요. 오늘 데이트 한다면서요.”
 
다급히 자리를 뜨려던 찰나, 해성이 도형의 허리를 붙잡고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단숨에 그의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됐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좋았는데.”
 
귓가로 나직이 흘러 들어오는 목소리에 온몸이 뜨거워졌다.
 
“저는 김도형 씨의 변신을 응원합니다.”
 
키득거리는 웃음과 함께 이어지는 한마디가 민망한 마음을 더욱 부추긴다.
도형은 단숨에 해성의 품에서 벗어나 욕실로 뛰어갔다.
평소 같으면 왜 그러냐는 둥, 놀리지 말라는 둥 볼멘소리라도 더 얹었을 텐데.
욕실 문을 닫자마자 자리에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우는소리를 낸다.
 
“진짜, 미쳤어.”
 
그러니까 술 좀 작작 마시지. 혼잣말에 울음이 섞여 있었다.
하지만 이미 후회해 봐야 지난 일.
앞으로 해성의 얼굴을 어떻게 보면 좋을지. 벌써부터 머리가 까마득해졌다.
 
***
 
준비를 끝마친 두 사람은 어색한 분위기를 끌어안은 채 차에 올라탔다.
아니, 사실 어색한 건 도형 한 사람뿐이었지만.
 
“아직도 민망해?”
“…네. 많이요.”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도형이 그저 귀엽기만 했다.
연인 관계에서, 더 나아가 다시 부부의 연을 맺게 될 사이에 적극적으로 대시하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
하긴, 매번 저의 리드로 이루어지던 관계이니 어색할 만도 한가.
더 놀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괜한 장난으로 도형의 미움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갑니다. 오늘 하루 잘 따라와 주세요.”
 
하루를 지내다 보면 자연히 돌아올 거라 믿으며, 해성은 천천히 주차장에서 빠져나갔다.
두 사람의 하루를 빛나게 해 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시선을 피한 채 차창 위로 떨어지는 햇볕 조각을 한참 쳐다보던 도형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상하지는 않았어요?”
“뭐가?”
“어제, 내가 그런 거.”
 
도형의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해성은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눌렀다.
 
“아니?”
“너무, 막 들이대서… 싫었던 것도 아니고?”
“도형이 너는, 내가 너무 들이대면 싫어?”
“설마. 아니에요!”
 
다급한 대답과 함께 드디어 저를 돌아본다. 시선을 마주한 해성이 픽 웃어 버렸다.
 
“그럼, 나라고 싫었을까.”
 
입장을 바꿔서 대입하니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민망한 건 어쩔 수 없어서, 다시 쭈뼛거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싫지 않았다면 다행이다. 이번에는 웃음이 비죽거리며 새어 나왔다.
잠시 후, 조용했던 차 안에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어, 이거….”
“누가 잔뜩 넣어 줬지. 플레이리스트.”
“이게 아직도 있어요?”
 
놀란 도형의 목소리에 해성은 그저 미소만 지어 보일 뿐,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어쩐지 마음이 이상했다. 오래전, 자신이 담아 둔 플레이리스트가 아직도 재생된다. 해성이라면 당연히 다른 노래로 덮을 줄 알았는데.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감정들을 하나둘 곱씹으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익숙한 레스토랑이었다.
 
“형, 여기는….”
“기억나?”
“…안 날 리가 없잖아요.”
“저번에 혼자 왔었는데, 다시 오고 싶더라고.”
 
해성은 도형의 손을 꽉 붙잡아 주었다. 그를 돌아보는 얼굴에 미소가 가득했다.
 
“도형이 너랑.”
 
데이트라고 하더니, 알고 보면 이루지 못한 꿈이 실현되는 특별한 하루가 아닐까.
그저 레스토랑에 온 것뿐인데, 괜히 울컥 차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도형은 해성이 이끄는 대로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미리 예약을 해 둔 건지, 해성이 이름을 대자마자 직원이 구석 자리로 안내했다.
도형이 명당이라고 말했던, 그 자리였다.
 
“이 자리도 여전하더라고.”
 
이 기분을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일이 자연스럽게 펼쳐지는 이 순간 느끼는 감정들을.
벅차오르는 마음으로 해성의 맞은편에 앉았다.
식사를 끝마친 뒤, 해성은 또 도형을 이끌었다.
 
“이번엔 어디 가는 거예요?”
“글쎄. 일단 또 따라와 보면 알겠지?”
 
이제는 굳이 어딜 가느냐 더 캐묻지 않았다.
어딜 가든, 해성이 제게 놀라움을 선사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므로.
그의 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도형이 말했던 ‘사람이 없는’ 영화관이었다.
 
“다, 기억하고 있었어요?”
“머리는 잠깐 잊었는데, 몸은 기억하고 있더라고. 지난번에 확인했어. 그리고 영화는, 이거.”
 
해성이 내민 건, 도형이 좋아하는 배우가 나오는 영화의 티켓이었다.
 
“네가 보고 싶다고 했던 건 재개봉 기간이 끝나서. 그건 나중에 집에서 보자.”
“…형.”
“대신, 네가 좋아하는 배우가 최근에 영화 찍었더라. 이것도 평 좋으니까.”
“로맨스 싫어하잖아요.”
“누구 덕분에 좋아졌어.”
 
절 위해 노력하는 걸까.
아니면 정말 그의 말대로 제가 좋아진 나머지 모든 걸 함께하고 싶은 걸까.
어느 쪽이든 간에, 해성이 저를 위해 손을 뻗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도형은 환하게 웃으며 해성과 손을 맞잡았다.
방송에 나간 뒤 가장 편하고 좋은 건, 해성과 손을 잡고 팔짱을 낀 채 돌아다녀도 괜찮다는 점이었다.
그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 해성과 도형을 발견했다는 신기함과 놀라움만 잇따를 뿐.
광고가 나오는 상영관, 어둠을 가로지르며 두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너무 뒤도, 앞도 아닌. 적당한 위치의 가운데 자리.
도형은 해성과 나란히 앉아 깍지 껴 손을 붙잡았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영영 깨지 않게 도와 달라는 우스꽝스러운 기도를 되뇌며.
영화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로맨스 영화라더니 슬픈 장면은 어쩜 그리 많은 건지. 영화관을 나오면서도 훌쩍거리던 도형이 주변과 해성을 번갈아 힐긋거렸다.
 
“형, 근데 이래도 괜찮아요?”
“뭐가?”
“사람이 좀… 많아서.”
“그게 어때서.”
“괜히 우리 봤다는 이야기 나오고 그러면….”
 
도형이 무얼 걱정하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픽 웃던 해성이 도형의 손을 더욱 힘껏 그러쥐었다.
 
“뭔가 잊고 계시는 모양인데, 우리 이제 당당해도 되지 않나. 방송에까지 나와서 동네방네 소문냈는데.”
 
아, 도형은 뭔가 깨달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괜한 걱정 말고. 자… 그럼, 이제 뭘 하러 가면 좋을까. 커피를 한잔할까? 아니면, 내가 생각한 대미를 좀 앞당길까.”
“대미가 뭔데요? 또 다른 게 있어요?”
 
이번엔 또 무슨 이벤트로 저를 깜짝 놀라게 만들까. 도형은 활짝 웃으며 해성에게 더 가까이 붙었다.
 
“있지. 그럼 그걸 먼저 할까?”
“뭐든. 형이랑 같이 하는 거면, 그게 뭐든 좋아요!”
 
꼭 강아지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것 같다.
두 사람은 손을 꼭 맞잡은 채 주차장으로 갔고, 차에 올라탔다.
기대감에 부풀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죽 뻗은 도로를 마주했다. 얼마나 달렸는지, 익숙한 풍경이 점점 눈에 들어왔다.
 
“…여긴.”
 
도형의 중얼거림에도 해성은 아무 말을 내어 주지 않았다.
마침내 차가 멈춰 선 곳은 두 사람이 함께 지내던, 그러나 결국 도형이 혼자 덩그러니 남아 버렸던 예전의 집 앞이었다.
해성은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여기는 왜…?”
“일단 내려 봐.”
 
얼떨떨한 마음으로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해성이 잡아끄는 대로 걸음을 옮긴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현관문 앞.
 
“들어가요?”
“아니. 여기서.”
 
그렇게 말한 해성이 주머니에서 조그만 상자를 하나 꺼냈다.
상자를 열자 보이는 건, 반짝이는 다이아링 하나.
 
“…형.”
“생각해 보니 이전에도, 이번에도 제대로 된 프로포즈가 없었구나 싶었어. 물론, 지난번에 비슷한 걸 하긴 했지만.”
 
도형이 고개를 들어 해성을 올려다본다.
 
“다른 사람들처럼 센스가 좋은 편이 아니라 어딜 꾸미진 못했어. 돈을 쓰면 분명 예쁜 공간을 만들 수 있겠지만… 온전히 내 힘으로, 하고 싶었거든.”
 
해성은 멋쩍게 웃었다. 올망졸망한 눈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도형을 한참 바라보다가, 한쪽 무릎을 꿇는다.
 
“영원이라는 말은 없다는 거 알아. 또 너를 아프게 할 수도 있고, 못난 나 때문에 힘들 수도 있지만. 하나 약속할게.”
 
상자에서 반지를 꺼낸 해성이 도형의 네 번째 손가락 위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자신이 이전에 주었던 반지와 레이어드해 낄 수 있는 디자인이었다.
 
“이전과 같은 상처는 주지 않아. 노력할게. 널 위해서, 내가 달라질게.”
“…해성이 형.”
“그러니까 도형아, 나랑….”
 
도형의 손가락을 맞잡는다.
감히 제가, 도형과의 두 번째 결혼을 입에 담아도 괜찮은 걸까.
그의 행복을 책임지겠노라는 말을 자신해도 되는 건가.
아니, 가 보지 못한 길을 지레짐작하여 판단할 수는 없다.
결국, 도형이 아니면 안 되는 건 제 쪽이니 어떻게든 그를 붙잡는 수밖에.
 
“한 번만 더, 결혼해 줄래.”
 
진심 어린 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아니, 애초에 해성을 제 맘속에서 내보낸 적도 없었으니, 이 고백을 마다할 이유조차 없는 것일 테지.
도형은 눈물이 죽죽 흘러내리는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해성을 힘껏 끌어안았다.
 
“고마워요.”
“…나도, 고마워.”
“다시 한번, 내 손 잡아 준다고 해서. 정해성의 김도형 할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요.”
 
해성은 제 품에 안긴 도형의 말에 픽 웃으며 등을 쓰다듬었다.
마음이 꽉 차오른다는 게 이런 걸 말하는 모양이다.
난생 처음 느껴 보는 감정들은 모두 도형이 제게 준 것이다.
그 생각 하나로 기꺼운 마음을 곱씹은 채,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누가 할 소릴.”
 
완벽한 프로포즈였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마음에 꽉 들어차는 해성만의 표현.
언젠가는 현재 진행형이었으나 과거가 되어 버린 집 앞에서 두 사람은 진실한 영원을 약속했다.
이제 영영 사랑에 갇혀 살자고, 두 번의 어그러짐은 없을 거라고.
달콤하게 속삭이는 해성의 말에 도형은 흐드러진 미소를 짓고 있었다.

স্লেটTempat cerita menjadi hidup. Temukan sekara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