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카까지 보낸 이은섭에게 하트를 100개쯤 보내고 난 후에야 오가던 메시지가 멎었다. 이은섭에게서 온 셀카를 바로 저장한 한 후 나는 비로소 주간 회의에 제대로 임할 수 있었다. 업무 태만이라고 누가 뭐라고 해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일을 하기는 하는데 틈만 나면 이은섭과 뭘 하고 놀지만 생각하니.
“태 아나, 이번 주부터 다음 주까지 라디오 디제이 대타 뛰어야 할 것 같은데 일정 괜찮아요?”
“아, 네. 괜찮습니다. 내일부터 들어가면 될까요?”
“어어, 내일은 녹음본 있어서 괜찮대요. 원래 하던 디제이가 갑자기 사고가 나서 다음 주까지 힘들다네. 콕 집어서 태 아나가 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다는데 마침 일정이 돼서 다행이다. 그러면 담당 작가한테 바로 회신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다이어리에 형광펜으로 일정을 체크할 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 일 때문에 이은섭과 다투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은섭아 너 라디오 자주 들어? 15:00
당장 내일부터 라디오 디제이가 되는 건 아니고, 그마저도 임시직에 불과하지만 나는 조금 들뜬 마음이 되어 이은섭에게 메시지부터 보냈다. 어렸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나는 라디오를 많이 듣는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부모와 함께 사는 동안 두 분이 라디오에서 나오는 트로트를 흥얼거리시던 소리는 아직도 귓가에 선연히 남아 있었다.
청소년기에는 그게 구질구질함의 산물 같아서 귀마개를 끼우고 있기도 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내 청소년기를 유일하게 반짝이게 만들어주던 이은섭이 연인으로 있지 않은가. 구질구질하다고 느꼈던 조부모의 허밍을 이젠 구성진 가락 정도로 생각할 여유가 내게 있었다.
섭♥
웅! 15:01
왜? 추천해줄까? 15:02
ㅋㅋㅋㅋㅋㅋㅋ아니! 다른 게 아니라 나 이번 주부터 라디오 디제이 대타 뛰게 됐거든. 저녁 10시 라디오! 15:03
섭♥
윽! 밤에 서방님 라디오 디제이하러 가시면 집에서 서방님 목소리 들으면서 기다려야겠다>< 15:04
기대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깜찍한 반응에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누가 봐도 연애하는 사람의 얼굴일 게 분명해서 잠시 창피함을 느꼈지만 나는 곧장 이은섭에게 이따 저녁에 보자는 메시지를 보냈다.
나는 퇴근하자마자 이은섭의 집으로 향했다. 미리 집에서 기다리고 있겠다던 이은섭은 현관 앞에서 데님 앞치마를 하고서 나를 반겼다.
“서방님 왔다―.”
“오셨어요, 서방님!”
“으앗!”
“기다리느라 목 빠지는 줄 알았어.”
“나름 칼퇴한 거야. 봐줘.”
가만 보니 반바지만 대충 입고서 위에 걸친 건 앞치마가 전부였다. 이러다 감기 걸린다고 한마디 하기도 전에 와락 안겨 오는 이은섭에게 팔을 벌린 채로 현관문에 쿵, 부딪힌 나는 뒤통수를 얌전히 쓰다듬는 이은섭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뭐 만들고 있었어?”
“계란말이. 오늘 본가 들러서 나물이랑 갈비도 훔쳐 왔어. 잘했지?”
“응, 잘했어, 우리 색시.”
구두도 벗지 못한 채 코끝을 맞대어 오는 이은섭을 뿌리치지 않고 입을 맞췄다. 이은섭이 영화 때문에 바빠지며 내가 일방적으로 이은섭의 집에 살림살이를 많이 옮겨놓은 후로 우리는 여느 신혼부부와 다를 바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면 웃음부터 나왔고, 눈보다 빨리 입술을 맞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나는 이런 관계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10년을 돌고 돌아 겨우 연인이 되었는데 이 정도면 둘 다 스킨십에 점잖은 편이라고까지 여겼다.
한참 촙촙거리며 서로 입술을 빨던 이은섭과 나는 계란말이가 식기 전에 저녁을 먹는 게 좋겠다 싶어 겨우 떨어졌다. 이은섭은 내가 애도 아닌데 넘어질까 걱정된다는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나를 공주님 안듯 안아 올려 식탁까지 가는 주접을 떨었다.
“라디오 디제이는 반고정? 아니면 말 그대로 대타?”
“아, 대타로 일주일만 하게 됐어.”
“너네 방송사 열 시 라디오면 박재현이 하는 거 대타로 들어가는 건가.”
“어떻게 알았어? 너 진짜 라디오 많이 듣나 보다. 나는 그 배우 이름도 처음 들어봤거든.”
“뭐…… 대충 알아. 예전에 같이 작품 해서.”
“아아. 그 배우분 어때?”
고생하고 온 서방님은 젓가락질도 스스로 하면 안 된다며 내 입에 밥을 떠먹여 주던 이은섭은 내가 대타로 들어가는 라디오에 대해 들을수록 묘하게 찝찝한 표정을 짓더니 한쪽 눈썹만 살짝 들어 올렸다. 나는 그게 신기해 따라 하려 애꿎은 왼쪽 눈만 정신 사납게 깜박이다가 볼을 꼬집혔다.
“남자친구 앞에서 외간 남자 궁금해하는 건 어디에서 배운 예의야.”
“에이, 질투할 걸 해.”
“난 네가 쥘 젓가락도 질투 나서 밥 먹여주고 있는 건데.”
“웃기지 마, 진짜!”
밥을 먹다 말고 크게 웃는 내게 이은섭은 끝까지 박재현에 대해서는 말해주지 않았다. 연애 한번 별스럽게 한다 싶었지만, 그 상대가 나라서 기분은 좋기만 했다.
* * *
라디오 디제이 대타로 임하는 게 방송가에서 특별한 이벤트 취급을 받지 못한다는 명확한 사실과는 별개로, 이은섭과 내 조부모는 내가 라디오에 나간다는 걸 무척 반겼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내가 어렸을 때부터 여러 라디오 애청자셨으니 당연히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있었다. 의외였던 것은 이은섭이었다.
듣자 하니 이은섭은 박재현이라는 배우와 사이가 아주 원만하지는 않은 듯했다. 오늘 메시지를 보냈을 때 좋아라 했던 것은 박재현이 디제이로 있는 방송에 나가는 걸 미처 몰랐을 때 일이라며 퉁명스럽게 말하기까지 했다. 나는 부루퉁하게 매트리스를 퍽퍽 내려치는 이은섭에게 방송을 하며 그 배우와는 만날 일이 없을 것이고, 만나더라도 별일 없을 거라는 말과 함께 이은섭의 가슴팍을 쿠션 삼아 기대어 앉았다.
“할머니―. 내일부터 10시 라디오 들으면 돼요. 할아버지한테 맞춰달라고 해. 아니면 거기 간병인분께 부탁드려도 되겠다.”
-아이구, 네 할아버지는 뭣도 몰라. 내가 무진이 엄마 오면 부탁해야지이.
“다음에 간병인분께 드릴 선물이라도 좀 사 가야겠어요. 할머니랑 할아버지 살뜰히 챙겨주시니까.”
-으응, 그래. 그건 그렇구 은섭이는 잘 지내?
“할머님! 은섭이 잘 지내요―. 다음에 영도랑 같이 갈게요. 맛난 거 잔뜩 사 갖고 가야겠다, 할머니 놀라시게!”
느닷없이 통화에 끼어든 이은섭이 마음에 쏙 드는지 할머니는 들어 본 적 없는 소녀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나는 이은섭이 넉살 좋게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두루 치대는 게 좋았다. 어쩌면 할머니가 이은섭을 좋아하는 것 그 이상으로 좋아할지도 몰랐다.
사람들에게 우리 사이가 완전히 공개된 것은 아니다 보니 이은섭과 나는 요양원에 모자를 푹 눌러 쓰고 갔었다. 이은섭은 이럴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면서도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철저하게 귓속말을 했다. 커다란 덩치가 몸을 옹송그려가며 소곤소곤 떠드는 게 좋았는지 할머니는 그날 이후로 내게 틈만 나면 이은섭에 대해 물어봤다.
은섭이는 뭐 해? 은섭이랑은 같이 지내? 살림은 언제 합쳐? 사실 가장 묻고 싶은 것은 ‘너네 결혼은 언제 하니?’인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좋지 않은 형편에 마음 아파할까 걱정되어 나는 모른 척 결혼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럼 다음엔 요양원 근처에 있는 갈빗집 갈까요? 제가 모시고 갈게요. 아이―, 할머님 정도면 업고 뛸 수도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네, 그럼 그때 봬요! 들어가세요, 할머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