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마주 앉은 우태의 표정에서 속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하지만 도형은 덤덤했다.
“내가 부른 거 아니야.”
이번에도 그랬으니까.
“제가 온 겁니다.”
곁에서 거드는 해성의 말에 도형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렇다는데? 의 뜻이었지만.
“…그러니까, 왜 하필. 이 시기에.”
한숨을 터트리는 우태의 표정은 제법 심각해 보였다.
잠시 생각에 고민을 거듭하던 우태가 굳은 표정으로 해성을 마주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안으로 팔 굽는 사람이라 도형이한테 뭐라고 못 하겠습니다. 정해성 씨. 이 상황 자체가 도형이한테 득이 될 게 하나 없는데, 그거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아요?”
해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태의 말이 뭐 하나 틀린 게 없었기 때문에.
평소 같았다면 한 마디, 한 마디 반박하듯 답을 내어 주었을 텐데. 오늘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제 행동이 무모했다는 점도, 지금 이 행동이 도형에게 어떤 여파를 몰고 올지까지도 모두. 예측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기에.
“이러다 또 열애설이라도 나면. 다시 둘이 합치네 마네 하는 기사라도 뜨면. 그땐 어쩔 겁니까? 그때도 이전처럼 그럴 겁니까? 김도형은 그냥 동생이다, 선배로서 조언을 주기 위함이었다. 결혼 생활을 의리로 이어 간 것처럼 이번에도 의리로 찾아와 위로를 한 것뿐이었다!”
“형!”
“그래, 지난번에 도와준 건 고마웠습니다. 그때 정해성 씨 덕분에 무사히 넘어간 거 맞아요. 도형이한테도 그랬어요. 정해성 씨 선견지명이라고. 머리 참 잘 돌아간다고. 고마운 건 고마운 거라고. 근데 지금 이건 또 뭡니까. 예? 한 번 막았으니 이번에도 잘 막을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속이 터질 것 같아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았다.
도형이 상처를 받는 건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어둠에 틀어박혀 자신을 탓하고, 가능성을 닫아 버린 채 죽은 듯 사는 건 한 번이면 족하다.
그러니 도형도 우태에게 아무 말 하지 못하는 것일 테지. 그저 두 사람의 눈치를 보며 우물쭈물거리는데, 해성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합니다.”
이어지는 그의 말에 놀란 건, 비단 도형만이 아니었다.
우태도 깜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다.
진짜 정해성이야? 이 사람 왜 이래, 진짜야? 도형을 향한 시선에 당혹스러운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 있다.
“너무 섣부른 행동이었다는 건, 저도 인지하고 있습니다.”
“…아, 예.”
이런 해성의 모습은 처음이다. 늘 고고한 모습만 봐서 그런 건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눈에 띄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그것도 위험한 선택이라 생각하지 못한 건… 안일했습니다. 확실히.”
고개를 끄덕이는 해성의 모습에 우태는 자기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이러면 제가 할 말이 없으니까. 흠, 짧게 헛기침하던 그가 무릎을 긁적거렸다.
“아니, 뭐… 그렇게 바로 인정해 버리면-”
“일부러 차를… 빌려서 왔는데.”
어쩐지, 처음 보는 차라고 했다. 도형은 그런 생각을 하며 해성과 우태를 번갈아 봤다.
하지만 우태는 그 말이 더욱 낯선 모양이었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해성을 바라보다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그렇게까지요?”
차까지 새로 바꿔 올 만한 일이었던가. 이게?
하지만 우태의 그런 표정에도 해성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더 묻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제가 너무 섣불렀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더 따질 수도 없고.
거기다 제 나름대로 노력을 했으니 더 할 말이 없었다.
“다음부터 조심합시다. 정해성 씨도 정해성 씨지만, 우리 도형이도 미디어 노출돼서 좋을 거 하나 없지 않습니까. 지금 회사도 영 머리 아픈데….”
“네. 그러겠습니다.”
덤덤하게 대답하는 해성을 보니 또 할 말이 없다. 머쓱하게 머리를 긁는데, 또 믿기지 않는 한마디가 들렸다.
“일단… 오늘은 같이 이동하겠습니다.”
“네, 같이… 네? 뭐라고요?”
“같이 이동하겠다고요. 뭐, 잘못됐습니까?”
잘못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너무 당당하고 덤덤하기 때문이 아닐까.
우태가 눈을 끔뻑거리며 도형을 바라봤다. 너도 당황스럽지? 묻고 싶었지만.
“그게 낫겠다.”
도형 또한 그의 말에 수긍하고 있으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다.
뭐가 낫다는 건지. 답답한 마음에 따지려는 찰나, 수긍하게끔 만드는 이야기가 돌아왔다.
“기자들이 몰릴 수도 있고, 형 밴이 이쪽으로 들어오면 광고하는 것밖에 안 되고. 어차피 행선지는 같으니까. 여기에서 같이 타고 가다가 중간에서 갈아타든, 가서 만나든. 둘 중에 하나가 낫지.”
“도착 지점 근처에서 갈아타는 게 나아. 중간에는 또 사람들 눈이 있어서.”
“그런가?”
뭐가 그렇고 말고인 건지. 이럴 땐 또 쿵짝이 잘 맞는다. 너무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에 우태가 입을 벙끗거렸다.
“괜찮지, 형?”
이어지는 도형의 물음에 우태가 어? 멍청하게 되물었다.
“해성이 형. 같이 타고 가도 괜찮지?”
분명 며칠 전까지만 하더라도 선배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형이 아니라, 선배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거기다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다고 묘하게 기운이 빠져 있기도 했고….
이게 도형이 말한 ‘서로의 앞길을 응원하는 사이’인 걸까.
그렇다면 굳이 도형의 행동을 짚어 주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우태가 한숨을 크게 뱉었다.
도형의 말이 맞다. 여기에서 괜히 따로 움직였다가는 더 큰 파도를 만날 수도 있는 일.
“그래, 그러자.”
어쩔 수 없지. 고개를 끄덕이던 우태가 핸드폰을 꺼냈다.
“도 실장님에게는 내가 이야기할게.”
“응. 고마워 형.”
“고맙습니다. 지 매니저님.”
해성이 전하는 감사 인사에 또 놀라고 말았다. 어, 네. 짧게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우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니저러니해도, 손은 이미 성혁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가 자리를 떠나고 난 뒤, 도형은 맞잡은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해성을 돌아봤다.
이제야 긴장이 풀린 건지, 입을 쩍 벌리며 하품하는 그를 보고 입술을 꾹 짓씹었다.
“피곤해하는 건 또… 처음 보는 것 같네요.”
“내가?”
“네. 형이.”
도형의 말을 곰곰이 곱씹던 해성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그렇게 아무것도 안 보여 줬나.”
“응. 아무것도 안 보여 줬어요.”
단호한 대답인데 왜 이렇게 씁쓸하게 들리는 건지. 해성은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얼른 씻어요, 형. 근데 이걸 어떡하지. 내 옷은… 안 맞을 텐데.”
“괜찮아. 의상 팀이 괜히 있는 것도 아니고. 차에 여벌 옷도 있어.”
아, 도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잠시 잊고 있었다. 해성이 여기저기 다니며 소화해야 할 스케줄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뒤, 도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형, 나 묻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
그리고 해성의 시선이 돌아온다. 말해 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의 눈빛이 제법 다정하게 느껴졌다.
도형의 입이 몇 번 달싹거리다, 이윽고 말문을 떼던 그때.
“이야기 끝냈고, 집합지 근처 휴게소에서 만나기로….”
거실로 성큼 나오던 우태가 말을 더 잇지 못한 채 두 사람을 바라봤다. 어쩐지 분위기가 묘한 게, 자신이 타이밍을 잘못 맞춘 건가 싶기도 하고.
“…자리 잠깐 피할까?”
“아, 아니. 아니. 괜찮아. 나 씻고 올게요.”
차라리 잘됐구나 싶었다. 진실을 들을 용기도 없으면서, 괜히 억지를 부려 질문을 던진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도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갔고, 우태는 그 뒷모습을 보다가 해성을 힐끔거렸다.
“바깥에 욕실 쓰면 되는… 아니, 어차피 알겠구나.”
새삼스럽단 생각에 우태가 중얼거리며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거렸다.
해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났고,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우태가 숨을 크게 내뱉으며 소파에 앉았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의구심이 우태의 입 언저리에 남아 있었다.
***
우태는 눈앞의 광경을 보고도 믿을 수 없었다.
“이것도 들까?”
해성이 자처해 이것저것 짐을 들고 있었다. 마스크를 낀 채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도 그는 영락없는 연예인이었지만.
“메고 있는 가방도 줘.”
도형에게 짐을 받아 드는 모습은 매니저 하나를 더 고용했다고 말해도 믿을 정도였다.
“해… 아니, 그. 이렇게까지 안 해도.”
“괜찮으니 타세요. 이렇게라도 해야 누가 봤을 때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해성은 이름도 부르지 못하고 저를 가로막는 우태를 향해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니, 그래도.”
“이 정도는 해야 누구도 저를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겠죠.”
그러니 잔말 말고 자신이 하는 대로 놔두라는 뜻이었다.
말이야 쉽지. 인기 배우, 톱스타. 그런 수식어를 갖고 있는 사람이 제 앞에서 짐을 나르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본다면.
그 누구도 마음 편히 둘 수는 없을 텐데.
마른침을 꿀꺽 삼키던 우태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지금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
“나는 그냥 즐기고 있어.”
곁에서 들리는 말에 슬쩍 고개를 돌려본다.
“…그냥, 즐기는 중이야.”
덤덤하게 대답하는 도형의 얼굴도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니까 형도 즐겨.”
그렇게 말하면서도 표정은 영 아닌데.
우태는 도형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앓는 소리를 내다가, 운전석에 올라탔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게 편할 것 같았다. 짐이야 해성이 전부 나르는 중이니, 저는 약속 장소까지 묵묵히 운전만 하면 된다는 일념이었다.
마침내 짐을 모두 옮긴 해성이 올라탔고, 고개를 돌려 손을 뻗는 모습이 보였다.
“…에?”
이상한 소리를 내던 도형이 손끝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그래. 얼른 잡아. 출발 안 할 거야?”
“아, 혼자.”
“얼른.”
정말 쟤가 왜 이럴까, 싶은 건 아마 우태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도형도 해성을 이상하게 바라보다가, 우물쭈물하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차에 올라타기 무섭게 해성의 입술이 만족스럽게 말려 올라갔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우태가 어휴, 다시 한번 앓는 소리를 내고 차를 출발시켰다.
다른 건 다 무시하고 그냥 운전에만 집중해야지. 뭐라고 하든 절대 신경 쓰지 말아야지 다짐했건만.
“형.”
도형의 목소리에 절로 몸이 움찔거리게 된다.
“너무 가까워요.”
이어지는 말에 슬쩍 백미러를 보니, 어느새 해성이 도형의 곁에 바짝 앉아 있었다.
“괜찮아.”
“안 괜찮아요.”
“익숙해질 텐데.”
“안 익숙해져요.”
“그럼 견디자.”
저거, 정해성 맞아?
우태는 도움의 요청을 보내는 도형의 눈빛을 보면서도 그저 묵묵히 운전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진짜 저 사람 왜 저러지. 떠나지 않는 의문이 죽 뻗은 도로 위로 함께 깔리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