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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숨 자고 일어나니 촬영지였다. 새벽 일찍부터 출발했는데 도착하고 나니 늦은 아침이 되어 있어서 촬영지와 서울과의 거리가 실감났다.
“자, 우선 배우님이랑 아나운서분 작업복으로 환복부터 하고 오시면 됩니다. 따로 탈의실이 있는 건 아니라 차에서 갈아입으시거나 아니면 바위 뒤에서 갈아입으시면 될 것 같아요.”
깡촌도 아니고 깡깡촌에 온 만큼 어느 정도 예감은 했으나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열악한 곳이었다. 배를 타지 않아도 되는 곳이라고, 걱정 말라더니만 차로 올 수 있는 가장 깡촌에 데리고 올 줄이야.
탈의실이 따로 없다는 말을 듣고 나는 서둘러 차로 향했다. 그래도 나는 버스를 타고 왔으니 옷은 조금 편하게 갈아입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얼른 옷 갈아입고 촬영도 빨리 끝내버려야지. 바지락들아, 죽을 준비 해라. 결의를 다지며 버스로 가던 나는 어딘가에 옷자락이 걸려 뒤를 돌아봤다. 허허벌판에 옷자락이 걸릴 리 없었고, 나를 붙잡은 건 이은섭의 매니저였다.
“무슨 일이신지요?”
“안녕하세요, 이은섭 배우 매니저입니다. 그, 저희 배우님이 좀 커서, 옷을 벗고 어쩌고 하기에 차가 좀 좁아서요…….”
“저 차가 좁다고요?”
“아, 예……. 좁다시네요…….”
어린 매니저의 얼굴에는 짜증이 가득 묻어 있었다. 이은섭이 뭐라고 했나? 매니저가 가리키는 차는 옷을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입어도 될 정도로 컸다.
불편한데 나보고 뭐 어쩌라는 거냐는 식으로 쳐다보자 매니저는 한숨을 크게 내쉬고는 고개를 조아렸다.
“정말 죄송한데, 혹시 방송국 버스에서 환복할 수 없을까요? 진짜 죄송합니다, 이 촬영 끝나고 광고 촬영이 잡혀 있어서요. 빨리 녹화 끝내고 가야 하는 상황이라…….”
“아, 이은섭이, 아니, 이은섭 씨가 그렇게 해달라고 하신 건가요?”
“절대 이은섭 배우님이 그런 요구하신 건 아니고요! 아무래도 배우님 얼굴을 사람들이 다 알다 보니 밖에서 환복하는 건 불가해서요. 궁여지책으로 제가 생각한 건데 불쾌하시다면 어쩔 수 없죠…….”
어쩔 수 없다는 말을 하는 여자의 표정이 진짜 곤란해 보여서 나는 내 뒤에 포진해 있는 제작진과 먼발치에 등대처럼 서 있는 이은섭을 번갈아 봤다.
“하아……. 그러면, 버스에서 같이 갈아입으면 될 것 같습니다. 죄송해하실 필요 없어요.”
“정말요? 아, 진짜 감사합니다. 은섭 배우님!! 허락받았어요!!”
“허락……?”
분명히 매니저가 궁여지책으로 생각해낸 거라고 했는데, 어째 이은섭이 버스를 향해 달려오는 폼이 긍정의 답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던 사람 같아 의아했다.
누가 뒤에서 쫓아오기라도 하는지 잽싸게 달려온 이은섭은 은근히 저를 노려보는 눈치인 매니저를 무시하고 내게 가볍게 묵례했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이따 광고 촬영도 하신다면서요? 얼른 가서 환복하세요.”
“태영도, 아나운서님도 같이 환복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네?”
최대한 눈을 안 마주치려 애매하게 미간, 코끝을 보며 말하던 나는 같이 환복하자는 말에 놀라 이은섭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은섭은 뭘 놀라냐는 듯 어깨를 가볍게 으쓱이고선 뒤편에 촬영 장비를 즐비하게 늘어놓고 있는 제작진을 가리켰다.
“다들 스탠바이 하고 있는데 환복이라도 빨리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아, 음…… 그냥 빨리 갈아입고 나오시면 그다음에 제가 들어가서…….”
“제가 옷을 좀 늦게 갈아입는 편이라서요.”
말이 되나. 옷을 느리게 갈아입어 봤자 뭐 얼마나 걸린다고……?
도움이 필요해 이은섭의 옆에 선 매니저를 쳐다봤으나 매니저는 어색하게 웃으며 뒤로 한 발짝 멀어질 뿐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이은섭은 내 등을 밀며 버스로 나아갔다.
“같은 남자끼린데 뭐 어때요. 얼른 가시죠. 안 볼 테니까 걱정 마시고.”
어어, 하는 새에 이은섭과 단둘이 버스에 타게 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스태프들이 있건 말건 맨 뒷자리에서 환복을 했을 텐데. 걱정 말라며 나를 버스에 끌고 와서는 정작 우물쭈물거리며 저도 옷을 안 벗는 이은섭 때문에 분위기가 영 아니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말이 있으니까. 나는 비닐처럼 번들거리며 광이 나는 멜빵을 구깃구깃 쥐었다 펴며 바지부터 벗었다. 큼큼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한마디 하는 것도 잊지 않고.
“안 보신다면서요.”
“아, 네. 안 봤는데요?”
“얼른 갈아입으세요. 바쁘시다고 하셔서 같이 환복하게 된 거잖아요.”
초딩 같애. 이은섭이나 나나 이게 뭐라고 기 싸움 비슷한 걸 하고 있나, 문득 웃겨서 피식 웃음이 샜다. 웃은 걸 들키기 싫어 일부러 바스락바스락 난리를 치며 환복하고 나니 이은섭도 옷을 전부 갈아입은 후였다. 분명 나랑 같은 옷일 텐데 핏이 약간 달라서 또 웃음이 터졌다.
이딴 작업복에 장화까지 신고도 퍽 옷맵시가 사는 게 부럽기도 하고, 그 애답기도 했다. 나보다 10센티미터는 더 클 테니 저런 핏이 나오는 게 당연하지.
“옷 다 입으셨으면 이제,”
“있잖아요.”
“네?”
남색 작업복과 빨간 장화. 나랑 똑같은 옷차림을 한 이은섭에게 문 쪽을 가리키며 이제 나가자고 하려는데 이은섭이 내 손목을 잡아왔다. 예나 지금이나 너는 똑같았다.
“나 여기 나오는 거, 알면서 출연 승낙한 거예요?”
내가 무슨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할 때 들이대고,
“아뇨, 몰랐습니다.”
“그럼.”
“알았으면…… 안 나왔겠죠.”
준비 없이 상처를 받는다.
네 손안에 손목이 쥐인 채 인상을 찌푸렸다. 악력과는 어울리지 않게 덤덤한 표정으로 나를 놓아준 후 너는 밖으로 먼저 나갔고, 나도 뒤를 따라 나갔다.
“얼른 오세요―! 태 아나운서가 오프닝 멘트 하고 나면 은섭 배우님이 같이 출발, 해주시면 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나는 바위 뒤에서 갈아입을걸.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서먹함을 무릅쓰고 네 옆에서 짐짓 활기찬 체를 했다.
“첫 촬영부터 바지락 캐기라니, 혼자 왔으면 힘들었겠지만 이은섭 배우님이랑 같이 와서 걱정 안 해도 될 것 같아요. 그렇죠, 은섭 씨?”
아, 대본이 이 지경인데 아까 그냥 너 나오는 줄 알았다고 할 걸 그랬나.
대체 출연진들에게 뭘 바라는 건지 시작부터 친한 척으로 점철되어 있는 대본을 보며 막막해한 나는 이은섭의 발랄한 말투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태 아나운서님이 저한테 바지락 자루째 선물해주실 거라고 믿고 있어요!”
“큽, 네! 그럼 바지락 캐러 출발!”
“출발―!”
우리 둘 다 사회 생활 진짜 빡세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하늘로 주먹을 내질렀다. 될 대로 돼라. 바지락 너네는 죽을 준비 하고.
양파망 여러 개와 포대 자루, 호미와 목욕탕에서 쓸 법한 작은 간이 의자를 받아 든 이은섭과 나는 터덜터덜 트랙터로 향했다. 우리에게 일하는 법을 아주 짧게 알려주신 동네 슈퍼마켓 아주머니는 사실 트랙터는 방송 촬영이니 특별히 태워주는 거라고 생색을 내셨다.
나는 나이 지긋한 사람들의 그런 귀여운 허세를 좋아했다. 나의 조부모가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내 앞에서 대단한 것인 양 허세를 부리는 것 역시 짜증도 났지만 좋아하는 편에 가까웠다.
“감사합니다, 바지락 많이 캐서 어머님께도 드릴게요.”
“그래―. 근데 옆에 서 있는 총각은 티브이에서 봤거든? 근데 귀여운 총각은 누구야? 처음 보네.”
“아나운서 태영도라고 합니다. 아나운서가 된 지 얼마 안 되어서 잘 모르시는 게 당연해요.”
“잘생겼으니까 이거 방송 하고 나면 뜨겠다. 내가 뜰 애들을 딱딱 알아보거든.”
“그러려나요?”
생긴 거랑 다르게 넉살도 좋다며 살갑게 나를 띄워주시는 어르신 앞에서 배실배실 웃다가 문득 이은섭이 정말 거의 말을 안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기야, 어딜 가든 배우라고 융숭한 대접만 받아왔을 텐데 이런 깡촌에서 1일 일꾼 체험을 하려니 갑자기 현타가 왔을 수도 있지.
다행히 어르신과의 대화는 방송에 길게 나올 신은 아니었다. 대충 대화를 끝낸 후 이은섭과 나, 촬영팀 중 한 사람이 같은 트랙터에 타게 되었다. 카메라를 든 브이제이는 나를 톡톡 치며 이은섭을 턱짓했다. 그게 ‘무슨 말이라도 좀 걸어보세요.’라는 걸 모르지 않아서 운을 떼었다.
“이은섭 배우님…… 촬영하는 동안에는 그냥 은섭 씨라고 불러도 될까요?”
“네, 영도 씨.”
나는 영도 씨라고 불러도 된다고 하지 않았는데. 느닷없이 먼저 편하게 호칭을 정해버린 이은섭에게 장단을 맞추는 게 좋을 듯해서 나도 은섭 씨, 그렇게 불렀다.
“바다 말고, 이런 개펄에도 놀러 온 적 있으세요?”
“아뇨, 개펄은 처음입니다. 영도 씨는요?”
“저도 처음이에요. 사실 저는 살면서 바다에 온 게 처음이에요. 그래서인지 일하러 온 건데도 속없이 설레더라고요.”
“바다가 처음이시라고요?”
고개를 끄덕였다. 빈말로도 좋게 끝났다고는 할 수 없는 사이이지만, 이은섭과 나는 한때 누구보다 서로를 편안하게 여기던 사이였다. 대화는 물 흐르듯이 유연하게 흘렀다. 촬영을 하는 브이제이는 그 애와 내가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를 모두 담아냈다.
“기억도 안 나는 갓난아기 시절에는 가 봤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 기억에 한해서는 바다에 간 적이 없어요. 여행을 갈 여유 같은 게 없었거든요.”
“……개펄은 바다라고 할 수 없으니까, 다음 촬영지는 제대로 된 바다였으면 좋겠네요. 생선잡이 배 타도 재밌겠다. 아, 근데 영도 씨 멀미하지 않으세요?”
“네?”
“멀미, 하셨던 것 같은데.”
“…….”
“…….”
“아, 그쵸. 제가 멀미를 좀 하는 편이죠. 아까 차에서 보셨나 봐요.”
멀미는, 예전에 몸이 안 좋았던 날 네가 나를 데려다주느라 함께 탔던 버스에서 딱 한 번 한 게 전부였다.
이은섭이 무슨 생각으로 케케묵은 옛날 기억을 꺼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내가 문제였다. 그런 말 한마디에 화면에 붉어진 얼굴이 나갈까 걱정스러워하는 내 처지가 한심하고 우스웠다.
멀미 발언 이후로 딱히 할 말이 없어 곤란할 뻔했는데 트랙터의 탈탈거리는 엔진 소리가 때마침 멈췄다.
“내리시면 됩니다!”
“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미리 챙겨놓은 짐을 바리바리 챙겨서 트랙터에서 내려왔다. 미리 도착한 약소한 규모의 촬영진이 우리를 둘러쌌다. 그리고 이은섭과 나는 별말 없이 바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문제는 내가 바지락을 캐는 데 썩 재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배운 대로 개펄을 호미로 탁탁 쳐서 바지락을 골라내야 하는데 내가 치는 곳마다 바지락인 척하는 돌멩이밖에 없었다. 그에 비해 이은섭은 프로처럼 탁탁, 착, 소리를 내며 바지락을 양파망에 담기 바빴다.
오프닝 멘트에서 내가 바지락을 자루 가득 채우겠다고 호언장담했는데. 대본이긴 하지만, 그리고 나는 여기에 딱히 오고 싶지도 않았지만 이은섭이 하도 열심히 하니 나도 대충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나답지 않게 투지를 불태운 게 실수였다.
“으앗!”
“아니…… 뭘 했다고 넘어지셨어요?”
“……보기만 하지 말고 좀 도와주시죠.”
뒤뚱거리며 바지락을 찾아 나섰다가 채 열 걸음도 못 걷고서 나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오늘 정말 되는 일 없네. 바지락이고 뭐고 집에 가고 싶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이 주저앉은 나를 내려다보는 이은섭 때문에 더더욱.
이미 양파망을 두 개나 바지락으로 가득 채운 이은섭은 내가 좀 도와달라고 호미를 휘적거리자 피식피식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끽해야 손이나 잡아 일으켜줄 줄 알았건만, 이은섭은 아예 내 겨드랑이에 손을 끼우고서 바지락 캐듯이 번쩍 들어 올렸고,
“…….”
“저기, 너무…… 가깝지 않나요, 은섭 씨……?”
“아, 그, 그러니까 누가 넘어지래요?!”
“왜 화를 내세요…….”
나는 무참히 뽑혀 이은섭의 품에 안착했다.
운동 신경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나를 바로 떨어뜨려놓지도 못하고 씨근덕대며 그러니까 안 넘어지면 자기한테 안길 일도 없었다고 열을 내는 이은섭의 모습은 카메라에 모두 담겼다. 그리고 본방송 날, 나는 SNS 실시간 트렌드에 뜬 검색어를 보고 마른세수를 했다.
미친 이은섭
이은섭 태영도
바지락 게이
이딴 식으로 유명세를 탈 생각은 정말이지 추호도 없었는데.
실시간 트렌드가 온통 바지락과 이은섭 그리고 나로 가득 차 있었다. 아나운서가 된 후 내 목표는 9시 뉴스 앵커 자리에 앉는 거였지, 이런 식으로 필요 이상의 유명세를 떨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응디를흔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