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이거 먹을래?”
“그게 뭔데.”
“우리 할머니가 해준 보늬밤. 엄청 맛있어.”
보늬밤인지 뭔지, 가방에서 조그마한 반찬통 같은 걸 꺼내서는 선뜻 건네는 태영도를 빤히 보다가 뭘 그렇게 쳐다보냐고 정색을 하길래 얼른 밤 한 알을 집어먹었다. 태영도가 자랑하고 싶을 정도로 맛이 있긴 했다.
맛있는 걸 같이 먹고 싶어 하는 태영도. 나는 태영도가 귀여울 뿐만 아니라 착하기까지 하니 내가 관심이 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태영도는 정말 모범생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탈선을 해본 적 없을 것 같은 순한 얼굴에 실제로 수업 시간에는 잠시도 엎드리는 법이 없고, 다른 애들은 자습 시간을 줘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는데 태영도만은 꿋꿋이 문제집을 들여다보곤 했다.
나는 그런 태영도의 옆에서 나도 그 애처럼 해볼까, 싶어졌다. 태영도는 내게 딱 필요한 만큼의 친절만 베풀었다. 펜이 없으면 빌려주고 맛있는 게 있으면 나눠 먹는 정도. 나도 태영도를 따라서 그 정도의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려고 했는데, 실은 그게 잘되지 않아서 좀 치댄 것도 같았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귀여워서 한 번, 두 번, 계속 건드리고 싶어졌다.
그러면서도 나는 태영도를 향한 내 마음을 어떻게 정의하면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야자 계속 할 거냐.”
“응. 왜?”
“그냥. 재미없어서. 차라리 학원 다니면 강사가 떠드는 거 듣기라도 하는데.”
“……나는 그냥 혼자 공부하는 게 좋아서.”
그래서 나는 태영도를 따라서 야자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하도 공부를 못하니 태영도는 내 전담 야자 선생님처럼 굴었다.
그러다 하루는 태영도가 너도 학원에 다니는 게 낫지 않느냐고 물었다.
“학원으로 꺼지라고?”
당연히 말이 곱게 안 나갔다. 내 딴에는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정 짓고 싶어 하지도 않던 공부를 하느라 죽겠는데 얼어죽을, 학원은 무슨 학원?
되는대로 말을 뱉자 태영도는 버스 정류장에서 한동안 말을 안 하다가 버스에 오르기 전 나를 돌아보고 손을 흔들 뿐이었다.
기분이 나빴다. 태영도랑 야자를 하며 좀 친해져서 버스에 타면 내도록 문자를 하다가 잤는데 그날은 내게 메시지 한 통이 없었다.
나쁜 새끼. 착하게 봤는데 내가 잘해주니까 우습게 보고, 존나 그렇게 안 봤는데 진짜…….
“아오, 아오!!”
“은섭아, 잠깐 아빠 들어가도 될까?”
침대에 누워 한 시간 내내 태영도 생각만 하며 메시지를 보낼까 말까 구차하게 구는 내가 싫어 침대를 내리치고 있을 때 아빠가 방에 왔다.
“밤늦게 씨팔저팔 하는 거 누구한테 배웠어, 우리 은섭이.”
“……죄송합니다.”
“친구 때문에 그래? 한창 그럴 나이이긴 하지.”
원래도 나를 낳아준 아빠와는 시시콜콜한 걸 많이 얘기하는 편이었다. 한 달이 넘도록 태영도 얘기를 안 한 게 오히려 예외에 속했다.
나는 아빠가 무언가를 더 캐묻기도 전에 태영도에 대해 운을 떼었다. 솔직히 이런 얘기를 할 친구도 없어 답답하던 차였다.
“짝이 바뀌었는데, 걔가 우리 반 반장이거든? 되게 좀 귀여워.”
“응, 그래?”
“응. 근데 걔 때문에 요즘 야자 한다고 집에 늦게 오는 건데, 내가 공부를 해본 적이 없으니까 재미가 없잖아. 그래서 야자 재미없어서 차라리 학원이 낫겠다고 했어.”
“그랬어? 그랬더니 그 친구가 뭐라고 했길래 은섭이가 이렇게 화가 났을까?”
“나는 그냥 한 말인데…… 걔가 오늘 나보고 막, 학원 가라고 그러는 거야. 아빠는 이해가 돼? 나는 그래서 걔한테 학원으로 꺼지라는 거냐고 물어봤더니 아무 말도 안 하고 집에 가는 거야. 그래서, 아, 진짜…….”
말이 하나도 정리가 안 되어서 아마 아빠가 ‘잡생각 하지 말고 잠이나 자라.’고 할 줄 알았으나, 아빠는 곰곰 생각하더니 전혀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부분을 짚었다.
“그 친구가 학원 갈 사정이 안 되어서 야자를 하는 거라고는 생각 안 해봤구나.”
“걔가? 아냐, 태영도 항상…….”
나는 잠시 태영도를 생각했다. 태영도와 가난은 어울리지 않았다. 항상 말끔하고, 좋은 냄새가 나는 데다 웃을 때 꺄르르 소리가 날 것처럼 눈을 꼭 감고 웃는 태영도.
그러나 태영도가 가지고 다니는 필통이나 가방, 운동화 따위를 나는 한 번도 부럽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은섭아.”
“네.”
“아빠는 가난해봐서, 그 친구 마음을 알 것 같아.”
“…….”
“오늘은 은섭이가 먼저 내일 보자고 메시지 보내자. 그리고 더 친해지면 집에도 데리고 와, 나도 네가 친구 데리고 오는 것 좀 보자.”
나는 아빠가 나가고 난 다음 어차피 태영도가 내게 답신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그러면서도 메시지를 보내긴 했지만. 하지만 예상과 달리 태영도는 아주 칼답을 보냈다.
내일 보자-_- 22:50
이은섭
응! 잘 자 은섭~ 22:51
태영도는 집에 가자마자 잔다고 했는데.
내게서 메시지가 올 때까지 기다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했는데, 다음 날 아침 나는 또 몽정했다. 씨발. 나한테 첫사랑이 생겼다.
* * *
어렸을 때부터 갖고 싶은 걸 가지지 못한 적은 없었다. 부족함이 무엇인지 모르고 컸고, 그렇기에 오히려 태영도의 마음을 어떻게 얻으면 좋을지 감이 안 잡혔다. 노력하지 않아도 원하는 걸 가질 수 있었지만 태영도는 물건이 아니지 않은가.
“애들이 봐요.”
“이은섭이 방에 들어가라. 은조도 들어가서 공부하고.”
“우리가 들어가면 되는 걸 왜 애들한테…….”
게다가 나고 자라며 본 게 애틋 그 자체인 부부인지라 나도 누군가와 연애를 한다면 아빠들 같은 이상적인 사이가 되기를 원했다.
결혼한 지 20년이나 됐으면서도 여전히 서로에게 계속 닿고 싶어 하는 아빠들에게 조언을 좀 구할까 싶기도 했으나, 이건 내가 먼저 헤쳐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나는 우선 늑대 아빠가 하는 짓을 따라 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