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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운서실 사람들은 내가 이은섭과 페어로 촬영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에 모두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운이 좋아도 너무 좋은 거 아니냐며, 브라운관에서도 보기 힘든 이은섭과 하루 종일 붙어 있을 수 있다니 천운을 타고났다는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내 표정이 어땠을지 잘 모르겠다.
“올해 밸런타인데이에 데이트하고 싶은 배우도 이은섭이 1위 했잖아요.”
“그냥 데뷔한 후부터는 무슨 투표든 1위 하고 있지.”
“어떻게 늑대 수인이기까지 할까요? 데뷔작에서 설원을 떠도는 늑대 연기로 호평받았을 때부터 뜰 줄 알았다니까요.”
“나도 그 사람은 뜰 것 같더라고요. 우선 마스크부터―, 캬―! 남자가 봐도 너무 멋있잖아요!”
“실제로 보니까 어땠어요?”
“맞아요, 영도 씨가 보기에도 진짜 소문대로 잘생겼었어요?”
“아, 뭐…… 네. 잘생긴 것도 잘생긴 건데.”
커피가 다 식도록 아무 생각이나 하고 있던 나는 멍하니 내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던 너를 떠올렸다. 내 기억 속의 너는 10년 전에 머물러 있었는데 오늘 본 너는…….
“키가…… 엄청 크더라고요. 너무 키가 커서 놀랐어요.”
“어머, 영도 씨도 작은 키 아닌데 영도 씨보다도 컸어?”
“영도 씨가 180 정도 되나?”
“저 177이요. 180은 안 됩니다.”
“영도 씨가 보기에도 큰 키였으면 190 가까이 되려나? 아, 너무 멋있다!”
소문대로 젠틀하더냐며 묻는 선배들에게 나는 그냥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영도. 여전히 나를 그렇게 저장해놓은 네 얼굴이 의아할 정도로 발갛게 물들어 있던 걸 잊기 힘들 것 같았다.
예상대로 내게 번호를 물어보던 네 얼굴은 쉬이 잊히지 않았다. 빌어먹을 개펄에 가는 날, 그래서 나는 네가 갑자기 스케줄 펑크를 내길 바랐다. 프로그램 제작진 측에서는 네가 고깝겠으나 네가 오지 않는다면 나는 정말 열심히! 바지락을 채취할 자신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커피 한 잔씩 하세요.”
“어머, 이런 걸 다 사 오시구―.”
그러나 학교에 다닐 때는 잘만 지각하고 엎어져 자던 이은섭은 애초 모이기로 한 시간보다 30분이나 일찍 오프닝 촬영지에 도착했다. 이은섭의 매니저로 보이는 어린 여자가 잠이 덜 깬 표정으로 스태프진에게 커피며 간식을 돌리는 걸 나는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말도 안 되는 프로그램을 진짜 네가 찍을 모양이구나. 어차피 본 촬영지에 도착하면 작업복으로 갈아입을 테니 편한 복장으로 오래서 일자 데님과 맨투맨 한 장을 입은 나는 멀뚱멀뚱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미소만 지었다.
“커피 드실래요.”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그래서 너에게도 웃어주었다. 다들 하하호호 웃고 떠드느라 바쁜데 나만 외딴 섬처럼 있는 것도 머쓱했거니와, 10년 전 일 따위 너는 이미 잊고 있을 게 분명하니까.
네가 건넨 커피를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나는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렸고, 여전히 네가 나를 보고 있기에 서둘러 차에 올랐다. 다시 만난 너는, 너무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