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마지막 시련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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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와 다른 날이었다. 촬영이 끝난 뒤에는 물먹은 스펀지처럼 몸이 무거워지고는 했는데.
오늘따라 집에 가는 길이 즐거웠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요즘 퇴근길’이라고 해야겠지.
 
“그렇게 좋냐?”
 
백미러로 도형을 힐긋 보던 우태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요 근래 도형이 많이 밝아졌다. 전보다 더 자주 웃었고, 작은 일에 동요하지 않고 깊이 골몰하는 일이 줄었다.
자신의 생각을 더 명확히 말하게 됐고, 이따금 농담도 툭 던지는 여유가 생겼다.
이 모든 게 정해성 덕분이라는 사실이 조금 못마땅하기도 했지만, 아무렴 어떤가.
전보다 더 나아지는 걸 넘어서 이전의 김도형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응. 집에 가는 게 이렇게 좋을 줄 몰랐지.”
“그나저나 너희 용케 안 걸리네. 가는 길이 매번 엇비슷해서 들키면 어쩌나 걱정이 참 많았는데.”
“운도 실력이래, 형.”
“얼씨구. 두 사람 다 실력이 차암 좋네.”
“그럼. 우리가 누군데.”
 
너희가 누군데?
받아치려던 우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고선 운전을 계속했다.
얄밉게 대답할 수 있는 것도 도형이 변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처음 보았던 김도형을 다시 마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며, 우태는 운전에 집중했다.
 
“맞다, 형. 가기 전에 나….”
 
집에 좀 들러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하려던 순간.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유찬의 전화였다.
 
“어?”
“아냐, 형. 나 전화 좀.”
 
미안, 미안. 한쪽 손을 펴고 손짓하던 도형이 전화를 받았다.
 
“응, 유찬아.”
[도형아. 지금 혼자야?]
“아니, 집에 가고 있어. 왜?”
[그럼 그냥 듣기만 해.]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온몸의 피가 사악 식는 기분이 든다.
꼭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큰일이 닥쳐올 것만 같아 불안해지기도 하고.
불현듯 떠오르는 과거의 상념들에 옴짝달싹할 수 없을 만큼 갇히는 순간도 있다.
 
“응. 알았어.”
 
그러나 지금의 김도형은 다르다.
빠져나갈 방법을 배우고 있고, 무슨 일이 닥쳐와도 의연하게 이겨 낼 자신 또한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마저도, 자신의 기우일 수도 있으니까.
 
[조금 전에… 이쪽 소문을 좀 들었거든.]
“너 발도 넓다. 그런 건 어디서 듣는 거야?”
[아무튼, 그 사진 있잖아.]
“아… 응.”
[그거, 연출 팀 쪽이나 스태프들이 아니라… 배우 쪽에서 유출된 거라고 하더라. 엔드패치랑 연결된 사람한테 이야기 들었어.]
“뭐?”
 
창밖을 내다보던 도형의 시선이 찬찬히 돌아가 우태의 뒷모습에 닿았다.
그리고 백미러에 비치는 그의 두 눈을 한참 바라본다.
설마. 짧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입술 안쪽으로 삼켜진 지 오래다.
 
[배우,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메이크업 팀… 물론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응.”
[너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았어.]
 
핸드폰을 꽉 그러쥔 손끝으로 보다 더 강한 힘이 실린다.
짧게 숨을 들이마신 도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시선은 운전석에 앉아 있는 우태를 향한 채였다.
 
“알았어. 연락할게.”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아… 아니다. 신경 쓰일 수밖에 없겠네.]
“아니야, 그런 거….”
[알았어. 일단 끊을게. 나중에 연락해.]
 
유찬의 짧은 인사를 뒤로한 채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다급히 우태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지우태가.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며, 그럴 이유도 없다.
고개를 설레 저었지만, 소연의 한마디가 머릿속을 떠다닌다.
 
‘그러니까 아무도 믿지 말라는 거예요.’
 
어째서 누구도 믿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어 버린 걸까.
짙은 탄식이 소리 없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
 
집에 도착하고도 유찬의 말을 계속 곱씹게 됐다.
소파에 멍하니 앉아 TV를 보는데, 해성이 곁에 앉아 도형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순간, 얕게나마 실리는 힘에 깜짝 놀란 도형이 시선을 돌렸다.
 
“아, 맞다.”
 
그리고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랑 있는 집이었지.”
 
까맣게 잊은 채였다.
유찬의 말이 가져다주는 온갖 생각 때문인지.
주변의 모든 것을 잊은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건 무슨 뜻인지 좀, 들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김도형 씨.”
 
해성은 부루퉁한 표정으로 도형의 허리를 꼭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제 쪽으로 바짝 잡아당긴 채 얼굴을 가까이 한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했길래.”
“아니이, 형.”
“나랑 있는 것도 새까맣게 잊을 수 있지?”
 
응? 되묻던 해성이 눈을 흘겼다.
분명 조금 전까지는 심각했는데, 그런 해성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대답 좀 해 주시죠. 김도형 씨.”
 
토라진 목소리를 한 해성이 퍽 귀엽다.
사람이 이렇게도 변할 수 있구나.
그리고 저 또한, 찰나의 순간 해성에게 구원받을 수 있구나 싶어서.
 
“음….”
 
도형은 잠시 고민하다가, 슬쩍 해성을 곁눈질했다.
그리고 잽싸게 그의 무릎 위에 올라탔다.
마주앉은 채 어깨를 그러쥐자, 해성의 시선이 도형을 위아래로 훑는다.
 
“…여기서?”
 
잠시 고민하는 듯싶던 해성이 도형의 허리춤을 힘껏 붙잡았다.
 
“난 좋은데, 정말로?”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생각하던 도형이 해성을 흘기며 그의 손을 찰싹 때렸다.
 
“무슨, 아니거든요.”
“…좋을 뻔했네.”
 
맥이 풀린 채 아쉬운 표정을 짓던 해성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도형의 허리를 꼭 끌어안아 제 쪽으로 바짝 당겼다.
늘 그렇듯, 그의 눈을 마주한다.
네 이야기를 듣고 있어. 시선으로도 느낄 수 있는 작은 속삭임이었다.
 
“그럼, 무슨 고민인데. 말해 봐.”
 
이야기를 해야지, 결심하고 입을 연 건 맞는데.
막상 이렇게 되니 자신이 말을 하는 게 맞는 건지에 대한 고찰이 생겼다.
괜한 말을 꺼내서 해성의 마음까지 불편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고민의 굴레에 해성까지 끌어들이는 건 아닌가 싶어서.
 
“도형아.”
 
하지만 그 부름 하나에 와르르 무너지고 만다.
어떻게 말해야 하나, 찰나의 망설임은 둑이 무너지듯 저 아래로 휩쓸린다.
 
“괜찮아. 말해 줘.”
 
괜찮다는 그의 말은 언제나 도형의 마음을 안정되게 만든다.
꽉 막힌 속이 트이는 기분이 들었다.
 
“맨 처음에, 나 히트 사이클 터졌을 때 말이에요. 우리 포스터 촬영하고 회식한 날.”
“아, 그날.”
 
도형의 말에 해성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그쯤부터 시작이었을 테니까.
도형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 건.
 
“그때부터 지금까지 쉬지 않고 터지는 일들이 조금, 이상하다 싶기는 했어요. 꼭 누군가 작정하고 벌이는 일 같았거든요.”
 
해성 역시 동의하는 바였다.
애초에 가까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혹은 저들을 지켜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모를 일들이 기사에 쓰여 있었다.
의심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오늘,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무슨 이야기?”
“이제까지 터진 사건들이 모두… 연출 팀이나 스태프들이 아니라 출연진 쪽 사람들을 통해서 퍼진 거라고.”
 
잠시 정적이 흐른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시선을 마주했다.
 
“배우 쪽 사람들이라는 거지?”
“네. 배우, 매니저, 스타일리스트, 메이크업 팀….”
 
메이크업 팀이나 스타일리스트는 아닐 것이다. 연예인의 입소문으로 먹고사는 이들이 위험을 감내해 가면서까지 그런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엔드패치에서 돈을 받았다면 가능할 수도 있지만.
애초에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모인 드라마가 아닌가. 여기에서 얻어 가는 연줄도 한몫할 텐데.
몇 푼 되지도 않는 돈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 누가….’
 
좁혀지는 건 매니저들.
도 실장인가, 아니면 지 매니저.
유찬의 매니저나 소연의 매니저 또한 배제할 수 없지.
하지만 이어지는 건 또 다른 의문. 작은 소문이라도 배우의 입지가 흔들릴 정도로 일파만파 퍼진다면, 밥줄이 끊어지는 건 매니저들 또한 마찬가지일 텐데.
정말, 그들일까.
 
“아무도 의심하고 싶지 않은데.”
“…세상이 그렇게 놔두지를 않네.”
 
그렇지?
해성은 애써 웃으며 도형의 머리를 넘겨 주었다.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도형이 한숨을 푹 쉬며 해성에게 안겼다.
 
“그렇다고 누가 특별히 이상하다거나, 의심할 정황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요.”
“그런 게 있었다면 굳이 머리 싸매면서 고민할 필요도 없었겠지.”
 
아니, 그렇게 말하면서도 두 사람은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모든 일의 중심은 언제나 도형이었다.
딱 하나, 해성의 기사만이 빗나갔다지만.
그날, 도형 역시 그 백화점에 가지 않았던가.
유력한 인물은 딱 한 사람으로 좁혀지지만, 생각은 거기에서 그치고 만다.
도저히 의심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지우태, 그 사람만큼은 아니리라 믿고 싶었으니까.
 
“일단 지켜보자. 최대한 촬영에 집중하는 수밖에 없지.”
“응. 당분간 이거 말고는 스케줄도 없어요.”
“나도 그래. 워낙 막바지니까, 여기에만 집중하고 싶어서. 그리고….”
 
그리고?
도형이 슬쩍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해성은 기다렸다는 듯, 도형을 안아 소파에 눕혔다. 한 팔로 등받이를 붙잡아 버티며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
 
“여기에도 좀, 집중할까 해서.”
 
푸스스 웃음이 나온다.
이런 순간마저도 제게 확신을 주려는 해성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어서.
도형은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두 사람의 간격이 서서히 좁혀진다. 마침내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워졌을 때.
도형의 핸드폰이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화들짝 놀란 두 사람이 테이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전화를 받아서는 안 될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엄습했다.
 
“받지 말까?”
“중요한 전화면 어떡해요.”
 
그래, 한참 주가가 오르고 있으니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해성은 포기했다는 듯 두 손을 들어 몸을 일으켜 앉았고, 도형 역시 상체를 세웠다.
 
[임하경]
 
액정에 찍힌 건 달갑지 않은 이름이었다.
어떻게 할지 고민했지만, 오히려 피하면 독이 될 것만 같았다.
해성 또한 눈짓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형에게 바짝 붙어 귀를 기울였다.
 
“네. 김도형입니다.”
 
휴우, 긴 한숨 소리가 들린다.
도형은 긴장되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핸드폰을 꼭 쥐었다.
 
“하경 씨?”
[선배.]
 
이어지는 딱딱한 말투.
아니, 냉랭하다고 해야 할까.
 
“네. 듣고 있어요.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은 아니고, 내가 지금 뭘 저지를까 싶은데.]
 
저지른다고?
도형과 해성이 다소 불안한 눈으로 시선을 마주했다.
 
“뭘 저지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 저지를지 말지. 선배의 선택에 달려 있거든요. 아직 기회는 있는데… 어때요, 한번 들어 볼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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