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찮은 애와 짝이 되었다. 이름은 이은섭, 키가 큰 데다 공부에 관심도 없는 애라 내 자리는 자연스럽게 맨 뒷자리가 되었다. 교탁에서 두 번째 줄 정도가 딱 수업에 집중하기 좋은 자리였으나 짝이 된 이은섭은 공부에는 영 관심이 없어 보여서 어쩔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은섭이 앞자리에 앉으면 앞자리에 주로 앉는 범생이들이 눈치를 보느라 반 평균이 떨어질 게 분명했다.
집이 꽤 산다더라, 걔네 아빠가 에이치더블유모터스 회장이라던데, 그러니까 공부 하나도 안 하고 저렇게 학교 편하게 다니는구나…….
이은섭을 따라다니는 수식어는 부잣집 망나니 도련님이었다. 입시를 앞두고 있다고는 하나 한창 다른 애들이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하는 열아홉들은 매사 관심 없다는 듯이 대강 학교를 다니는 이은섭을 약간의 두려움과 큰 선망을 담아 바라보곤 했다. 담임이 나를 이은섭의 짝으로 점찍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영도 네가 가장 의연하고, 또 어른스러우니까. 선생님이 이렇게 부탁할게. 딱 한 학기만 은섭이 좀 옆에서 봐줄 수 있을까?」
「……네, 선생님.」
나로서는 선생님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내가 부모 없이, 조부모와 달동네 따개비 같은 집에서 산다는 걸 아는 사람은 전교에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묻지 않았기에 자연스럽게 나는 평범한 가정의 모범생 아들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내 사정을 아는 건 담임뿐이었다. 담임은 내 사정을 2학년 때 알게 된 후로 3학년 때까지 비밀을 지켜주며 전액 장학금을 탈 수 있게끔 도와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장학금이 없으면 생활이 불가능하니까 나는 이은섭을 억지로 떠맡게 되었다.
“어. 못 보던 앤데.”
열성적인 반장은 아니더라도 공지 같은 거나 오전 자습 시간은 나름대로 반장답게 행동했는데 못 보던 애라니.
3월 한 달 내내 반 애들을 눈치 보게 만들던 이은섭은 4월 1일 등교하자마자 엉, 하고 맥 빠지는 소리를 내며 불쑥 내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눈썹 산이 날렵하고, 안와가 깊었다. 이은섭이 몇 년 꿇은 복학생이라고 소문이 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도무지 열아홉으로는 안 보이는 얼굴.
“오늘부터 네 짝이고, 나는 태영도야.”
“아…… 나는 은섭이. 이은섭.”
“……아는데.”
“어, 그러냐. 담임 오면 깨워, 영도.”
햇빛을 안 받으면 고동색에 가깝고, 햇빛 아래서는 반짝이는 금색에 가까운 눈동자는 우수에 가득 차 있었다. 한 20년 전 남자 배우들처럼 분위기 있는 남자애. 부잣집 철없는 도련님 말고,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고 불우한 환경에서 서서히 침잠해가는 우울함이 더 잘 어울리는 얼굴.
담임이 오면 깨우라던 이은섭은 4월 1일 11시 40분까지 처잤다. 깨고서는 느슨하게 모로 누워 내 노트에 함부로 끼적였다.
왜 안 깨우는뎅 ㅌㅇㄷ 내일은 꼭 깨워주라-_-!
대충 고개를 끄덕이자 이은섭은 다시 엎어져 잤다. 어차피 다시 잘 거면서 왜…… 깨워달라는 거지? 이상한 애네.
이상하고 잘생긴 짝꿍
우리 반 급훈은 ‘자율 학습의 힘을 믿는다.’였다. 담임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그 가난에 깔려 주저앉는 대신 제 살길을 일찍부터 도모했다. 지지리도 가난한 집에서 막내아들로 태어나 사람을 가엾이 여길 줄 아는 선함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누나들이 불쌍했다. 거지 같은 집안에서 아들 하나 나왔다고 딸들에게 얼른 나가서 돈이나 벌어 오라고 닦달하는 부모들을 혐오한 그는 누나들의 돈 없이도 명문대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교육 하나 없이 서울 소재의 대학교로 진학했다. 물론 돈이 있었다면 더 좋은 대학에 갔겠지만, 돈이 없어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는 대학을 택했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임용고시에 합격해 고등학교 선생님이 된 자신을 과하지 않게 자찬하며 ‘너희도 할 수 있다.’라고 희망을 불어넣어주는 담임. 그러나 7시부터 시작하는 아침 자습에 오는 반 애들은 다섯 명이 채 되지 않았다. 다른 애들은 늦게까지 학원을 다니니까. 당연히 아침 자습 같은 건 관심 없겠지.
출석을 부르려다가 오늘은 아무도 오지 않은 걸 확인했다. 텅 빈 교실을 교탁에서 확인한 후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 나달나달해진 공책과 새것 같은 문제집을 펼쳤다. 문제집은 담임에게 받은 교사용 문제집이었고 나는 이면지를 엮어 만든 누더기 같은 노트에 문제집의 내용을 다 베껴 써가며 공부했다.
반 애들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담임이 가진 자격지심이 보였다. 내가 집만 좀 더 잘살았으면 더 좋은 학교에 가서 너네랑 이렇게 지지고 볶으며 살지 않아도 될 텐데. 뼛속 깊이 스며든 가난이 내 눈에는 보였다. 그리고 나는 담임을 존경하는 동시에 그처럼 맺힌 게 많은 어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꼭 성공할 거야. 남 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면서 살 거야. 이 악물고 공부해서 보란 듯이 성공할 거야.
속으로 성공하고야 말겠다고 다짐하고서 문제집을 펼쳤을 때 교실 뒷문이 열렸다.
“어?”
“넌 매일 새벽같이 오냐?”
이은섭. 내 짝이었다.
4월의 첫날 짝이 된 이은섭은 맨날 자면서 내게 매번 깨워달라고 했다. 잘사는 집의 귀한 첫째 아들이라는 소문이 맞는지 어떤 과목의 선생님도 자는 이은섭을 깨우지 않았다.
깨우는 건 나뿐이었다. 자기가 먼저 깨워달라고 해놓고서 퍽 귀찮아하던 이은섭은 일주일쯤 지나자 자기 손등을 볼펜이나 샤프로 꾹 눌러가며 잠을 참았다. 아파 보여서 그 애의 눈이 감기려고 하면 손등을 톡톡 쳐주었는데 이은섭은 그날 이후로 내게 부탁했다. 자기가 졸면 어디든 좋으니 툭툭 쳐서 깨워달라고.
“넌 잠도 없냐. 무슨 노인네처럼 일찍일찍 다니네.”
“조부모님이랑 같이 살아서. 밤에 일찍 자고 새벽에 일어나.”
“몇 시쯤 일어나는데?”
“다섯 시쯤.”
“와. 존나 힘들겠다. 난 여섯 시 반에 일어나는 것도 죽겠던데.”
아무것도 안 들었는지 이은섭의 커다랗고 까만 백팩은 책상에 올라옴과 동시에 풀썩 소리를 내며 꺼졌다. 책을 갖고 다니는 것 같지도 않은데 저렇게 큰 가방을 메는 이유가 뭘까, 싶었는데 이은섭에게는 저게 적당한 사이즈일 거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덩치가 산만 하니까 저 가방 사이즈면 학교에 갖고 다닐 용도로 딱이겠지.
내 상체를 다 가리고도 남을 가방을 몇 초간 쳐다보다가 이은섭과 눈이 마주쳤다. 이은섭은 홱, 하고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홱 고개를 내 쪽으로 돌렸다. 그게 너무 유난스러워서 나한테 무슨 화라도 나서 한마디하려는 줄 알았는데.
“반장 너는 무슨 수인이냐.”
“아…… 뱁새 수인.”
사나워 보이는 인상이 일순 편안하게 풀어졌다. 갑자기 무슨 수인이냐니. 질문이 뜬금없었지만 비밀은 아니었기에 바로 말해줬고, 이은섭은 핸드폰으로 뱁새를 검색해서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얘 맞음?”
“응.”
“너도 얘처럼 생겼다고?”
“아니, 이렇게 생기지는 않았고…… 좀 다르게 생겼지. 어떻게 다 똑같이 생기냐.”
“너도 이렇게 갈색이야?”
“이런 색에 조금 벽돌빛도 돌아.”
“아아. 반 애들도 너 뱁새 수인인 거 아냐?”
오늘따라 왜 이렇게 말이 많지. 뱁새에 포커스를 맞추고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 이은섭을 무시하기에는 좀 무서워서 하나하나 다 대답을 해줬다. 이은섭에게 우리 반에서는 너만 내가 뱁새인 걸 안다고 말하자 아, 그러냐, 하고는 자리에 엎드렸다.
“다른 애들한테는 말해주지 마라, 우습게 본다.”
“으응…… 피곤해 보이는데 좀 자. 수업 시간에 졸지 말고.”
“어, 나 이따 깨워줘.”
이은섭은 그날 내가 깨울 필요 없이 하루 종일 말똥말똥했다. 자기는 뱁새 무시하지 않는다고, 의중을 알 수 없는 낙서를 남기기까지 했다. 종잡을 수 없는 애 같았다, 내 짝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