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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8일 금요일은 겨울 방학식 날이었다. 수능이 끝난 시점에서 이미 출석을 신경 쓰는 학생은 많지 않았지만, 나는 반장이라는 이유와 관성적으로 행해왔던 질서 정연한 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해 새벽같이 등교하고 있었다.
이은섭도 마찬가지로 새벽같이 학교에 나왔다.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교실에 들어오면 너는 네가 두르고 있던 모포 같은 목도리를 활짝 펼쳐 내 등을 감싸주고서 정작 너는 떡볶이 코트를 아무렇게나 덮고서 엎드리곤 했다.
그러면 나는 선잠이 든 너를 말없이 지켜보다가 네 쪽을 향해 엎드려서 떡볶이 코트에 달린 단추를 매만지곤 했다. 규칙적이지 않은 패턴이 새겨진 소뿔 단추의 매끈매끈한 촉감. 그걸 만지며 나는 네게 불쑥 입 맞추고 싶어졌고, 가끔은 네가 밉다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괴로웠다.
“다들 방학 잘 보내고, 개학식 때 보자. 곧 스무 살이라고 너무 나대지 말고, 알겠지?”
“네―!”
“연락하면 술 사주실 거예요, 쌤?”
“미쳤냐…… 너네 뒤치다꺼리를 왜 나한테 시키려고 해, 인마.”
“반장이랑 같이 있어도요?”
“영도?”
매번 방학을 시작할 때는 수선스러운 분위기가 감돌긴 했으나, 고 3 마지막 방학식 분위기는 유독 더 수선스러웠다. 교실 내의 커다란 화면에서 교장이 뭐라고 떠들든 말든 저들끼리 시끄럽게 무리 지어 있던 아이들은 각자 헤어지기 전에 번호를 따야 된다며 소란스러웠다.
반에서 제일 활달하고 두루두루 반 애들과 친한 주경상은 다들 새해가 되면 술집을 빌려 반창회를 하자고 떠벌거리며 담임에게도 올 것을 권했다. 나는 가겠다고 확답을 하지도 않았는데 어쩌다 보니 필참 인원에 속해 있었고, 담임은 내 이름을 듣자 피식 웃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적당히 마신다고 약속하면. 그럼 얼굴은 비칠게.”
“아아―! 쌤이 무슨 연예인이에요?”
“새끼들이, 너네가 오라고 해놓고선 갑자기 왜 날 이상한 사람 취급해? 별 이상한 놈들을 다 보겠네. 우리 반에 정상은 태영도밖에 없다.”
“영도 편애 좀 그만하시라고요!”
“맞아, 영도밖에 몰라!”
아닌 척해도 헤어지는 게 서운한지 담임에게로 우르르 몰려가 영도만 예뻐하는 게 어디 있냐고 아우성인 애들을 멀찍이서 보는데 책상 밑의 손으로 부드러운 온기가 스몄다. 누구일까 생각할 거리도 아니었다. 내 손을 이렇게 잡을 사람은 이은섭 하나뿐이니까.
“나도 태영도만 편애하는데.”
“……오늘 바로 집 갈 거야?”
“네가 나 초대 안 한다고 했잖아. 집에서 존나 처울 거야. 우리 집은 바닥 반질반질해질 정도로 자주 왔으면서 한 번을 초대 안 해주냐? 존나 울 거야. 울다가 실신했다고 메시지 갈 예정이니까 핸드폰 충전이나 잘해놓고 있어.”
“집 청소를 안 해서.”
“됐어. 개서운해.”
서운하다면서 내게 더 붙어오는 이은섭을 보고 의미 없이 웃었다. 사실 웃고 싶지 않았다. 네가 한국대에 기부 입학을 하게 되었다고 순순히 말한 순간부터 나는 매일 너를 어떻게 대하면 될지 몰라 멍하니 시간을 보내곤 했다.
10억을 내면 입학할 수 있다기에 한국대 원예과를 들어가기로 한 이은섭. 만약 내게 10억이라는 돈이 생긴다면 우선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큰 병원에서 건강 검진부터 받게 할 터였다. 아프면 물파스를 바르면 된다며 내 조부모는 목감기에 걸려도 목에 물파스를 바르는 사람이었다. 내가 사는 집에는 너네 집에서처럼 좋은 향기가 나지 않았다. 곰팡이 냄새와 물파스 냄새, 제때 먹지 않은 반찬 군내 같은 불쾌한 냄새만 부유했다.
“그놈의 청소는 일 년 내내 안 하냐고.”
“해도 해도 끝이 없어서.”
“아오, 너 안 그렇게 생겨서 드러운가 보다?”
우리에게는 극복할 수 없는 차이가 있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너는 치운다고 하루 종일 부지런을 떨어도 치운 티가 안 나는 방 한 칸을 집이라고 생각하는 내 마음을 알 수 없고, 기껏 한국대에 갈 기회가 생겼는데 굳이 비인기 학과인 원예과를 선택한 너의 마음은 내가 알 수 없는 영역이다.
반 애들의 말이 맞았다. 담임은 나를 애틋하게 생각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지지리도 못살던 담임의 과거가 지금의 나니까. 내가 담임이었어도 나 같은 학생이 있다면 마음이 쓰일 게 분명했다.
“대신 너 반 애들끼리 술 먹을 때 나랑 같은 테이블 앉아야 된다.”
“……응, 알겠어.”
“대답도 존나 귀엽게 해. 어떻게 말을 웅, 알겠어, 이러냐. 귀엽게.”
하나도 귀엽지 않은 나한테 기분 좋게 치근거리는 네 눈을 보지 못하고 고개만 저었다. 나는 울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