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담하지만 가슴을 푹 찌르고 들어오는 질문에 할 말이 없어진다.
그렇지, 도형을 설득해야 하는 것 또한 제 몫이다.
제가 하는 말은 모두 진심이니 믿어 달라, 다짜고짜 말할 수 없다는 걸 왜 잊고 있었을까.
“…한 번도, 형을 믿지 않은 적이 없어요. 늘 형을 믿고 살았는데. 결국, 나는. 내가 얻은 건….”
만신창이가 되어 홀로 남아 버린, 2년이란 시간이었잖아.
목까지 울컥 차오르는 말을 간신히 삼킨다. 눈을 질끈 감은 채 입술을 잘근 씹었던 그때.
해성이 도형의 눈가를 살살 어루만졌다.
온갖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어떤 말을 해 줘야 도형을 달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고이 접어 버린다.
아니, 지금은 그를 달래야 할 때가 아니다. 제 진심만을 전해야 했다. 겉치레 하나 없는, 오롯이 제 마음속에 남은 진짜 이야기.
“모든 걸 버릴 수 있어.”
이러한 말을 뱉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모든 것’은 정해성이라는 이름의 가치조차 포함되는 이야기였으므로.
김도형이라는 사람만 곁에 있어 준다면, 그 무엇도 제게는 필요치 않았다.
“널 위해서… 네가, 내 이름 때문에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한다면, 기꺼이 내가 가진 것들을 버릴게.”
그러나 도형은 즉답할 수 없었다.
진심일까.
이마저도 불신으로 이어지는 게 슬펐다. 어째서 그의 진심마저 의심해야 하는가.
왜, 우리는 이다지도 멀리 떠내려와서 멀어졌는가.
“내 명성, 배우로서의 위치, 전부. 김도형 너를 위해서라면 모두 내다 버릴 거야. 네가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바라는 것들을 모두 이루고, 행복할 수 있다면.”
말을 멈춘 해성이 희미하게 웃는다. 도형의 눈가를 어루만지던 엄지 끝이 어느새 그의 한쪽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모두 버릴 수 있어.”
“왜. 왜, 그렇게….”
“경험해 봤잖아.”
도형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내, 해성의 가슴 한구석이 지끈거렸다. 울리고 싶었던 건 아닌데. 도형이 제 앞에서 웃기만을 바랐는데.
저는 언제나 그를 울게 만든다.
“부질없는 것들에 집중하느라, 뭐가 소중한지도 몰랐으니까. 그러니….”
짧게 숨을 들이켠 해성이 고개를 숙여 도형과 이마를 맞댔다.
주고받는 온기만으로도 이토록 행복할 수 있다는 걸, 왜 그땐 몰랐을까.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다니. 저는 이토록 어리석다. 바보 같고, 미련하다.
정해성에게 이런 고찰의 순간이 오리라고 누가 알았을까.
“이제라도 지켜야지. 부질없는 게 아니라, 정말 소중한 누군가를.”
해성의 말에 도형이 눈을 꾹 감았다가 뜨고, 다시 꾹 감고 뜨기를 반복했다.
울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코끝이 시큰거린다.
대답해야만 하는데도, 입이 제대로 열리지 않는다.
자신이 그에게 ‘소중한 누군가’가 되었다는 사실이 이토록, 벅찬 일이었구나.
“말로만 하는 게 아니야. 나는, 언제든지 준비되어 있어.”
그는 다시 한번, 도형을 붙잡는다.
“내 주변을 이룬 것들이 아닌, 너를 선택할 준비.”
제발, 한 번만 더 손을 붙잡아 달라고.
“…나는. 형.”
나직이 속삭이는 해성의 목소리를 곱씹던 도형이 그의 손을 힘껏 움켜쥐었다.
누군가는 제게 속지 말라고 할 것이다.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또 그에게 홀딱 넘어가 상처투성이가 될 것이냐고 할 수 있으나.
“…믿어요.”
해성이기에 믿는다.
단 한 번도 제 일을 포기한 적이 없는 사람이기에.
제가 가진 것들을 무엇보다 우선으로 여겼던 사람이었기에.
후회의 끝이 가진 것을 버리고서라도 저를 잡아야 한다는 결론이라면, 기꺼이 믿어야만 했다.
이런 마음을 모른 척하고 돌아서기엔, 저 또한 해성을 향한 마음이 너무나 컸다.
“형, 말… 믿어. 모두. 전부.”
믿는다는 말이 이토록 벅찬 말이었던가.
어쩌면 단 한 번도 제 곁을 떠나지 않았을 도형의 화답이 마음을 깊숙이 찌르고 들어와 헤집는다.
해서, 예전에는 전하지 못했던. 깨닫지 못한 정해성이었기에 전할 수 없던 말을 내뱉었다.
“너무 뒤늦게 후회해서, 미안해.”
도형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다. 이제라도 그의 진심이 전해졌으므로.
늦었다고 하지만, 결국 돌고 돌아 그 자리에서 다시 만난 셈이나 다름없으니까.
제 뺨을 꼭 그러쥔 해성의 손바닥에 조금 더 깊이 파묻히고 싶었다.
그러나 해성이 틈을 줄 리 만무했다. 숨을 한 번 들이켜나 싶더니, 도형에게 넌지시 말했다.
“그럼 이제, 네 차례네.”
“네?”
“대답해 줘야지.”
대답? 도형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다는 듯, 해성을 바라본다.
“대답….”
“내가 오해해도 되는 게 맞는 건지.”
그 물음에 도형의 눈이 잘게 흔들렸다.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지고, 심장이 크게 뛰었다.
그 모습을 본 해성의 숨이 거칠어졌다. 묵직한 우드 향의 페로몬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알파의 페로몬에 반응하지 않는 오메가는 없다. 순식간에 열이 올라, 두 사람 모두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형, 잠깐-”
“대답.”
해성은 틈을 주지 않았다. 다른 손으로 도형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제 쪽으로 잡아당겼고, 시선을 피하지 못하도록 얼굴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대답해 줘.”
집요한 요구를 들어주기 싫은 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대답에 따라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 같았다.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절대 알지 못했으며 수많은 과정을 겪었으면서도 눈치채지 못했던 그것.
“…형이.”
어째서 제게는 느껴지지 않는 것이고, 왜 해성은 느끼지 못하는 거냐며 속상해했던 그걸 깨닫게 될 것만 같았다.
초조한 마음에 잇새에 힘을 주었지만.
그의 눈빛에 저절로 입이 달싹거린다.
온몸에 들끓는 감정이 말을 해야 한다며 제 등을 떠밀고 있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 거라고, 이런 순간은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라고 종용한다.
결국 떨리는 숨을 가다듬지도 못한 채 내뱉고 만다.
“형이, 착각한 거 아니에요.”
그리고 깨달았다.
“싫어요.”
정해성이 자신의 짝이라는 사실을.
같은 공간에 함께 머무르며, 못다 한 이야기로 케케묵은 감정과 오해를 풀고, 결국 눈을 마주하며 솔직해지는 이 순간.
온몸이 절절 끓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이 느낌은, 분명했다.
해성이 저의 짝이다. 그동안 발현하지 못했던 그 감각이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아무 존재도 아니라는 거, 이제… 싫어.”
해성 또한 도형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가 간지러웠다. 당장에라도 그의 뒷목을 물어 자신의 것이라 표식을 남기고, 김도형을 정해성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히트와 러트가 오는 건 아직 멀었을 텐데. 왜 이렇게 그를 제 아래에 깔아 놓고 엉망으로 범하고 싶은 건지.
왜 이토록 자신의 소유로 만들고 싶은 건지.
돌이켜 보면 이제껏 마음이 닫혀 있어 알아채지 못한 것일지도 모른다.
옆집 동생, 아직 미숙한 감정들, 저를 우러러보는 도형의 시선에 오만해진 제 마음.
모든 것들이 제 감정을 가로막고 있었으리라. 저 또한, 그것들을 치울 생각은 하지도 않았을 테고.
결국,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을 맞물렸다.
뒤엉키는 건 저들의 마음일까, 이제껏 얽히지 못한 밭은 숨뿐일까.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하나.
서로에게 녹아들고 싶다는 사실이었다.
맞닿은 열기를 해소하고자 손을 힘껏 붙잡고, 몸을 붙들듯 끌어안았다.
하아, 긴 숨을 터트리며 입을 뗀 두 사람이 다시금 눈을 마주했다.
“…형.”
가느다란 숨이 섞인 한마디가 해성의 가슴을 푹 찌르고 들어왔다.
대답을 들어야 했는데, 그럴 여유가 없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을 삼키려는 찰나, 도형의 손이 해성의 입을 가로막았다.
그런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제 입을 막은 손부터 얇은 팔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종착지는 어느새 도형의 쇄골 부근이었다.
조금 더 올라가면, 자신이 가장 좋아하던 부위. 목과 턱이 이어지는 선이 보인다.
도형의 목선은 가늘다. 꼭, 해성이 얼굴을 파묻게끔 만들어진 것처럼 여린 선을 지니고 있었다.
“형, 우리-”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여리여리한 몸도 해성의 손길을 기억하는 모양이었다. 잘게 떨리는 몸이 그에게 안겼다.
“괜찮아. 괜찮아. 도형아.”
무얼 두려워하는지 알고 있다. 그렇기에 해성은 도형의 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제 무릎 위로 안아 올렸다.
참 정직하면서도 곧은 몸이다. 가지런히 뻗은 척추를 손끝으로 꾹꾹 누르며 올라간다. 여전히 맞물린 입술 틈으로 더운 숨이 오가고 있었다.
운동을 꽤 열심히 한 모양이다. 손바닥에 닿는 허벅지가 제법 단단했다.
도형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떨어진 해성이 픽 웃었다.
“운동 열심히 했나 봐.”
“왜요?”
“탄탄해졌길래.”
“아….”
도형은 해성의 손에 꽉 틀어잡힌 제 허벅지를 보다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좀, 많이.”
“잘 버티겠어.”
“뭘… 잘 버텨요?”
의아하게 묻는 도형의 목소리에 해성은 입꼬리를 씩 말아 올렸다.
쪽, 쪽. 도형의 얼굴 여기저기에 해성의 입술이 맞닿았다가 떨어진다. 선명한 마찰음에 괜히 발가락만 곱았다가, 펴기를 몇 번.
시선을 마주한 해성이 그의 다리를 더욱 세게 쥐었다.
“모르는 척하네.”
“…형!”
해성은 소리 내어 웃으며 다시금 도형의 목선에 얼굴을 묻었다.
형형하게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에 금방이라도 눈이 뒤집힐 것 같다만.
지금은 도형의 체향을 듬뿍 음미하는 데 정신이 팔렸다. 오롯이 이 순간만으로도 행복했다.
“도형아.”
이어지는 부름에 도형이 살짝 고개를 돌렸다.
“오늘… 같이 있을까.”
그 순간, 몸을 움찔거리던 도형이 해성의 무릎에서 내려가려는 듯 그를 밀쳤다.
그러나 순순히 놔줄 해성이 아니었다. 그의 다리와 허리를 꽉 붙잡은 채, 고개만 슬쩍 들어 올렸다.
“같이 있을래?”
“아니, 그래도-”
“같이 있고 싶은데.”
이건 반칙이다.
도형은 시뻘게진 얼굴로 제 아랫입술을 힘껏 짓씹었다.
한 번도 이런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이렇게 칭얼거리듯 말하는 건 저의 몫이었으니까.
해성의 올망졸망한 눈동자를 보니 또 말문이 턱 막혔다.
“네가 싫다면.”
“싫은 게 아니라.”
우물쭈물하던 도형이 해성을 힐긋 보며 입을 열었다.
“…눈치 보여서.”
“눈치를 왜 봐.”
“안 보는 게 더 이상하잖아요.”
“왜, 내가 전남편이라?”
해성의 말에 도형이 눈을 흘겼다.
맞는 말이라서 반박할 수 없기도 하고. 제 속내를 알면서도 노골적으로 농담을 던지는 그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얄미운 건지.
그런 도형의 모습에 옅게 웃음을 터트리던 해성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그사이, 도형은 해성에게 폭 안겼다. 저와는 다르게 단단하고, 우직한 어깨다.
어느 순간부터 이 품에 안기고 싶었다고 말하면 해성은 무슨 표정을 지을까.
이따금 이 어깨가 필요한 밤이 있었다고 한다면.
온갖 생각을 곱씹으며 가느다란 숨을 내뱉는다.
어쩐지 오늘 밤은 무척이나 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