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그러니까, 우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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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렴풋이 들리는 목소리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끝없이 밀려오는 열감에 담뿍 취해 버렸다. 몸을 더듬는 손길, 살갗 위로 닿는 말캉한 감촉에 달뜬 숨만 연달아 터트리는 밤이었다.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해가 밝아 아침이 찾아온 뒤였다.
 
“…대체.”
 
어느새 히트 사이클은 한차례 가라앉아 있었다.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만, 전날 밤처럼 괴롭거나 힘들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눈만 끔뻑거리다가 몸을 반쯤 일으켰을 때, 이질적인 느낌에 움직임을 우뚝 멈추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이 감각. 분명, 낯설지 않으나 익숙하지도 않은 상황이라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슬쩍 이불을 들춰 보았을 때.
 
‘미친놈 아냐.’
 
다급히 이불을 덮었다. 속옷이라도 입고 있기를 바랐지만, 아래는 휑했다. 훤히 드러난 살갗이 도형을 향해 반질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흐릿한 시선이 침실에 걸어 둔 커다란 TV로 향한다. 빠르게 껌뻑거리던 눈꺼풀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한참 무언가를 생각하던 도형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럴 리가 없다며 부정하고, 또 부정하고 있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 사라지진 않았다.
입이 바싹 마르고,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절대 아닐 거라고 생각하며 가로젓는 고갯짓이 서서히 느려진다.
환청을 들은 게 아니라면 누군가 집에 찾아왔다. 그리고 열감으로 가득한 밤을 보냈고….
 
“잤다고? 그 사람이랑, 내가?”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데다가,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기도 했다. 몇 가지 이유를 뽑자면….
하나. 저는 히트 사이클 주기였다. 어떻게든 관계를 맺는다면 임신의 위험성이 높은 주기.
그리고 둘. 이제 막 복귀작을 정하고 포스터까지 촬영했다. 본격적으로 대본 리딩에 들어가는 날만 기다리고 있는데.
이런 스캔들은 위험했다. 저뿐만이 아니라 소속사, 제작사, 심지어 나 감독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있는 일이었다.
 
“일단, 누군지 확인을 해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불을 걷고 바닥에 떨어진 속옷을 주워 들었을 때, 누군가 문 앞으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른침을 삼키다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문이 열리기를 바라기도 했지만, 사실 아무도 들어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에 상대가 누군지 알고 싶지 않다가도.
어차피 일은 벌어졌으니 상대를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갈등이 일었다.
머릿속이 잠잠할 리 없지. 최악의 상황이 하나둘 떠오르고 있었다.
그중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코, 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이 그다지 달갑지 않은 존재일 것이라는 확신.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불을 힘껏 움켜쥐었을 때.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해성의 모습에 저절로 탄식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일어났네.”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모습에 도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만 기다려.”
 
달칵. 문이 닫히기 무섭게 맥이 탁 풀리다가도,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어깨 근육이 경직되다 못해 뻐근하게 당겼다.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다. 제발 그만은 아니기를, 해성과 사고를 친 것만은 아니길 그토록 바랐건만.
다시금 문이 열리고, 해성이 쟁반을 든 채 방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에도 도형은 복잡하게 얽히는 머릿속을 좀처럼 다잡을 수가 없었다.
나무 쟁반 위에 놓인 따끈한 죽에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왔다.
아무 말 없이 죽을 바라보던 도형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제가 생각하는 게, 맞아요?”
 
해성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침대에 베드 테이블을 올려 주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쟁반을 놓고, 침대 끝에 앉아 도형을 바라보았다.
 
“뭘 생각하는데?”
“형, 아니… 정해성 씨랑, 제가.”
 
슬며시 고개를 들자, 해성의 눈이 잘게 흔들리는 모습이 보인다. 무슨 의미일까. 왜 저렇게 동요하는 거지.
아랫입술을 잘근 물던 도형이 이불을 조심스레 끌어당겼다.
 
“잠자리, 가졌다는 생각이요.”
 
흐음, 길게 한숨을 뱉던 해성이 기다란 다리를 꼬았다.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여전히 삐딱한 시선으로 도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도형은 연신 그를 힐긋거렸다.
해성이 입고 있는 건, 그와 신혼 화보 촬영을 할 때 협찬받았던 커플 파자마였다. 물론, 이후 한 번도 입지 않아 옷장에 고이 봉인되었지만.
저건 또 어떻게 찾았대. 드레스 룸에 들어간 걸까. 그 부분에 대해서 한마디를 얹어야 하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그보다는 해성의 대답이 먼저니까. 하나씩 덧대어지는 생각을 애써 무시하며 슬쩍 그의 눈치를 보았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대답에 도형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격하게 가로저었다. 목구멍에서 느껴지는 멍울에 침을 삼킬 수도, 말을 뱉을 수도 없다.
아니잖아. 애원과도 같은 한마디마저 속에서만 맴돌 뿐이다.
괜히 윗배가 쿡쿡 쑤시는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없으리라 믿고 있으면서 왜 이런 감각에 시달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진짜예요?”
 
간신히 뱉는 말이 떨리고 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기 무섭게 해성이 옅게 조소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니.”
“…네?”
 
도형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조금 전에는 긍정의 대답을 하더니, 이번에는 단호하게 부정의 답을 던진다. 어떤 답을 믿으라는 건지 좀처럼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거기다 저 허탈한 표정은 대체 무슨 뜻인지. 제게는 그저 어려운 것들 천지였다.
 
“뭐가 진짜예요?”
 
이어지는 질문에 해성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도형을 바라보았다. 그러지 않아도 길게 찢어진 눈이 조금 더 매섭게 보이는 건, 착각이기를 바랐다.
 
“너는.”
 
늘 이렇게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만 한다. 제대로 된 대답을 던져 주면 참 좋을 텐데.
 
“어느 쪽이 진짜였으면 좋겠는데.”
“장난치지 말아요.”
“내가 너한테 장난을 쳐서 무슨 이득을 볼까.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어째서 헤어지기 직전의 해성보다 지금의 해성이 더 가깝게 느껴지는 걸까. 그땐 알지 못했던 그의 미세한 표정 변화까지 눈에 밟혔다.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를 마주하는 해성의 눈살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난 뒤에야 시선을 피했다.
 
“형이랑 내가,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해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죽을 바라보다가 이내 탄식과 비슷한 한숨을 뱉을 뿐.
 
“네가 바라던 대로야.”
 
머리를 쓸어 올리는 건지, 팔을 움직이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이어지는 자조적인 웃음에 도형이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억제제 먹이고, 손으로 한 발 빼 주기는 했는데. 이건 아무 일인가?”
 
동시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귓바퀴까지 열이 올라서, 괜히 신경이 쓰였다. 더는 해성을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도형은 고개를 빠르게 가로저었다.
잠시 후, 바닥으로 길게 내려앉는 해성의 대답이 들렸다.
 
“…그래, 아무 일도 없었어.”
 
이상하다. 오늘따라 이유를 알 수 없는 정적이 잦다. 씁쓸한 목소리와 어투가 귓가에 내리꽂히는 것도 자꾸만 신경이 쓰인다.
 
“어떻게 된 거예요?”
“일단 먹어. 나는 부엌 좀 정리할게.”
 
대답을 피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도형은 해성을 붙잡지 못했다. 늘 그랬으니까. 그에게 대답을 끌어내는 일이 제게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해성이 방을 나서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정적이 흘렀다. 여전히 따뜻한 죽을 잠시 내려다보던 도형이 조심스럽게 수저를 들었다.
 
***
 
해성은 부엌에 들어와 의자에 털썩 앉았다. 정리할 게 있을 리가 없다. 애초에 만들어 놓고 전부 정리를 해 둔 참이니까.
그저 도형이 언제 일어날지 알 수 없으니, 매시간마다 계속해서 죽을 끓였을 뿐이었다.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천하의 정해성이 이러고 있다니. 간단하게 주문을 하면 되는 일인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나 싶기도 하고.
벽에 등을 기댄 채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어떻게 된 거예요?’
 
도형의 질문이 귓가를 스쳐 가고, 새벽의 일이 떠올랐다.
어쩐지 도형이 돌아가고 난 뒤에도 마음이 불편했다. 히트 사이클 주기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언제 발현할지 모르는 일이니까.
이건 자만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 현장에서 도형을 가장 잘 아는 건 저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걸지도 모르고.
돌아서는 그의 얼굴, 벌겋게 달아오른 볼과 어쩐지 축축하게 젖어 있던 두 눈. 심상치 않음을 예견했다.
해서, 다음 날 있지도 않은 스케줄을 핑계로 도형의 집까지 달려왔다.
상태만 확인하고 싶었다. 아무 일도 없다는 걸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면, 저 또한 집으로 돌아가리라 생각했는데.
 
‘도형아, 김도형!’
 
문을 두드려도 그는 나오지 않았다. 굳게 닫힌 문 너머로 느껴지는 건 온통 정적뿐이다.
 
‘들어가도 되는 건가.’
 
물밀듯 밀려오는 고민에 문 앞을 한참이나 서성거려야만 했다.
 
지우태 매니저 (도형)
 
  지 매니저님 도형이 정말 괜찮은 겁니까?
 
 
성혁에게 받은 우태의 연락처로 메시지도 남겨 보았지만, 묵묵부답이다.
갑자기 늘어난 스케줄에 힘들어 잠들었을 수도 있지만. 왜, 하필 이럴 때.
망설임이 길어질수록 도형의 상태가 더욱 나빠질 수 있다는 불안감이 물씬 밀려왔다.
결국, 해성은 생각만 하던 것들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그래, 괜찮은지 확인만 해 보자.’
 
그뿐이었다. 해성이 목표했던 건, 아무 일도 없는 도형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만약 히트 사이클이 찾아온 거라면, 그걸 감내하고 참을 수 있는 건 저뿐이라고 생각했기에.
자만이었을지도 모르나, 찰나의 생각은 그랬다.
자연스럽게 누른 비밀번호에 문은 경쾌한 알림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저와 함께 살 때와 달라지지 않았다. 집에 들어온 순간 코끝을 스치는 향기마저도 오래 전과 다르지 않았고.
그래서였을까. 당연하게 침실로 쓰던 방문을 벌컥 열었다. 저와 함께했던 시간을 떠나보내지 않은 채 곳에 고이 누워 있으리라는 자만까지 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건 줄지어 걸려 있는 옷들. 드레스 룸으로 탈바꿈한 모습이었다.
아득해지는 시선을 애써 갈무리한 뒤, 문을 닫았다.
그러곤 도형의 페로몬을 맡으며, 후각에 의지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침내 다다른 곳은, 자신의 서재로 사용했던 방 앞.
그 순간, 발밑이 순식간에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당연히 제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고 있다 믿었던 도형이.
여전히 제 그림자 아래에 있다고 생각한 순간, 오만 감정이 휘몰아쳤다.
 
‘도형아.’
 
넌지시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문고리를 쥔 채 벌컥 문을 열었을 때. 해성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을 힘껏 삼켜야만 했다.
도형은 침대에 웅크린 채 누워 있었다.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려 덮고 있었지만, 페로몬만큼은 막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충분히 이성을 잃을 법한 상황임에도 해성은 침착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천천히 도형에게 다가갔다.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채 땀으로 젖은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 올렸다.
입에 담지 말아야지. 절대, 그 앞에서는 다정하게 부르지 말아야지.
그토록 결심하고 다짐했던 모든 것들이 산산조각 나 버리고 말았다. 발 아래로 흩어져 흔적도 없이 날아가 버린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적 없던 것처럼, 어차피 이렇게 되리라는 것을 예견한 것처럼.
 
‘도형아.’
 
그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 해성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형.’
 
저를 부른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우태를 생각하고 입에 담았음이 분명한 그 호칭에, 가슴 언저리가 저리다 못해 쥐어짜듯 아팠기 때문에.
그리고 어떻게 했더라.
서랍을 열어 억제제를 찾았다. 몇 알 남지 않은 약봉지를 보니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지금이야 간신히 참고 있다지만, 억제제를 먹이지 않는다면 저 또한 러트가 찾아올 것이 분명했다.
평소에 조절을 잘하는 제 자신을 칭찬이라도 해야 하는 건지.
부엌에서 물을 가져와 억제제를 제 입에 물기 직전, 해성은 다시 한번 고민에 빠졌다. 이 역할을 자신이 해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골몰이었다.
그럼 누가, 뒤따라오는 질문에 떠오르는 건 활짝 웃는 유찬의 모습이었다. 아무렇지 않게 도형을 만지고, 그에게 딱 붙어 떨어지지 않고, 특별한 마음을 꾹꾹 눌러 담은 눈빛으로 도형을 보던 모습.
순간 치밀어 오르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애써 억누른 채, 억제제를 입에 물었다.
 
‘이건 모두, 김도형 네 탓이야.’
 
비겁하게도 도형에게 모든 책임을 돌린 뒤, 억제제를 옮겼다.
정해성의 입에서, 김도형의 입으로. 절절 끓는 열기를 입술로 만끽하며 그의 머리를 힘껏 그러쥐었다.
아직도 그 감각이 손에 선명했다. 텅 비어 버린 주먹을 움켜쥔 채 다시 한번 탄식을 터트린다.
 
‘…미친 것 같지. 정해성.’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공기 중에 파묻힌다. 이건 모두 도형의 탓이라고 일단락해 버리는 자신이, 너무나 미련하고 못나 보이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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