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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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엉덩이 사이가 간지럽길래 고개를 뒤로 돌려 확인한 나는 잠이 다 깰 정도로 크게 웃었다. 길고 풍성한 늑대 꼬리가 내 엉덩이 사이에서 세차게 흔들리는 게 우습고도 기뻐서 좀처럼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 * *
한 해의 마지막을 할아버지 할머니와 잠깐이라도 함께하고파 요양원으로 향했다. 두 분은 이은섭은 어디 있느냐며 두리번거렸으나, 오늘은 애석하게도 나 혼자였다.
「오늘 진짜 중요한 일이 있어서. 내일은 갈 수 있어, 내일 또 가도 되지?」
「잠깐도 안 돼?」
「아, 그…… 미안. 내일은 종일 가능하니까 내일 꼭 같이 가자.」
열애 및 결혼 소식을 알리는 기사 사진을 찍기 전까지는 일정이 빠듯하다는 소리에 아쉬운 티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워낙에 인기도 많고 바쁘니 네가 이해하라고 했지만, 이은섭을 좋아하는 마음이 커지면서 그게 잘되지 않았다.
“아이구, 은섭이가 그렇게 좋아?”
“그런 거 아니에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내도록 핸드폰만 보잖아. 내 새끼가 벌써 이만큼이나 커서 결혼을 다 하고.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런 말 하지 마요, 할머니.”
“그래, 증손주 볼 때까지 살아야지! 나는 500살까지 살 거다. 영도 너보다 이 할애비가 더 오래 살다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조부모는 내 결혼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날로 건강해지고 있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전부 이은섭 덕분이었다.
손주사위를 볼 수 있게 얼른 새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내일 아침 일찍 오겠다고 말하고서 집으로 향했다.
저번 달까지만 해도 내가 살던 오피스텔과 이은섭의 집을 오가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이은섭이 분리불안이 있는 강아지처럼 굴기 시작해서 아예 모든 살림을 이은섭의 집에 옮기고 내가 살던 집은 계약 기간이 좀 남아 있었으나 바로 빼버렸다. 위약금 200을 내고 나자 내가 갈 곳은 정말 이은섭의 집밖에는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꺼울 정도로 좋았다.
“오늘 무슨 일이 있길래 그러지?”
일주일 전부터 31일만을 고대하던 이은섭이 해가 뜨자마자 집을 후다닥 나간 게 영 이상했다. 학창 시절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이은섭은 좀 종잡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그것도 매력적이긴 하지만.
아, 진짜 콩깍지가 씌어도 이렇게 단단히 쓰일 수가 있구나. 요양원에 다녀온 후 내가 한 거라곤 커다란 침대에 누워 이은섭의 매력을 손으로 꼽아본 것뿐이었다. 놀라울 정도로 이은섭의 생각만 하는 내가 이제는 신기함을 넘어 질릴 지경이었다.
이은섭도 가끔 이렇게 내 생각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려나? 종종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잠깐 눈 좀 붙인다는 게 꼬박 네 시간을 자 버렸다.
부재중 전화 5통 : 섭♥
웬 전화를 이렇게 했지? 밤 9시가 다 되도록 집에 오지는 않고. 나는 조금 불퉁한 마음이 되어 이은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딱 세 번 신호가 간 후에 약간 다급한 듯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태영도, 나 지금 가는 중인데, 우리 11시쯤 공원에서 만나자. 아니, 어, 그러지 말고! 네가 11시에 공원 벤치에 앉아 있으면 내가 갈게. 그게 좀 더 자연스러워 보이겠다.
“……알았어.”
오로지 사진 찍히는 데만 관심이 있어 보이는 듯한 목소리에 속이 상했다. 오늘 할머니 할아버지랑 잘 만나고 왔냐고 한마디만 더 했어도 내 속이 이렇게 상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따 사진만 찍고 나면 뭐라고 한마디 해야겠어.”
아주 티끌만 한 의심과 서운함도 쌓이지 않게 하기로 서로 약속했으니까. 오늘은 중요한 날이니 화는 내지 말자고 다짐하며 목욕재계를 하고 나자 열 시 반이었다. 이은섭에게는 문자 한 통이 없었다.
진짜 화 많이 낼 거야. 한마디만 하겠다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투덜거리면서도 착실히 이은섭과 열애설 사진을 찍히기 위해 가는 내가 우스웠으나, 이은섭이 얄밉기는 해도 전혀 싫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날이 많이 추워 이은섭 몫의 목도리와 모자, 장갑까지 가방에 챙겨서 집을 나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이은섭과 커플로 산 아이템이어서 좀 민망했다. 오늘 이은섭이 나랑 똑같이 입고 나가면 사진에 너무 유난스러운 커플처럼 나오지 않을까? 걱정스러워서 이은섭에게 옷차림을 물어보았다.
오늘 어떻게 입고 갔어? 23:10
섭♥
이뿌게 23:12
^^..... 어떤 거 입고 갔는데? 23:12
섭♥
네가 좋아하는 갈색 코트랑 구두 23:12
거의 다 왔어! 23:13
날도 추운데 코트에 구두라니. 연예인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나는 털모자에 어그부츠, 장갑까지 단단히 챙겨 롱패딩으로 마무리한 내 코디를 쭉 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사진도 찍히는 날인데 내가 너무 생각 없이 입고 나온 것 같아 지금이라도 집에 가서 갈아입고 올까도 했지만, 그러면 이 추운 날씨에 이은섭이 멀뚱멀뚱 기다릴 것 같았다.
사람들이 신경 쓰는 건 내가 아니라 이은섭일 테니까 그냥 기다리자. 얼른 사진 찍히고 귀가해서 미리 사놓은 케이크를 자르고 싶었다. 나이가 바뀌는 순간을 앞으로는 매해 같이 맞겠지만, 올해는 유독 특별한 게 사실이니까.
부츠 앞코로 무른 땅을 동그랗게 파던 나는 헉헉거리는 소리에 놀라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일찍, 오려고 했는데, 하아―. 꽃다발 갖고 오느라 좀 늦었다. 미안.”
눈앞에 보이는 건 상기된 얼굴로 자기 상체만 한 꽃다발을 들고 있는 이은섭이었다.
순간 말문이 막혔다. 총천연색의 꽃이 한 무더기로 내 품에 안기는 순간 나는 생생하다 못해 새파랗게 느껴지는 향기에 눈을 감고 말았다. 이렇게 커다란 꽃다발은 살면서 처음 봤다. 그리고 이렇게 예쁜 꽃다발도, 처음이었다.
“우와…….”
“마음에 들어?”
“당연히…… 당연히 마음에 들지. 너무 예쁘다, 이거 사 오느라 늦은 거야?”
“야, 가오 죽게.”
이은섭은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웃었다. 날이 추워서 볼이며 코끝이 빨개서 그 웃음이 더 소년처럼 느껴졌다.
“나 너 따라서 한국대 가려고 원예과 갔잖아.”

পহুৰ লগত নাচিব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