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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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나는 친하게 지내던 동기와 살갑게 말을 하는 이은섭에게 심통이 났다.
동기에게 이미 남자친구가 있는 걸 알았다. 이은섭은 누가 봐도 시선을 뺏길 정도로 수려하게 생긴 데다 유명 배우인 것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이은섭이 나를 10년간이나 기다린 것도 알고 있었다.
다 아는데! 그런데도 질투가 나서 나는 자꾸만 불퉁하게 말이 나가는 걸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우선은 아침에 뉴스부터 빠르게 확인하셔야 해요. 신입 아나운서들은 보통 메인 뉴스 프로그램을 맡지 않지만, 그래도 국내외 굵직한 이슈를 확인하는 건 필수입니다.”
“선배님이랑 지현 씨는 이슈 파악에 시간을 얼마나 할애하시나요?”
지현 씨……? 오늘 처음 본 사이인 외간 여자랑, 내가 옆에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어느새 통성명을 마쳤다고?
동기는 더 이상 이은섭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이은섭 역시 옆자리의 동기보다는 나와 이야기할 때 눈을 빛내는 걸 알면서도 속이 바짝바짝 탔다. 나는 이제 신입인 아나운서고 너는 엄청나게 성공한 배우이니 격차가 없을 수는 없었다. 문제는 그 격차로 우리가 또 멀어질까 걱정하는 나였다.
작게 한숨을 내쉰 나는 잠깐 촬영을 끊어가자고 한 후 이은섭과 탕비실로 향했다. 늑대가 아니라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따라오는 모습을 보니 또 화가 풀리는 나 자신이 어이없었다.
“은섭 씨.”
나는 말하지 말까, 하다가 귀 좀 대보라고 한 후 고개를 한껏 숙여준 이은섭의 귀에다 대고 말했다.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 친근하게 굴지 마. 질투 나.”
“어?”
“이제 가죠. 커피 한 잔 내려드릴까요?”
“아, 어…… 네.”
돌려 말하는 것보다 직구로 던지면 이은섭도 단박에 알아들을 테니 곧이곧대로 말하자 이은섭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무슨 말을 못 하겠네…….
“가요, 은섭 씨.”
“네, 선배님.”
아무도 없는 탕비실에서 내 새끼손가락을 한 번 꼭 쥐었다가 놓는 이은섭이 귀여워서 나도 그 애의 엄지손가락을 살짝 잡았다. 둘 다 연애 못 해본 티가 너무 많이 나서 큰일이네.
연애는 못 해봤어도 연예계에서 몇 년간 구른 이은섭은 카메라가 돌아갈 때는 프로답게 집중했다. 타이틀은 아나운서로서의 하루를 체험하는 것이었지만, 제작진은 마지막 촬영을 방송국 순회로 채울 작정인지 큐시트에 나온 장소 이동이 무려 다섯 번이나 되었다.
생각해보니 이은섭을 하루 종일 데리고 다니며 가르쳐야 할 나도 아나운서가 된 지 1년이 채 안 되었으니 이편이 나을 것 같았다. 딱히 안 좋게 생각할 일도 아닌 듯해 나는 이은섭과 소소하게 대화를 나누며 큐시트에 없는 내용을 물어봤다.
“이번에는 라디오국 한번 가볼게요. 은섭 씨는 라디오 출연하신 적 있으세요?”
“많죠. 선배님은 저한테 진짜 관심이 없으신가 봐요. 저 영화나 드라마 찍을 때마다 홍보차 라디오 나갔었는데.”
“예전엔 관심 없었습니다.”
솔직하다고 다 좋은 게 아니라고 입을 댓 발 내밀고 투덜거리는 이은섭의 손등을 톡톡 치며 말을 이었다.
“방송 같이 하면서 은섭 씨 팬 됐으니까, 앞으로는 다 챙겨 볼게요. 은섭 씨가 하는 방송이랑 영화, 라디오까지 전부 다요.”
“……저도 영도 씨를 항상 챙길게요.”
어째 입력과 출력이 제멋대로인 이은섭을 가만히 보다가 또 웃음이 터졌다. 얘나 나나 좋은 티를 숨길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게 웃겨서.
시간이 되면 디제이 체험까지 할 계획이었으나 촬영을 마친 후 회식이 계획되어 있었다. 이은섭과 나는 방송국을 열심히 들쑤시고 다니다가 오후 다섯 시가 되어서야 퇴근 일지를 작성하고 건물을 나왔다.
“오늘 분량은 다 뽑았으니 이제 회식 장소로 옮기죠!”
“태 아나는 제작진이랑 같이 갈 거지?”
“아뇨, 촬영하느라 고생하셨는데 제작진분들 편하게 가셔야죠. 영도 씨는 저랑 같이 가면 되니까 먼저 가 계세요. 바로 뒤쫓아 가겠습니다.”
“어어, 그럼 그렇게 해줘요, 은섭 씨!”
“네, 이따 회식 장소에서 뵙겠습니다.”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 둘 다 엔도르핀이 너무 팡팡 뿜어져 나왔다. 이은섭과 나는 제작진이 모두 사라진 후에 느릿느릿 차에 탔다. 그리고 차 문이 닫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허겁지겁 서로를 끌어안았다.
“숨 막혀.”
“그럼 네가 덜 귀여워야 되는 거 아니냐?”
“나도 너 귀여운데 꾹 참는 거야.”
“참지 마, 참긴 뭘 참아.”
“저기요. 여기 사람 있습니다.”
운전석에서 무미건조한 음성이 들려오지 않았다면 서로 네가 더 귀엽다고 1절에 2절, 3절까지 할 뻔했다.
이은섭이야 매니저가 편할 테니 무시하라고 했지만 나는 남 앞에서 근지러운 애정 행각을 벌이는 게 영 민망했다. 나이깨나 먹고서 연애 처음 하는 티를 남한테 들키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은섭 외에는 없을 것 같았다.
매니저가 심하게 눈치를 준 건 아니지만 괜히 제 발 저려 이은섭과 거리를 두고 앉은 나는 그 애의 손만 꼭 붙들었다. 이만하면 참아달라는 눈빛을 보내자 이은섭은 정신 사납게 다리를 몇 번 떨더니 차에서 내리기 전 말했다.
“오늘 회식 끝나고 우리 집에서 자.”
“응?”
“콘돔 삭겠어.”
“아…….”
“저기요! 여기 사람 있다니까요!!”
섹스하자고 아주 노골적으로 말하는 이은섭이 짜증 났는지 매니저가 소리를 꽥 질렀다.
나는 이은섭의 늑대 귀를 꾹꾹 누르고 난 후에야 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이은섭의 늑대 귀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건 연애 티가 나는 것보다도 더 싫으니까.
회식 장소에 도착하니 이미 먹고 죽자는 분위기였다.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시작해 정규 편성이 된 터라 제작진들의 표정은 모두 밝았다. 시청률보다도 유튜브 조회 수가 잘 나와 윗선에서도 예상외의 성과라고 말이 나왔다고 하니 내가 제작진이어도 감개가 무량할 듯했다. 물론 내 생각에 그 성과의 8할은 이은섭 덕분이었다.
“은섭 씨랑 태영도 아나운서가 고생해준 덕분에 프로그램이 아주 잘됐어요. 기존에 배우로서의 이미지가 있는데도 출연해준 이은섭 배우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프로그램 고정 패널로 열일해준 태영도 아나운서를 위해 건배!”
“건배―!”
메인 피디의 노고를 치하하는 건배사에 술을 마시지 않았음에도 얼굴이 빨개졌다. 예나 지금이나 필요 이상의 주목을 받는 건 어색했다. 이은섭은 나와는 달리 넉살 좋게 제작진들과 잔을 부딪쳤다. 눈치를 보며 잘하지도 못하는 술을 대책 없이 받던 나는 이은섭을 눈으로 좇다가 어깨를 톡톡 치는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누구인가 했더니만 막내 작가였다. 긴 대화를 해본 적은 없으나 항상 열심히 하는 모습이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 같기도 해서 몇 번 커피를 사기도 했는데. 나는 인사를 하려고 고개를 숙이다가 하마터면 상에 그대로 머리를 찧을 뻔한 걸 겨우 면했다.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술을 마셔서 그런지 취기가 빠르게 도는 느낌이었다.
“영도 씨한테 항상 감사했어서요, 술 한잔 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네, 그럼요! 항상 열심히 해주셔서 저야말로 감사했어요. 이제 은섭 씨가 없으니 제 분량이 많이 줄겠지만―,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니에요, 영도 씨 분량 하나도 안 줄어들 거예요. 오히려 늘릴 수도 있어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পহুৰ লগত নাচিব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