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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갓난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옛날에 방영되었던 프로그램을 재구성한 프로그램은 방송국 내에서는 ‘저거 파일럿에서 쫑날 거야.’라고 말이 돌았다. 당연히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남의 일터에 가서 유명인이 일하는 모습으로 흥미를 끌어보겠다는 건지. 그런 건 이미 인터넷 동영상 플랫폼에서 한바탕 하고 저문 기획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는데 내가 왜 이런 회의실에 앉아 있어야 하는 걸까.
“오늘은 첫인사만 나누는 날이니까요. 첫 촬영은 다음 달 초에 잡혀 있는데 개펄에서 바지락 채취하는 게 주된 일일 것 같아요.”
개펄에 바지락. 둘 다 싫어하는 거였다. 사색이 된 나는 메모하는 척하며 다이어리에 ‘개펄 싫어 죽어버려’ 따위의 낙서를 했다.
낙서를 한다고 바뀌는 건 없었다. 나는 여전히 망할 게 분명한 파일럿 프로그램의 고정 패널 중 하나였고, 얼마나 대단한 연예인인지는 모르겠으나 나와 같이 개펄에 갈 연예인은 이 자리에 오지 않았다.
기획을 맡은 작가와 피디는 연신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아무래도 출연진 중 한 명은 오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다. 누가 오든 간에 별 상관이 없던 터라 다이어리를 접고 챙겨준 기획서 파일철을 챙겼다.
시작부터 삐걱거리고 내가 바라던 건 하나도 없지만 잘해보자. 누를 끼치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사람들이 하나둘 빠져나가는 걸 바라봤다. 고리타분한 프로그램의 막내는 누가 봐도 나였다. 선배님들의 그림자도 밟으면 안 된다고 교육을 받았으니 작가와 피디는 하늘이나 마찬가지였다.
“아, 오셨네요!”
내가 나갈 차례만 시큰둥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다가 갑자기 돌아와 다시 자리에 착석하는 사람들을 보고 문가를 바라봤다.
회의실로 들어오는 사람을 확인한 후, 나는 입을 틀어막고 자리에 그대로 엎드려야 했다.
“안녕하세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배우 이은섭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은섭이 왜, 왜 이딴 프로그램에?!
혹시 잘못 본 건 아닐까? 테이블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나는 믿기지가 않아서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리고 이내 반대편에 앉은 남자가 이은섭인 걸 확인하고 다시 굴로 들어가는 두더지처럼 고개를 박았다.
이은섭이었다. 틀림없는 이은섭. 그러나 내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지 않았다. 영화도 골라서 찍기로 유명한 배우가 이런 하급 파일럿 프로그램의 게스트로 나서다니. 전혀 생산적이지 않고, 이은섭 같은 S급 배우에게 출연료는커녕 이미지나 제대로 보전할 수 있을지, 그조차 미지수인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애꿎은 파일을 들쑤시며 왜 출연진 이름에 이은섭이 없었는지 피디와 작가 탓을 하며 입술을 잘근거렸다. 다시 확인해봐도 이은섭의 이름은 없었다. 만약에 이은섭이 출연진 중 하나인 줄 알았다면 미운털이 박히더라도 절대 안 하겠다고 했을 텐데.
“서프라이즈로 안 알려드린 마지막 출연진, 이은섭 배우님이십니다! 다들 박수로 맞아주세요!”
그런 걸 서프라이즈로 숨기면 어떡해요…….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모두 이은섭의 방문이 반가운 모양이었다. 나는 옆자리에서 어쩜 실물이 더 잘생길 수가 있느냐며 호들갑을 떠는 선배 아나운서와 제작진들의 장단에 맞추어 박수를 쳤다. 이은섭 잘생긴 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았다. 정말이지 얼굴만 봐도 박수가 나올 정도로 잘생겼다는 걸 눈이 달렸으면 모를 수 없지.
어릴 때는 더 잘생겼었다고, 괜히 그런 말이 나올 것 같아서 억지로 입을 꾹 다물고서 미소 지었다. 대학교를 다니는 내내 너를 피해 다니느라 바쁠 줄 알았는데 내게는 그럴 기회도 오지 않았다. 매 학기 성적 장학금도 놓치지 않아야 하고, 노쇠한 조부모를 대신해 생활비까지 벌어야 해서 내 학교생활은 온통 과외 알바와 중앙 도서관에서의 철야뿐이었다. 남들 한 번씩은 나가본다는 미팅이나 소개팅도 나가지 않고 취업과 돈만 좇아 살다 보니 벌써 스물아홉. 낭만이라고는 먹고 죽으려야 한 조각도 없는 젊음이었다.
그렇게 열심히 살았는데 여전히 열패감을 다 떨쳐낼 수가 없구나. 하도 바빠 같은 대학교에 다니는 이은섭의 소식도 모르고 살았다. 연예 뉴스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할 때 네가 배우가 된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은섭 배우님이 스케줄 되시는 때가 음……. 개펄 촬영할 때인데. 괜찮으세요?”
“네?!”
“아, 네. 저는 괜찮습니다.”
“우리 신입 아나운서 영도 씨랑 같이 가는 거네? 그림 좋다―.”
“태 아나도 좋은지 벌써 환호하네요.”
환호가 아니라 비명이었다. 같은 프로그램에 나오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직업 체험도 같이 하라니? 이건 내게 있어 형벌이나 다름없었다.
어버버하며 아무 말도 못 하는 나와 이은섭 둘이서 보여줄 케미를 기대한다는 헛소리나 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다이어리에 또 끼적였다. 진짜 죽고 싶다.
“자세한 촬영 내용은 오늘 드린 서류에 전부 있긴 한데, 변경 사항이 생긴다면 그런 부분은 각 출연진 매니저분들에게 메일로 전달드리겠습니다. 오늘 모두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은섭이 오기 전에 들었던 내용을 다시 한번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른 사무실 내 자리로 돌아가고 싶었다. 오늘만큼 좁다란 원룸에 가고 싶은 날이 없었다.
문제는 내가 모두가 나간 후에야 나갈 수 있는 신입 아나운서라는 점이었다.
“저기요.”
“네?”
쟤는 왜 안 나가고 회의실에 있지, 시간이 곧 금일 텐데. 회의실에 남은 사람이 없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이은섭의 눈치를 보다가 내가 먼저 나가려고 문고리를 잡았다. 그리고 이내 내 손은 커다란 손에 감싸여 자취를 감추었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익숙하고도 낯선 이은섭이 보였다.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키가 더 크는 기적이 찾아오지 않았는데 이은섭은 졸업 후에도 더 큰 모양이었다. 예전보다 고개를 조금 더 바짝 쳐들어야 시선이 맞닿을 수 있는 높이에서 이은섭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번호, 주세요.”
“아, 네, 아…… 핸드폰 주시면 드릴게요.”
“네.”
이은섭이 나한테 존댓말을 하는 건 매번 장난칠 때뿐이었는데. 기억도 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이은섭과 보냈던 시간이, 여전히 선명한 게 우스웠다. 건네받은 핸드폰에 번호를 치던 나는 이내 손에 쥐고 있던 것을 황급히 돌려줄 수밖에 없었다.
“버, 번호 저장되어 있어서요.”
‘영도’. 네게 받은 핸드폰 화면에 떠 있는 두 글자.
“아…….”
“그럼 촬영일에 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떠넘기듯 핸드폰을 돌려준 나는 도망치듯 회의실을 나왔다.
이은섭의 핸드폰에, 여전히 내 번호가 살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