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섭에게서 온 메시지를 끝으로 잡지사 직원들과 제작진에게 바삐 인사를 하고서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미리 밴에 타 있던 이은섭은 내가 차 앞으로 가자마자 문을 홱 열고는 잘 정리된 자리에 앉혔다. 낮에 보았던 매니저가 ‘아주 유난유난 개유난을 떠는구나.’라는 표정을 짓는 게 룸미러로 다 보여서 황급히 이은섭의 손을 떼어냈다.
다행히 이은섭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싱글벙글 신난 티를 냈다. 아까 전 인터뷰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거겠지. 솔직히 나도 이은섭과 인터뷰를 하면서 계속 간질거렸으니까.
“배 안 고파? 이따 우리 집 가서 야식 먹자.”
“오빠 관리 안 해요? 아까 회사에서 연락 왔는데 대본 몇 개 들어왔다고 했어요. 대표님이 오빠 쉬는 꼴 더는 못 보겠다던데.”
“일현아. 내가 내일 당장 작품에 들어가니? 그리고 대표님은 내가 그간 벌어다 준 돈이 얼마인데 나를 또 굴리려고 드냐? 무시해. 너한테 뭐라고 하면 내가 알아서 커버칠게. 오빠가 용돈 줄 테니까 일현이 너도 뭐 알아서 집에서 시켜 먹어.”
“넵!”
“영도야, 우린 뭐 먹을까? 아까 내가 말한 피자 시킬까?”
이은섭은 자기 차기작이 나와 하는 이 프로그램이라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니지만, 소속사 입장에서는 그게 영 마뜩잖을 만했다. 이게 무슨 경력이 되는 프로그램도 아니고, 이미지 소비만 들입다 되는데 좋아할 리가. 물론 이은섭이 그간 쌓아온 이미지가 있으니 당장 이은섭을 찾는 작품이 단번에 끊기지는 않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좋을 게 없었다.
“나 앞에 두고 무슨 생각해!”
“어? 아니…… 너 작품 어떤 거 찍을지 궁금해서.”
“궁금해? 일현아! 너 지금 갖고 있는 대본 있어?”
“드릴까요? 태 아나운서님도 한번 보고 골라보세요. 은섭 오빠한테는 워낙 괜찮은 대본만 들어오는 편이라 아마 재밌으실 거예요.”
“나 네가 골라주는 거 들어갈게. 이따 집에서 같이 보자.”
점심시간에 쉴 때처럼 나를 자기 무릎에 앉힐 기세인 이은섭에게 딱밤을 먹이고서 손등에 가볍게 입술을 묻었다.
“매니저님 계시잖아. 집 도착하면 계속 같이 있을 건데 왜 그래.”
“아, 진짜……. 니가 이러니까 내가, 아오, 말을 말자.”
“내가 뭘 어쨌다고.”
“너 연애 안 해봤다고 한 거 거짓말이지. 솔직히 말해.”
“연애 안 해본 게 아니라 못 해봤어. 나 좋다는 사람이 없었는데.”
“눈깔이 삐었나 보다, 전부 다.”
“으앗, 야!”
매니저가 있으니 작작 하라는 내 말을 귓등으로도 안 들었는지 이은섭은 답삭 나를 끌어안았다. 숨 막힐 정도로 세게 끌어안아서 캑캑거리는데도 봐주질 않았다.
“하지만 은섭이는 눈깔이 안 삐어서 10년 전부터 영도한테 침 발라놨지.”
그러더니만 볼을 아주 쭉쭉 빨 기세로 뽀뽀를 해대기에 애써서 이은섭의 얼굴을 밀었다. 그래봤자 매니저가 룸미러로 ‘모쏠들은 뭔가 다르긴 하다.’라는 눈으로 보는 걸 피할 수는 없었지만.
매니저가 힐끔거리는 걸 애써 무시하다 보니 어느새 이은섭의 집이었다. 이은섭은 오늘 고생했으니 맛있는 거라도 먹으라며 대뜸 매니저에게 10만 원을 쥐여주고는 잽싸게 차에서 내렸다. 발까지 동동 구르게 생긴 이은섭을 보고 매니저는 와하하,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오빠! 그렇게 가라고, 가라고 눈치 안 줘도 저 갈 거거든요? 태영도 아나운서님, 나중에 또 봬요.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영도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꼭 우리 결혼한 것 같다…….”
“……빨리 들어가, 헛소리하지 말고.”
“헛소리하는 나를 잡아줄 건 태영도밖에 없어. 으응―.”
정식으로 사귀지도 않는데 이미 매니저에게는 나를 애인으로 소개한 모양이었다. 매니저가 즐거운 밤 되라고 차창 밖으로 손까지 홰홰 흔들어주는 걸 보니.
할 말이 많지만 이제는 밖에서도 엉겨 붙는 이은섭 때문에 주차장에 오래 있을 수가 없었다.
“은섭아, 잠깐만 떨어져봐. 누가 보면 어떡해. 집 가서 씻고 얘기 좀 하자.”
“누가 보면? 오복 중 하나지.”
“웃기지 좀 마…….”
우리 사이를 들키는 게 오복 중 하나라니. 웃음이 터질 뻔해서 이은섭의 집에 도착할 때까지 괜히 입을 가리고 헛기침하는 척만 열심히 했다.
엘리베이터에 사람이 없다고 또 안으려 드는 이은섭의 허벅지를 찰싹 때리고서 그 애의 집에 들어갔다. 그러곤 이은섭이 나를 안을 새도 주지 않고 내가 먼저 그 애의 허리를 안았다.
“집에 오면 내가 먼저 안아주려고 했는데 왜 조금도 못 참냐?”
“어떻게 참아…… 10년 참았으면 많이 참았지.”
그렇게 치대더니 막상 내가 먼저 들이대자 이은섭은 뻣뻣하게 굳었다. 가슴팍에서 좋은 향기가 나서 킁킁거리자 그제야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 웅얼웅얼, 옹알이하듯 말하는 이은섭에게 반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거라 생각하며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좋아, 영도야…….”
“응…… 나도.”
“나 너한테 애인 있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원형 탈모 올 뻔했어.”
“하하! 애인은 무슨. 아무도 못 만났어. 너무 바쁘기도 하고, 진짜 나 좋다는 사람이 없기도 했고.”
“네가 눈치가 없어서 못 알아챈 거지 주변에 많았어.”
“많았다고? 언제?”
“……우선 씻자.”
끌어안고서 좌우로 몸을 가볍게 흔들며 말을 하는 사이사이 뽀뽀를 해대던 이은섭은 내 주변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 얼버무렸다. 잘 모르겠지만 이은섭이 뭘 알든 간에 아마 나는 모르는 부분일 것 같았다. 고등학생 때도 그렇고, 대학생 때도 나 좋다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어차피 지나간 일이 궁금하지도 않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도록 생각한 사람은 이은섭 하나라 별 신경 쓰지 않고 이은섭이 미는 대로 욕실에 들어갔다. 클 게 분명한 트렁크 팬티와 이은섭에게도 클 것 같은 하얀 반팔티. 대충 몸에 대고서 거울에 비춰보니 그런대로 잘 맞을 것 같았다.
“아이고……. 힘들다.”
원래는 오늘 바로 집에 갔다가 내일 아침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계신 요양원에 들르려고 했는데. 요즘 이은섭 덕분에 매일 들뜬 상태라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소홀해진 게 사실이었다. 아무리 바빠도 주말에는 잠깐이나마 들렀었는데 내일 가는 건 좀 힘들 것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정작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이제 본인들 신경 쓰지 말고 내 인생을 살라고 하셨지만.
아무래도 내일 점심까지 먹고 난 후에 양로원에 한 번 들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은섭이 또 서운해할 수도 있으니까 얼른 말해줘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서둘러 욕실에서 나온 나는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는지 버티고 서 있는 이은섭의 가슴팍에 머리를 박았다. 이은섭은 내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나를 달랑 안아 올렸다.
“우리 할 얘기 많지? 오늘 밤새도록 해명쇼 펼쳐봐, 영도야.”
물론 양로원에 가기 전에 이은섭에게 제대로 고백하는 게 먼저였다.
아마 이은섭은 뭘 그런 것 갖고 10년 전에 자기를 찬 거냐고 물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이유를 알고 난 후에 나를 이해할 수도 있고. 나는 이은섭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와는 별개로 그때 일에 대해 사과를 하고 싶었다. 내가 너무 어려 그런 식으로밖에 말을 하지 못했노라고,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탑탑탑―, 이은섭이 걸어갈 때마다 귀여운 소리가 났다. 다급함이 느껴져 입을 가리고 웃자 이은섭은 나를 침대에 던질 듯이 팔을 뻗었다가 이내 그냥 바로 자기 무릎에 앉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