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그동안 잊고 지냈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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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걸까.
 
“…미안해요.”
 
도형의 대사 한마디와 눈물 한 줄기에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누군가를 오랫동안 좋아했다가 어그러진 마음이라, 서툴렀어요. 무서웠어요. 겁이 났어요. 그래도 당신은 나를 좋아하니까, 곁에 있어 주니까, 쫓아와 주니까. 내가 좀 더 머뭇거려도 괜찮을 줄 알았어요.”
 
이건, 자신의 마음이었다.
누군가를 오랫동안 좋아한 적은 없었다. 연애를 하며 상대방을 마음에 담는 일은 사치라고 여겼으므로.
그저 자신의 일에 방해가 되지 않는.
한순간이라도 자신이 배우로서 우뚝 서는 데 흠이 되지 않을.
그래, 그런 사람을 원했다. 단지 자신의 인생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 누군가를 곁에 두고자 했지.
그래서 괜찮을 줄 알았다. 도형은 저를 이해하고, 그럼에도 저를 좋아하고, 곁에 머물러 주니까. 도망갈 기세로 일어서면 쫓아와 줄 거라고 믿었으니까.
사랑이라는 감정과 동떨어져 있는 정해성이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저 기댈 수 있는 사람, 지나가는 사람이어도 괜찮을 마음인 줄 알았는데….”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뱉을 뻔했기에.
뒤로 한 걸음 물러난 그 순간, 도형의 대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도, 좋아해요. 너무 늦게 깨달았어요. 미안해요… 당신이 끊어 내려고 할 때까지 깨닫지 못해서, 미안해요.”
 
단순히 연기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가 말하는 대상이 유찬이라는 사실에 숨이 덜컥 막혔다.
도형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 사랑을 말하며, 제게 보냈던 눈빛을 그에게 전한다.
상상조차 해 보지 않았던 문제이며, 그럴 필요가 없던 일이었다. 분명 그렇다고 믿고 있었건만.
 
“…안 돼.”
 
혼자 중얼거리던 해성이 다급히 유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벌겋게 상기되어 당황한 그 표정은.
 
‘연기가 아니야.’
 
진심으로 보였다. 누군가는 유찬이 온영에게 몰입한 것뿐이라 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절대 연기가 아니었다.
 
“눈빛 좋고.”
 
그때, 나 감독의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와 해성은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저의 마음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뜻은 아니었다.
배우 정해성으로 머물러야 하는 시간에 돌아왔을 뿐. 조금 전 느꼈던 당혹스러움과 혼란에 여전히 멈추어 있는 채였다.
 
“컷! 아주 좋아!”
 
나 감독의 외침과 동시에 해성이 고개를 들어 도형을 보았다.
자신 없다는 듯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에 괜히 미간이 일그러진다.
나 감독에게서 시선을 뗀 도형과 눈이 마주친 순간. 해성은 뒤를 돌아 버렸다. 괜히 그에게 속내를 모두 들킬 것만 같은 두려움이 밀려와서.
자신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마음으로 두 사람을 보고 있었는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드러나지 않기를 바랐다.
 
‘정신 차려.’
 
스스로 되뇌고 또 되뇌었지만, 이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정해성, 제발.’
 
저는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린 것이라고.
착잡한 마음을 곱씹다가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선다.
뒤늦은 후회가 사람을 얼마나 우습게 만드는지, 너무 절실히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리허설 직후, 나 감독은 감정선이 끊어지면 안 된다며 빠르게 정비를 마친 뒤 바로 본 촬영에 들어갔다.
같은 연기를 두 번이나 하는 건 힘든 일이었으나, 감정을 끌어 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몇 번을 하더라도 마음에 변화가 생기지 않는 한, 머무는 감정은 여전할 테니까.
그러면서도 자꾸만 유찬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가지 마.’
 
꼭, 버림받은 강아지 한 마리를 보는 것 같아서.
 
‘…가지 마. 도형아.’
 
제게 애원하듯 말하는 목소리와, 자신을 붙잡는 손길을 뿌리칠 수 없어서.
도형은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고.
 
‘미안.’
 
유찬의 사과를 들었다.
 
‘보내면 안 될 것 같았어.’
 
뜻 모를 말까지 이어졌지만, 도형은 캐묻지 않았다.
자신의 시선이 해성을 향해 있었다는 걸 들킨 것만 같았으니까. 괜한 것을 캐물어서 굳이 파고들지 않아도 되는 것들을 마음에 담을 필요는 없다.
온영의 고백신이 끝나고 난 뒤 이어지는 건 예현과 유진의 신이었다.
일부러 온영과의 관계를 훼방 놓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예현이 불같이 화를 내는 장면이었다.
 
“두 사람, 잘할 거라고 믿어.”
 
나 감독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물론,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극 중에서는 유진이 예현을 동생처럼 아끼는 마음에서 한 행동이라지만.
현실로 본다면 전남편의 연애를 인정할 수 없어 훼방을 놓은 꼴이 될 테니까.
 
“연기는 연기일 뿐입니다.”
 
덤덤하게 대답하는 해성의 말에 스태프 몇은 역시 프로라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도형만큼은 그런 그가 불안했다.
조금 전보다 더 굳은 눈빛, 자꾸만 저를 마주하지 않으려는 행동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잘 부탁드립니다. 선배님.”
 
도형의 말에도 해성은 고개를 끄덕이기만 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8부 32신. 유진, 예현. 공원, 낮 신. 테이크 들어갑니다.”
 
조감독의 알림에 도형이 눈을 감았다.
 
‘나는 예현이다. 김도형이 아닌, 유예현이다.’
 
조용히 읊조리다가 천천히 눈을 뜬 순간.
 
“액션!”
 
나 감독의 신호가 들렸다.
동시에 해성은 금세 유진이 되었다. 난감하지만 담담하게. 그러나 미안한 마음을 담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랬어요?”
 
이어지는 물음에 해성의 눈이 흔들리는 게 보였다.
현유진으로서 당황한 게 아닌 것 같다 하면, 제가 잘못 본 것일까.
 
“…그게 최선이라고 여겼으니까요.”
“내가 행복해지길 바란다고 했잖아요.”
“그 사람과 함께하는 미래가, 유예현 씨에게 행복이 될 거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시도라도 해 볼 수 있게 도와줬어야죠. 적어도 내 행복은 내가 찾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해성은 자신의 대사를 잊기라도 한 듯 도형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지금.’
 
당황한 건 나 감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컷!”
 
결국 NG가 났고, 그제야 해성이 정신을 차리며 뒤를 돌아봤다.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쉽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했는데….”
 
난감한 듯 머리를 긁적거리던 나 감독이 돌돌 말린 종이로 하늘을 가리켰다.
 
“해 지기 전에는 끝내야 하니까, 조금만 힘내 줘. 알았지?”
“네. 죄송합니다.”
 
해성은 담담하게 대답하며 도형을 돌아보았다.
 
“미안합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왜 그런 표정을 지었는지, 어째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저를 바라보기만 했는지.
자신이 유찬과 연기하며 무언가를 느낀 것처럼, 해성 또한 마음으로 와닿은 것들이 있었는지.
하지만 그 무엇도 묻지 못했다. 떨어지지 않는 입을 꾹 닫은 뒤, 이어지는 나 감독의 사인에 다시 한번 연기에 몰두했다.
해성은 두 번째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지 않았다. 나 감독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기하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때, 모니터 뒤로 유찬이 슬쩍 다가왔다.
모두가 침묵한 채 두 사람의 연기를 바라보고 있다. 단순히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역시, 케미는 좋네.”
 
중얼거리는 나 감독의 말이 귓가에 바로 꽂힌 순간, 유찬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힘껏 그러쥐었다.
알고 있었다. 도형과 해성이 꽤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을 때면 스태프들과 배우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곤 했으니까. 그저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좋아, 컷!”
 
나 감독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형과 해성이 숨을 크게 내뱉으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잘 이끌어 줘서 고맙습니다.”
 
그때, 해성이 알 수 없는 말을 던졌다. 놀란 도형이 고개를 들자, 멋쩍게 웃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형이, 일하면서 웃기도 하는구나.’
 
처음 본 건 아니지만, 적어도 제가 자주 보던 모습은 아니었다.
더더군다나 저와 함께 있는 순간에 미소를 머금은 것 또한,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고.
 
“한 것도… 없는데요, 뭐.”
“아니요.”
 
단호하게 대답하던 해성이 곁에 다가오는 스태프들을 저지하며 조용히 이야기했다.
 
“김도형 씨 감정선이 또렷해서, 따라가기 좋았습니다. 유진의 대사로 예현이 이끌려 온 게 아니라.”
 
도형은 숨을 죽였다. 이어질 해성의 대답을 기다리며 주먹을 슬며시 말아 쥐었다.
 
“예현의 대사로 유진이 이끌려 간 겁니다. 그건 분명해요.”
 
다시 한번, 해성에게 연기로 인정받은 기분이 들었다. 뛸 듯이 기뻤으나, 애써 입에 힘을 꾹 주었다.
 
“…과분한 칭찬인 것 같은데요.”
“아니, 분하지만 맞아요. 김도형 씨 연기가 지금 나보다 탁월했다는 사실은.”
 
희미하게 미소 짓는 해성의 모습에 도형이 다급히 시선을 피했다.
이렇게 갑자기 웃는 모습을 보여 주는 건. 반칙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못됐다고 해야 할까.
속절없이 흔들리고, 괜한 생각을 이어 가는 제게 해성의 낯선 모습이란 유해한 영상이나 다름없었다.
흠, 헛기침을 하는 그 무렵. 모니터 쪽에서 저들을 보고 있던 유찬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유찬아.”
 
해성 역시 고개를 들어 유찬을 바라봤다.
죽일 듯 노려보는 게, 그 또한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연기를 하는 사이 툭 튀어나오던 정해성 본연의 모습을.
 
“두 사람, 케미 좋다고 칭찬이 자자하던데.”
 
날이 선 말투였지만, 유찬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뭐야, 김도형. 서운해. 나랑 할 땐 그런 말 안 나왔는데.”
“나 감독님이 한 번에 오케이 했잖아. 감독님은 좋을 때 오히려 더 말을 아끼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시더라.”
“그래? 그럼 다행이지만….”
 
유찬은 기분이 풀렸다는 듯 익살스럽게 웃다가, 해성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단번에 사라지고 만다.
움찔거리던 해성이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이 경쟁 심리를, 저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
 
“선배님은요?”
 
이어지는 물음에 해성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무슨 질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저랑 도형이. 후배들 연기 어땠는지 궁금해서요. 선배님이 보시기엔 괜찮았나요?”
 
해성의 입이 굳어 버린다.
제가 보기에도 두 사람은 퍽 잘 어울렸다. 그대로 안방극장에 나간다면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커플이 될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그걸 제 입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드러내고 싶지 않은 진실 중 하나였기에.
 
“글쎄요….”
 
진심을 외면한 채, 머리 바깥을 도는 생각을 잡아채 툭 내뱉었다.
 
“진짜 결혼을 했던 사람들과 비교를 하는 겁니까. 최유찬 씨?”
“설마요. 사적인 이름을 전부 떼고요.”
 
여전히 냉담한 표정으로 유찬을 바라보던 해성이 팔짱을 낀 채 넌지시 입을 열었다.
 
“친구 이상, 연인 이하. 딱 그 정도였습니다. 섹슈얼한 분위기가 부족하던데… 정말 이 말을 듣고 싶었습니까?”
 
아주 찌질하기 짝이 없는 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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