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은섭의 부모님이 나를 긍정적으로 생각해주신다고 해서 긴장감이 덜한 건 아니었다. 나는 별일 아니니 긴장 말라고 너스레를 떠는 이은섭의 옆에서 믿지도 않는 신들을 찾으며 기도했다. 내가 말실수하지 않기를, 나를 보고 이은섭의 아버지 두 분이 실망하지 않기를.
틈틈이 연락만 하고 얼굴을 마주하는 건 일주일 만인 이은섭과 스킨십 한번 제대로 못하고 이은섭의 집에 도착했다. 이은섭은 서운한 내색을 하며 어쩜 뽀뽀 한 번을 안 해주냐고 투덜댔다. 하지만 이은섭은 자기 집에 온 것이고 나는 ‘아들을 제게 주십시오!’라고 말할 입장인데 마음가짐이 같을 수가 있나.
“이따 집 가서. 진짜 죽을 것 같아서 그래.”
“아이고, 걱정도 팔자다.”
“아직 벨 누르지 마, 안 돼, 안 돼……!”
“아빠―! 우리 왔어요!”
여전히 부부간 금슬이 좋다는 이은섭의 말에 커플 잠옷과 커플 실내화를 산 나는 쇼핑백을 든 채 이은섭의 등을 때렸다. 딱 1분만 더 진정하고 들어가려고 했는데!
하도 긴장해 손끝과 발끝이 저릴 정도였으나 나는 사색이 되어 나오는, 이은섭을 낳아준 아버지를 보고 온몸에 다시 따뜻한 피가 도는 것을 느꼈다.
“와, 왔니? 왔어요? 원래 우리 애들도 보고 싶어 했는데 둘째는 최종 면접 가고 셋째랑 넷째는 친구들이랑 놀러 가서―. 영도…… 씨, 들어와요. 오느라 고생 많았어요. 근데 말 놓아도 돼요?”
“아빠, 진정하고 우선 들어가자. 영도가 아빠들 주려고 선물도 샀어.”
“뭐 이런 걸 다……! 대대손손 물려줄게요.”
“커플 잠옷이랑 실내화니까 그냥 둘이서 입고 신어. 들어와, 태영도.”
내게서 쇼핑백을 받아 가는 토끼 수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은섭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고, 토끼 수인의 뒤에 서 있던 장년의 늑대 수인은 제 남편이 영 귀엽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10년 전에 와봤던 이은섭의 집은 여전히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커다랬지만 여전히 안온한 느낌으로 가득했다. 아주 지겹도록 왔던 공간이라 그런지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다정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우리 은섭이가 첫사랑을 못 잊어서 결혼 못 할 줄 알았는데.”
“네?”
차린 게 없다는 빈말 대신 차린 거 많으니 다 먹고 가라는 너스레로 나를 반겨주는 아버님들께 잘 먹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소담하게 차려진 음식을 한 번씩 다 먹어보는 중이었다. 이은섭이 손사래를 치는데도 아버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예전에 차이고 나서 어―찌나 울어재끼던지. 집 떠나가는 줄 알았어. 저놈이 뭐 매번 친구 데리고 오더니만 오죽 매력이 없었으면 차이나, 했지. 날 닮았으면 차일 일 같은 건 절대 없는데, 아이고.”
“듣지 말고 얼른 먹어, 영도야.”
“맞아, 나도 이이도 은섭이가 영도한테 차일 줄 모르고 얼마나 놀랐다고.”
“허우대는 멀쩡해서 하는 짓은 싸가지가 바가지이니 차였던 거지. 이제 나이 좀 먹었으니 그러진 않겠지?”
“아,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진짜!”
장난으로 하는 말인 걸 다 알 텐데도 이은섭은 목덜미부터 얼굴까지 시뻘게져서는 내 밥그릇에 반찬을 쌓아줬다. 그게 처음에는 웃겼으나, 어쩌면 아직도 이은섭에게 그게 상처로 남아 있을 것도 같아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때는 제가 잘못했던 거였어요.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은섭이가 너무 잘해줘서…… 은섭이랑 만나기 시작한 순간부터 끝은 결혼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은섭이가 저를 잊지 않고 여전히 좋게 생각해줘서 다행이에요.”
최대한 담백하게 말하고 싶었는데 이은섭의 두 아버지는 별안간 껄껄 웃기 시작했다.
“여보, 얘 귀 나왔다, 귀.”
“나잇값 좀 해라, 이은섭이.”
“아, 식사들 하시라고요! 나 놀리지 말고!!”
상견례치고는 상당히 격의 없이 꽥, 소리를 지르는 이은섭을 훔쳐보다가 몰래 내 등을 긁었다. 뱁새 수인은 날개가 나와도 옷 속에서 작게 파닥거리는 정도이니 내 부끄러움은 들키지 않아 다행이었다.
둘이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족히 스무 번은 들은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후식을 먹을 때도 나를 계속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이은섭의 아버지들 덕분에 나는 기분 좋은 부담감에 취해 밤을 맞게 되었다.
“피곤하다. 너도 피곤하지?”
“별로. 너야 아빠들 대면하는 게 부담스러웠겠지만 난 아니니까. 마사지해줄게, 엎드려봐.”
이은섭의 본가에서 하룻밤 자고 가기로 한 터라 나는 이은섭의 큼지막한 반팔티 한 장만 입고 있었다. 속옷도 이은섭의 것을 입었는데 자꾸 줄줄 내려가서 입으나 마나였다. 이은섭은 그걸 보고는 그냥 벗어도 된다고 했으나, 그거야 이은섭과 단둘이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었다. 이은섭의 아버지들께 끝까지 좋은 이미지로 남고 싶어 나는 말없이 브리프 허리춤을 꾹 쥐었다.
열아홉 살 때 자주 낮잠을 자곤 했던 이은섭의 침대에 납작하게 엎드리자 적당한 압으로 이은섭이 등을 꾹꾹 눌러줬다. 하도 편안해서 까무룩 잠이 들 것 같았다. 그대로 자도 괜찮겠지만, 오늘은 정식으로 이은섭의 아버지들께 인사를 드린 역사적인 날이니만큼 그냥 잠들고 싶지는 않았다.
“은섭아.”
“어우, 힘들어. 이제 옆에 누워봐.”
이은섭은 자기가 나를 마구 누르며 안마해놓고는 옆에 누우라고 하고서 제가 내 옆에 털썩 누웠다. 모로 누운 그 애는 나를 빤히 보다가 눈이 마주치자 한마디를 더했다.
“팔베개해줄까?”
“응.”
“어리광 존나 귀엽게 부리네.”
응, 한마디 했는데 내가 무슨 어리광을 부렸다고 하는지. 듣기 싫지는 않지만 좀 민망해서 이은섭의 팔을 납죽 베고서 괜히 가슴팍을 툭툭 때렸다. 내가 딱히 야리야리한 스타일이 아닌데도 이은섭의 품에 내 몸이 맞춘 듯이 들어맞는 게 새삼스럽게 좋았다.
“아버님들께서 나 좋아해주셔서 다행이야.”
“아빠들은 10년 전부터 너 좋아했다니까. 왕따인 아들 구제해준 학급 반장을 누가 싫어하냐? 내가 부모여도 어구구, 우리 영도, 이러겠네.”
“반 애들 중에 누가 널 싫어했다고. 너 혼자 분위기 잡은 거였잖아, 그냥.”
“내가? 야, 말은 바로 하자. 내가 분위기를 잡은 게 아니고 그냥 내 분위기 자체가 미쳤던 거지.”
“너는 그런 말을…… 네 입으로 되게 잘한다…….”
타박은 짧게 했다. 이은섭에게 뭐라고 하기엔 내가 이은섭의 그 양아치 같은 분위기를 너무 좋아해서. 인상을 사나워 보이게 만드는 선명한 눈썹산을 문지르며 나는 동시에 네 턱 끝에 쪼듯이 뽀뽀를 했다. 깔끔하게 면도를 마친 턱선은 군더더기 없이 날렵했다.
“우리 할머니랑 할아버지한테도 말했어.”
“어?”
“두 분이 계신 요양원에서 나 인기 스타거든. 그래서 거기 사람들이 다 우리 같이 찍은 프로그램 봤었대.”
“아, 어.”
“며칠 전에 전화로 말씀드렸어, 그때 같이 개펄 갔던 애랑 사귄다구.”
내게 자기 아버지들 보러 가는 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큰소리 땅땅 치던 이은섭은 나의 조부모가 자신을 안다는 이야기엔 쩔쩔맸다. 긴장하지 않은 척을 하고 싶은지 외려 내 등을 다독이는데 손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어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