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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 복장 규정이 따로 없다 보니 학생들은 제각각 있는 대로 멋을 부리고 다녔다. 우리 반 애들도 다를 건 없었다. 염색이야 다들 했고 옆 학교 여고 애들과 연애라도 시작하면 파마부터 하는 애들이 태반이었다.
우리 반에서 그나마 머리가 얌전한 건 나와 이은섭뿐이었다. 그리고 이은섭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정말 공부를 열심히 했다. 가끔 수학 문제를 못 풀고 끙끙대면 내 탓을 열심히 했는데, 인상을 쓴 얼굴이 하도 무서워서 나는 제발 문제가 알아서 풀려주기만을 옆에서 기도하곤 했다.
“영도, 너 일부러 나한테 공부 대충 가르쳐주는 거지.”
“내가 왜 그러겠어…….”
“내가 네 성적 앞지를까 봐.”
“……말이 되는 소릴 해, 은섭아.”
“야, 농담인데 다큐로 받아들이면서 꼽주냐…… 말한 사람 민망하게.”
체육 시간은 고 3 학생들에게 자습 시간이나 다름없어서 교사가 교탁에서 대놓고 취침을 해도 아무도 이의 제기 같은 건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다들 제 할 일을 했고, 나는 5월이 된 지금까지도 이은섭의 짝이기에 이은섭을 가르쳤다.
“농담한 줄 몰랐어.”
“매사에 진지한 당신의 무심함이 지금 은섭이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는 것만 알아둬.”
“웃기지 마, 상처도 안 받았으면서.”
“말 걸지 말아줄래? 상해죄로 고소 가능한 수준이야.”
객관적으로 봤을 때 나는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했고 이은섭은 거의 깡통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은섭은 친구들이 겁을 준 것처럼 무서운 애는 아니었다. 오히려 재밌었다. 틈만 나면 ‘은섭이는’, ‘은섭이가’ 하며 자기 이름을 남처럼 부르는 것도 웃긴데 애 자체가 사람 겁주고 무시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우리 반 애들은 그냥 알아서 이은섭 앞에서 몸을 사리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폰일진인지.
“이은섭이 조용히 좀 해라. 너 때문에 애들이 공부를 못 하잖냐.”
“저 계속 입 다물고 있었는데요?”
“네 목소리밖에 안 들린다. 네가 반장한테 협박하는 것밖에 안 들린다고.”
“와…… 억울하다, 영도야, 네가 해명 좀 해줘.”
“조용히 해, 너만 떠들잖아 진짜.”
“영도까지 날 배신하면 이 반에서 은섭이가 의지할 사람 아무도 없는데…….”
이잉, 소리를 내며 내 어깨에 이마를 박고 비비적거리는 이은섭 덕분에 반 분위기가 가벼워졌다. 그러고 보면 반 애들이 이은섭을 좀 어려워하긴 해도 완전히 나쁜 애라고 생각지는 않는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나쁜 애는 전혀 아니니까.
밤톨처럼 머리를 짧게 깎은 이은섭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다음 수업 시작 전까지 좀 자자.”
“……어, 그래.”
자기는 내 어깨에 이마도 막 비비고 허리도 끌어안고 그러면서, 이은섭은 내가 머리 좀 만졌다고 표정을 굳힌 채 그대로 자리에 엎드렸다. 나는 그 애가 둘러쓴 담요 끄트머리를 만지작거리다가 그냥 내 마이를 덮고 엎드렸다. 담요 같이 덮자고 하려 했는데.
아닌 게 아니라 이은섭은 종종 이렇게 사람을 서운하게 만들었다. 야자도 같이 하고, 저가 하자는 대로 공부까지 시켜주니까 나로서는 ‘우리가 꽤 친해졌구나.’ 생각할 만했다. 그러나 친구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가까이 다가가면 갑자기 정색을 하는 등, 이은섭은 종잡을 수 없는 행동으로 사람을 민망하게 만들었다. 내가 뭘 잘못했나 곰곰 생각하는 시간조차 아까운 시기에 나는 이은섭에게 약간 휘둘리고 있었다. 그럴 시간에 공부를 더 해야 하는데.
5월 내내 이은섭은 내게 살갑게 굴다가 갑자기 고장 난 것처럼 딱딱하게 굴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냉탕과 온탕을 오가는 듯한 기분에 시달리던 나는 주말에 모의고사 성적을 확인하고 결단을 내릴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국영수 1등급만 찍어왔던 나한테 국어 2등급은 타격이 너무 컸다.
“이은섭, 너 오늘 별일 없으면 나랑 학교 근처 카페나 갈래?”
그래서였다. 안 하던 짓을 한 건.
매번 야자나 같이 하던 내가 공부는 됐고 카페에 가자고 하니 어리둥절해 보이던 이은섭은 금세 가방을 싸고서는 내 옆에 붙었다.
“영도 형이 사주시는 거 맞죠?”
“케이크 정도는 사줄 수 있어.”
“역시 영도 형밖에 없어.”
너 나한테 왜 그러는 거냐고 물어보기 좀 민망하긴 하지만, 너 때문에 성적이 떨어지면 곤란한 건 대학에 한 번에 못 가면 재수는 꿈도 못 꾸는 나뿐이니까.
케이크를 사달라던 이은섭은 정작 카페에 가자 브런치 메뉴를 통째로 자기가 결제해버렸다. 카운터에서 프렌치토스트며 파스타, 음료까지 알차게 시키기에 지갑 사정을 걱정했던 나는 이은섭이 아무렇지도 않게 결제를 해버려서 미묘한 자격지심을 안은 채 착석했다. 진짜 내가 사주려고 했는데. 수중에 많은 돈이 있는 건 아니지만, 진짜 사주려고 했는데.
“언제는 나보고 사달라더니.”
“농담한 거지. 네가 나 공부도 도와주는데 얻어먹으면 되겠냐?”
“그래도…… 내가 카페 가자고 했는데.”
“그럼 다음엔 네가 사.”
“응, 다음엔 내가 살게, 꼭.”
“각서 써.”
“각서?”
“어. 기다려봐, 노트 꺼내게.”
시원스럽게 결제하기에 역시 부족하게 사는 애는 아니구나, 싶었는데 다음에는 네가 사라며 각서까지 쓰자는 말에 기가 질렸다. 이은섭은 내 표정을 확인하고도 꼭 약속 지키라고 하며, 기어이 노트에 ‘나 태영도는 귀염둥이앙큼상큼제너럴킹덤은섭1세에게 다음 달 카페에서 케이크를 사줄 것을 약속함’이라고 별스러운 각서를 써서 내밀었다. 대충 사인을 하려고 했더니 그러면 안 된다고 지장을 찍으라는 말에 그 애의 빨간 펜으로 엄지를 칠한 다음 잉크가 마르기 전에 내 이름 옆에 지장을 찍었다.
“……이럴 거면 그냥 오늘 내가 사는 게 낫지 않았을까?”
“정 없이 한 번만 먹고 말려고 그러지, 너. 반장, 진짜 사람 좋게 봤는데 이럴래? 나 상처 잘 받는 ENFP야.”
“상처 잘 받는 MBTI가 따로 있어?”
“사실 잘 몰라. 내 MBTI도 모르거든.”
“근데 무슨 ENFP라고…….”
“대충 그거 좋은 거라고 애들이 떠들던데.”
트렌드를 제대로 좇지 않고 지 꼴리는 대로 대충 정의 내리는 편인가. 다른 애들이 저렇게 말했으면 ‘왜 저래…….’ 싶었을 텐데 이은섭이 말하니 특별히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이은섭이라는 사람 자체가 가진 매력 때문인 것 같았다.
어느 학교에나 소위 말해 ‘노는 애’들은 있었고, 그런 애들은 저들이 뭐나 되는 것처럼 학교에서 군림하며 무리의 왕인 양 행세하곤 했다. 나야 그런 애들과 특별히 친분도 없고, 그렇다 보니 찍힐 일도 없었지만 일진 무리를 한심하게 생각하는 건 전교생이 같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수업 시간에 교사를 우습게 보고 저들끼리 여자 소개해달라며 낄낄거리며 무리 지어 다니는 애들을 혐오했다.
“브런치 잘 먹을게. 그리고 각서 썼으니까 다음 달에는 내가 꼭 살게. 약속 미리 잡을까?”
“아, 뭐…… 기말 끝나고 먹으러 갈까? 태영도 공부 방해하면 나 처맞잖아.”
“내가 너를 때린다고?”
“아니, 우리 반 애들이랑 담임이. 애들이 존나 너 싸고도는 거 모를 줄 아냐. 담임도 우리 영도, 우리 영도, 맨날 그러는데 어떻게 몰라.”
“그런가…….”
“그리고 네가 나 공부 가르쳐주는 거 진짜 고마워서 언제 한번 내가 뭐라도 좀 사려고 했어. 먹고 빙수도 먹자. 오늘 은섭이가 쏜다!”
이은섭은 그런 애들과는 좀 달랐다. 과하게 무게를 잡거나 욕을 안 하는 것도 아닌데 가벼워 보이지 않았고, 성적도 썩 좋지는 않지만 공부를 도와주면 또 성실하게 잘 따라왔다. 수업 시간에 종종 졸지만 묘하게 건실한 느낌 때문인지 질 나쁜 애들도 이은섭이 자기들과 어울릴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일진 애들은 이은섭에게 과하다 싶게 비굴하게 굴었지만 이은섭은 그러거나 말거나 자기가 졸리면 잤고, 간식 같은 게 있으면 주변에 앉은 애들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그게 그 애를 특별해 보이게 만들었다. 처음으로 반에서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될 정도로.
테이블 가득 찬 메뉴들을 먹기 좋게 잘라서 내 앞접시에 놓아주고는 덥석덥석 잘도 먹는 이은섭을 구경하다가 나도 음식을 먹었다. 메이플 시럽에 젖은 토스트가 부드럽게 넘어갔다.
10분 정도 별말 없이 먹기만 했다. 그러다가 테이블 아래에서 이은섭이 내 다리를 툭 치기에 고개를 파뜩 들었다.
“그래서 오늘 카페는 왜 오자고 한 건데.”
“아, 그게.”
“그거 뭐. 오늘 태영도 때문에 야자도 못 했으니까 별거 아니면…… 별거 아니어도 딱히 할 수 있는 건 없지만. 하여튼 뭔데.”
배 좀 찼다 이건지, 이은섭은 테이블의 반 이상을 비우고 나서야 내게 물었다. 뭐 때문에 부른 것이냐고. 할 말이야 모의고사 점수를 확인한 순간부터 정리했으니 말만 하면 됐다. 그러나 나는 말을 하다 보니 뭔가 민망하고 어색해서 자꾸 끊어 말하게 되었다.
“다른 게 아니고…… 나는 너랑 많이 친해졌다고 생각하거든.”
“……어. 그런데?”
“너는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너랑 짝 되면서부터 우리 둘이 야자도 하고 그랬잖아. 그래서, 음…… 내가 너한테 좀, 그러니까 네 기분에 내가 많이 좌지우지되는 것 같아서.”
“아, 어…… 어? 나 때문에?”
“너는 잘 모를 수도 있는데, 너 가끔 느닷없이 정색할 때 있거든……. 그때마다 너한테 뭐 잘못했나 싶어서. 혹시 내가 뭐…… 고칠 거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만약에 있으면 편하게 말해도 돼. 나 그런 걸로 꽁해 있고 안 그래.”
그러려고 그런 건 아니었는데 어쩐지 남자친구에게 투정 부리는 내용 비스무리하게 되어버려서 민망해졌다. 앞에 앉은 이은섭이 사색이 되었다가 홍당무처럼 벌게지길 반복해서 더더욱.
고칠 게 있으면 가감 없이 말해달라고 하자 이은섭은 자기 턱을 벅벅 문질렀다. 벌써 수염이 나기 시작하는지 턱 끝에 약하게 푸른 기가 돌았다. 나는 언제쯤 수염이 나려나, 생산적이지 않은 생각을 하는 와중에 이은섭이 입을 열었다.
“나도 너 좀…… 신경 쓰이거든.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그런 듯. 미안.”
“그러니까 어떤 점이? 말해주면 안 돼?”
“아 좀, 말로 정리할 수가 없는데…… 나쁘게 신경 쓰이는 건 아니고. 너도 눈치챘겠지만 내가 반에 특별히 친한 애가 없잖아. 학교 애들이 좋은 거든 나쁜 거든 간에 내 뒷얘기 하고 다니는 거 나라고 모르겠냐. 근데 영도 너는 딱히 나한테 벽 치는 것도 없고 하니까, 나도 너랑 친하다고 생각하긴 하는데……. 아, 씨발! 아, 존나 정리가 안 되네.”
“갑자기 왜 욕을 하고 그래.”
“아, 개씹 답답해서. 너한테 불만 있는 건 존나 하나도 없어. 네가 나 그렇게 신경 쓰는 줄 알았으면 내가 조심했을 텐데 고 3 되면서 눈치 다 뒈졌나 봐. 앞으론 신경 안 쓰이게 할게.”
이은섭도 나를 신경 쓴다는 말에 손끝이며 발끝에 찌릿거리며 싫지 않은 느낌이 감돌았다. 우리는 카페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으나 다 겉도는 이야기인 걸 둘 다 알고 있었고, 카페를 나와서 한 말만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이야기인 걸 알았다.
“태영도, 스무 살 되면 나랑 맨 먼저 술 먹자.”
“몇 달 뒤 얘기를 벌써 하냐.”
“미리 약속해. 그때 말해줄게, 너 왜 신경 쓰이는지.”
“……그래. 그러자.”
머지않은 미래의 나이가 시작될 때를 함께하자고 하는 게, 우리 둘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