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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회사가 그렇듯 입사한 지 몇 개월 되지도 않은 신입 사원의 의견은 곧잘 묵살당한다. 방송국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시청률과 시청자 반응에 움직이는 만큼 파일럿 프로그램 신세를 면할 수 있다는 알량한 희망만으로, 머지않은 개편 시기에 맞춰 잘나가는 배우를 섭외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신입 사원의 고요한 외침은 묻히기 마련이었다.
“이은섭 배우님이 격주로 3주간 나올 수 있다고 했더니 윗선에서 정규 편성 가능성도 시사하시더라고요―. 너무 잘됐죠? 이렇게만 간다면 저희 내년 개편 때도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아아, 태 아나 당연히 나와야죠!”
애석하게도 나는 고요한 외침은커녕 입도 뻥긋해보지 못하고 <체험, 삶의 가치!>의 반고정 패널이 되고 말았다.
사색이 된 내가 보이지 않는지 제작진은 내 어깨를 가볍게 감싸 안으며 역시 젊은 피가 좋다, 이은섭 배우랑 케미가 그렇게 돋보일 줄 몰랐다, 둘이 나오는 신 편집이 잘된 건 우리가 잘한 게 아니라 둘이 그냥 다 한 거다…… 등등의 말을 하며 나를 띄워주었다.
도망갈 곳이 없었다. 아나운서실에서는 드디어 우리 방송국에도 스타가 나왔다는 말과 프리랜서 선언을 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 섞인 말이 동시에 흘러나왔다. 내 목표는 9시 뉴스 메인 앵커였다. 프리랜서 선언이라니, 나는 이 안정적인 직장에서 벗어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적어도 10년은 버틸 생각으로 온 건데 나를 주시하는 눈이 이렇게 많아질 줄 몰랐다. 다름 아닌 이은섭 때문에 이렇게 될 줄은 정말 예상도 하지 못했고.
심란한 마음이 표정에 드러날까 걱정돼 괜히 핸드폰이나 확인하던 나는 까만 액정 위에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 황급히 핸드폰을 엎어버렸다.
이은섭
앞으로 방송 같이 해야 하는데 한 번 보죠
언제가 편해요? 어디에서 살아요?
우리 둘 다 얼굴이 너무 알려졌으니까 개인적인 공간에서 봐요 11:00
이은섭
물론 태 아나보다야 내가 훨씬 유명하지만ㅋㅋ
답장 왜 안 해요^^?
나 바쁜 몸인 거 알긴 하는 거죠? 11:01
뭔 놈의 메시지를 1분에 세 개씩 보내는지, 무슨 중요한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메신저에 들어갔다가 메시지 폭격을 맞은 나는 어쩌면 보너스도 받을지 모르겠다며 희망에 가득 찬 제작진을 뒤로하고 답신을 보냈다.
사시는 동네 말해주시면 제가 그쪽으로 가겠습니다 11:10
이은섭
나 바쁜 사람인데 답이 왜 이렇게 늦어요? 11:10
순간 욱해서 책상을 칠 뻔했다. 바쁘다는 새끼가 왜 1분도 안 지나서 바로 답을 하는 건데요……. 말이 안 되잖아요, 이은섭 씨……!
화기애애한 회의실 분위기와 상반된 메시지를 보내자 이은섭에게는 어김없이 빠르게 답신이 왔다.
바쁘시다는 분이 답이 참 빠르신 것 같아요 11:11
이은섭
태 아나한테만 빠른 건뎅 11:11
진짜로.
XX동에서 만나요. 혹시 자고 가게 될지도 모르니까 잠옷 챙겨 오시면 좋겠네요^^11:12
“태 아나.”
“네?”
“어디 아픈 거 아냐? 얼굴이 빨간데. 가서 쉬어요, 오늘 회의 끝났으니까.”
“……네, 그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꼬리를 살랑거리는 늑대 이모티콘까지 확인하고서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짜증 나, 다 짜증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