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원하지 않았지만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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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덤하게 말하는 해성이 당혹스럽다고 해야 할까. 설득당해 자신에게 제안하는 나 감독이 당혹스럽다고 해야 할까.
아니, 둘 다 해당되는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꾹 누르던 도형이 나 감독을 돌아보았다.
그럴 수 없다. 하기 싫다. 거절의 말을 하려고 했으나.
 
“…참, 좋은 생각인 것 같은데 말이야.”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을 보자니 말문이 턱 하고 막힌다.
그래, 나 감독 입장에서도 이런 말을 하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도형과 해성이 결혼을 결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지켜본 사람 중 하나였으니까. 전부는 모르더라도, 일부는 알고 있지 않던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그래, 이건 일이다. 사적인 감정은 단 한 톨도 섞이지 않은 비즈니스에 의한 결정이요 행동이라고 마음먹었다.
 
“말해 주세요. 어떻게 하면 되는지.”
 
도형은 당당하게 해성을 마주했다. 어떤 생각으로 이런 제안을 했는지 몰라도, 절대 휘둘리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대신 저도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두 번 다시, 그의 뜻대로 휩쓸리는 김도형이 될 수는 없었다.
 
***
 
“봤어?”
“어, 봤어. 무슨 일이래?”
“두 사람 이혼한 거, 진짜 노이즈 마케팅인가?”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의아하다는 듯 보는 사람도 있었고, 남몰래 응원하며 자리를 피하는 사람도 생겼다.
딱 두 사람. 우태와 유찬만이 못마땅하게 여길 뿐.
 
“형, 무슨 일인지 들었어요?”
 
유찬의 물음에 우태가 그를 힐긋거렸다.
 
‘그냥 일이야. 그러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도형에게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고는 하지만, 이걸 유찬에게 곧이곧대로 말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그냥 나 감독이 제안한 일이라면 괜찮지만, 해성이 먼저 제안한 일이니까.
이대로 입을 다무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최유찬이 어떤 사람인가. 분명, 나 감독에게 쫓아가 따지고 들 것이 뻔했으므로.
 
“나 감독님이 제안했대.”
 
거짓말을 하기로 했다. 도형에게 언질만 주면 되겠지.
거기다 나 감독이 제안했다고 하면, 유찬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 할 테고.
 
“나 감독님이?”
“유진이랑 예현이를 연기하려면, 지금 같은 사이여서는 안 되니까. 전작에 비해 관계성 많이 바뀐 거 유찬이 너도 알고 있잖아.”
“…….”
 
듣고 나니 할 말이 없던 모양인지, 유찬은 입 안쪽 여린 살만 꾹 눌렀다.
이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거라곤, 딱 붙어 앉아 고기를 먹는 도형과 해성을 못마땅하게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나랑 도형이는 러브 라인인데.”
“둘은 워낙 친하니까.”
“친한 거랑 연애는 다른 거고.”
“전남편이랑 친구도 좀 다르지 않겠냐?”
 
저는 이렇게 초조하고 답답한데, 아무렇지 않게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우태가 이상했다.
잔뜩 화가 난 눈빛으로 우태를 돌아보던 유찬이 신경질적으로 음료수 잔을 집어 들었다.
 
“형은 아무렇지도 않아요? 저러다가 정해성이 무슨 마음이라도 먹으면, 도형이한테 또 수작 부리면!”
 
유찬의 말을 가만히 듣던 우태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해성과 도형을 바라본다. 해성은 아무 말도 없이 고기를 먹다가, 버섯 하나를 도형의 접시 위에 올려 주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보며 우태는 하! 코웃음을 쳤다.
 
“정해성이?”
“형.”
“유찬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말이다. 정해성은 도형이랑 결혼하던 그때. 아니, 그전부터 자기 입지나 신념이 가장 중요한 인간이었어. 도형이가 그렇게 공격당하는 순간에도 왜 한마디를 안 했는지 알아? 자기가 할 말이 없다 이거야. 자기 생각이 맞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스태프며 배우가 바글바글한 곳에서 허튼짓을 해? 수작을 부려? 야, 아서라.”
 
우태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지만, 유찬은 여전히 안심이 되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 이번에는 해성이 앞서서 도형을 지켜 준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유찬은 두 사람을 돌아보고는 크게 한숨을 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안했다. 해성과 도형이 붙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덜컥 겁이 났다.
이건 단순히 우태에게 말한 그 사실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대로 도형이가 다시 흔들리기라도 하면.’
 
도형의 마음이 얼마나 크고 깊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입장에서의 우려였다.
결국, 참다못한 유찬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찬아. 어디 가냐?”
“안 되겠어.”
 
한마디를 남긴 채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주변의 시선이 꽂히는 게 느껴졌지만, 지금 그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그가 집중하는 건 오로지, 어색하게나마 밥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도형과 해성. 그 두 사람의 모습뿐이었다.
 
“도형아.”
 
마침내 두 사람에게 가까워졌을 때. 유찬이 도형을 불렀다. 고기를 집어먹던 도형이 고개를 들었다.
 
“어, 유찬아. 고기 다 먹었어?”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라는 게 왜 이렇게 감격스러운 건지.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말을 건네려던 그 찰나, 의아하다는 듯 묻는 해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
“유찬이라고, 친구예요.”
 
새삼 그에게 저를 친구라고 소개하는 것도 이상했다.
붙어 다니는 게 전부가 아닌가 싶던 그때, 저를 바라보는 해성의 시선에 괜히 몸이 움찔거렸다.
평소보다 조금 더 날이 서 있었다. 아니, 그보다 모르는 사람을 쳐다보는 듯한 시선.
 
“친구라.”
“얼른 고기 드세요. 유진 씨.”
 
유진? 순간, 유찬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했다.
<별을 담은 잔>에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 유진이었는데.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두 사람의 행동에 당황한 유찬이 도형과 해성을 번갈아 보았다.
 
“지금 두 사람 뭐 하는 겁니까?”
“유찬이 너도 먹어. 고기 맛있게 구워졌다.”
 
한쪽은 연기로, 한쪽은 평상시처럼 대하는 도형의 모습에 유찬은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제 옆을 툭툭 두드리던 도형은 집게로 고기를 한 점, 두 점 집어 유찬의 접시 위에 올려 주었다.
 
“마실 건 안 필요해?”
 
생각해 보면, 도형이나 예현의 결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예현보다는 도형이 조금 더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지만.
생각에 잠긴 사이, 곁에 앉은 해성이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저었다. 못마땅한 목소리가 유찬의 귀에 꽂혔다.
 
“뭐 하러 챙겨. 알아서 하겠지.”
“왜 자꾸 시비를 걸어요? 제가 알아서 합니다.”
 
그 순간, 유찬은 깨달았다.
서로 맡은 배역에 몰입해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을. 나 감독이 제안한 것 같지는 않고, 두 사람 중 누군가의 의견일 것이 뻔했다.
그렇다면 저는 유찬으로 존재할 것인가?
아니, 절대 그럴 수 없었다. 그들이 연기를 한다면 저 또한 똑같이 연기를 해야 했다. 어쩌면 이게 더 유리할지도 모른다.
적어도 <별을 담은 잔>에서 예현은 온영의 일방적인 애정 공세를 받는 입장이니까.
유찬은 해사하게 미소를 지으며 도형의 곁으로 바짝 붙었다.
 
“예현 씨. 어떤 고기가 제일 맛있어요?”
 
그의 말에 적잖이 당황한 것인지, 해성과 도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지만 유찬은 굴하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종류가 꽤 많은 것 같은데, 외국에 오래 있어서 그런가. 뭐가 맛있는지 도통 감이 안 오네요. 괜찮으면 맛있는 부위 좀 추천해 줄 수 있어요?”
 
당황한 도형의 눈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이런 모습도 귀여우면 중증이지.
당장에라도 왜 이렇게 귀엽냐고 너스레를 떨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조금 더 그에게 바짝 붙었다.
 
“이게 맛있더라고요. 이거 먹어 보세요.”
 
도형은 침착하게 유찬의 접시 위에 있는 고기 한 점을 가리켰다. 젓가락이 닿지 않아도 어떤 고기인지 명확하게 알 수 있도록.
 
“뭔지 잘 모르겠는데.”
 
하지만 유찬은 그 찰나조차 놓치지 않는 위인이었다.
 
“먹여 줘요.”
 
써먹을 수 있는 상황은 모두 써먹되, 자신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기회는 낚아챈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여기까지 왔으니, 이 순간에 적용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당황한 도형이 대체 왜 그러냐는 눈빛으로 유찬을 바라봤지만, 그는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왜요, 그냥 먹여 달라는 건데. 나 진짜 이상한 생각 안 했어요.”
“…그, 보는 눈이.”
“예현 씨가 이상하게 생각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볼걸.”
 
망설이지 않고, 물러남이 없는 온영의 성격. 그게 예현을 뒤흔들 예정이었다. 그러니 저는 제 사심과 마음을 잔뜩 담아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도형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곁에 앉은 해성의 눈치를 봤다. 이내 어쩔 수 없단 표정으로 고기 한 점을 집어 들었을 때.
 
“손이 없습니까?”
 
날카로운 해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건, 진심일까. 그게 아니면 유진의 배역에 철저한 탓일까.
 
“굳이 사람 많은 데서 먹여 달라고 하는 거, 썩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인데.”
“그게 어때서요?”
“…….”
“첫눈에 반한 사람한테 먹여 달라고 어리광 부리는 거, 이상한 일 아니잖아요. 아,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으신가? 무게 지키느라.”
 
극중에서도 유진과 온영은 상극이었다. 분위기만으로도 상극을 달리는 두 사람인데, 성격은 오죽할까.
유찬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이 틈을 이용해 최유찬으로는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쪽이 뭐라고 예현 씨도 아무 말 안 하는 걸 딴지 겁니까? 애인이에요?”
 
그 순간, 당황하는 해성의 표정이 보였다. 그 또한 어느 쪽의 마음일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아니면, 짝사랑 중인가?”
“온영 씨. 이 사람은.”
“네, 알아요. 예현 씨가 자주 말했죠. 좋아하던 사람의 약혼자라고. 미워할 수 없을 정도로 멋있고, 다정하고, 듬직한 사람이라고. 그런데 그것뿐이잖아요. 예현 씨를 응원해 주지는 못할망정, 이런 식으로 초를 치면 쓰나.”
 
안 그래요? 웃으며 묻는 유찬의 모습에 해성은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 접시를 바닥에 내려놓은 뒤, 도형을 돌아봤다.
 
“나머지는 방해꾼이 없을 때 하자.”
 
이번에는 완벽한 정해성이었다. 그는 도형의 말을 더 듣지도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던 도형이 한숨을 푹 쉬며 유찬을 돌아봤다.
 
“너 진짜 왜 그래.”
“뭐가. 나도 똑같이 연기한 것뿐인데.”
“…알아, 알고 있지만.”
 
도형 또한 할 말이 없었다. 감정적으로 대처한 건 유찬이나 해성이나 똑같았으니까.
어쩐지 계속해서 새우등이 터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이상했던 건, 유찬이 온영이 되어 읊던 대사에 자신의 가슴이 따끔거렸다는 사실이다.
듣기 싫었다. 현실을 받아들이는 그 기분조차 달갑지 않았다.
꼭 유진이 아닌 해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두 번, 세 번이나 현실을 깨닫게 되는 것만 같은 이 기분이 무척 찝찝했다.
 
“진짜, 최유찬….”
 
하지만 도형은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유찬을 흘겨볼 뿐이었다.
묵묵히 고기를 집어먹는 그가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어도, 도형은 헛웃음만 터트릴 뿐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응원해 주지는 못할망정, 초를 치면 쓰냐고….’
 
온영으로서 한 그 말이 꽤 오랫동안 남았다. 예현의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게 좋을지, 김도형으로서 동조해야 할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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