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그 프로그램 들어갈 거라니까요.”
“미쳤어?! 지금 그 방송국 보이콧을 해도 부족할 마당에, 그 개좆같은 프로그램에 들어가겠다고? 네가 뭐가 부족해서, 이은섭을 내가 어떻게 키웠는데!”
“아오, 키우긴 뭘 키워요. 그 프로그램 못 들어가게 하면 저 이번 재계약 안 할 테니까 잘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일만 하다 태영도는 언제 만나지. 서른을 목전에 두고 조바심이 일던 내게 고민을 해결해줄 만한 프로그램이 들어왔다. 대표 말마따나 내 커리어에 절대 도움이 될 프로그램은 아니었다.
<체험, 삶의 가치!>라니. 가제라고는 적혀 있지만 대체로 이런 프로그램의 경우 가제 그대로 가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보통 내게 오는 예능 프로그램은 회사 선에서 걸러주곤 했는데 어떻게 내게 들어왔는지 아직도 의문이다.
동태눈깔로 노동의 가치를 경험하고 시청자들에게 노동의 숭고함을 보여주겠노라고 되도 않는 소리를 하는 기획안을 보다가 눈이 확 뜨인 건 출연진 파트에서였다.
고정 출연 태영도. 그것만으로도 그 프로그램을 할 이유는 충분했다.
* * *
“일현아, 좀 세게 밟아봐.”
“언제나 안전 운전을 해야죠, 오빠. 가만히 앉아 계세요, 짱나게 하지 마시고요.”
“도착을 해야 내가 가만히 있지!!”
재계약을 안 하겠다는 말의 타격이 크긴 했는지 대표는 아주 죽상을 하고서는 ‘이 프로그램 하는 대신에 돈 되는 영화 하나 들어가는 거다.’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그 순간에도 돈 되는 영화라면 로맨스일 텐데, 그건 좀 들어가기 곤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곧 우리 영도랑 사귀게 될 텐데…… 영도가 내게 실망하면 대표가 책임져줄 것도 아니고.
신나게 헛바람을 들이켜며 촬영 장소에 도착한 나는 좀처럼 들어가지 못하고 문고리만 잡고 머뭇거렸다. 태영도가 와 있으면 어떡하지? 안 와 있으면 그건 그것대로 김빠지겠지만 있으면 그 애 앞에서 바보짓을 할 게 분명했다. 나는 항상 네 앞에서 뚝딱거렸으니까.
“이럴 거면 왜 닦달을 한 거예요……?”
“잠깐만 기다려봐.”
“빨리 들어가요. 저 회사에서 온 전화 받고 올게요.”
“야, 일현아, 야……!”
매니저가 아니었다면 아마 문 앞에서 혼자 고사를 지냈을 거다.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기만 하던 나는 매니저가 벌컥 문을 연 덕에 회의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 오셨네요! 깜짝 출연진, 이은섭 배우님이십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들어가자마자 보인 건 눈이 동그래져서는 나를 보았다가, 다시 테이블로 시선을 내리는 너였다.
나는 지은 죄도 없는데 네가 부산스럽게 구는 걸 보고 너와 비슷한 행동을 했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인사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오랜만에 본다, 얼굴 좋아졌네, 하나도 변한 거 없다, 앞으로 자주 볼 텐데…….
“저기요.”
“네?”
“번호…… 좀 주세요.”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온 건 번호 좀 달라는 말이었다. 10년 전보다 키가 큰 덕에 나는 너를 조금 더 내려다볼 수 있었으나 네 말 한마디에 나는 곧장 작아졌다.
“아, 버, 번호 있어서요.”
“아…….”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도망치듯 문밖으로 나가는 너를 잡으려다가 급하게 굴어 일을 그르칠까 봐 주먹을 꽉 쥐었다.
이번에는 너를 놓칠 생각이 없다. 도망치게 둘 생각도 역시.(다음 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