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1 0 0
                                    

“안녕하세요, 사장님. 네, 방금 A 오피스텔 배달 담당한 사람인데요, 사고가 나서 제가 배달을 못 할 것 같아서요. 네…… 네, 음식값은 제가 배상하겠습니다. 다른 분 콜 잡아서 배달 부탁드립니다. 번거롭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네.”
무슨 매뉴얼이라도 있는 것처럼 줄줄 읊고 나서 전화를 끊은 이은섭의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영도는 은섭의 상태가 영 좋아 보이지 않아 마음이 다 조마조마했다. 제가 다친 게 아닌데도 마음이 좋지 않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전화를 끊고 난 은섭은 제 옷소매를 붙잡고 있는 영도를 한 번 보고는 그 팔을 떼어 내려 했다. 영도가 다시 붙잡지만 않았다면 그랬으리라.
“응급처치라도…… 하고 가.”
“아……. 괜찮은데.”
“하고 가!”
“아, 어.”
한 달 전부터 짝이 된 반장은 하얗고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예쁘장했다. 반 애들은 모두 반장을 좋아했고, 같은 반이 아닌 애들 역시 태영도를 좋아하는 듯했다. 얘는 무슨 수인일까. 은섭은 가끔 영도가 무슨 수인일지를 짐작해 보곤 했다. 종을 안다고 해서 뭐 특별히 할 말도 없으면서 그랬다.
내가 도망갈 것 같나? 소맷부리를 꼭 쥐고 있던 손이 이내 손을 잡아 왔다. 온몸의 세포가 다 팔딱거리는 기분이 어색해서 반대편 손으로 주먹을 한 번 꽉 쥐었다가 폈다.
형편이 썩 좋지 않은 은섭은 학교가 파하면 배달일을 하며 생계를 책임졌다. 오토바이도 탈 줄은 알았으나, 동생들이 큰 사고가 나면 어떡하냐고 반대해서 안 탔는데 오늘 같은 일을 겪고 나니 앞으로도 오토바이는 못 탈 성싶었다.
오늘은 완전 꽝이네. 쌍라이트를 켠 차가 골목길로 들어서는 것에 놀라 브레이크를 잘못 밟은 게 화근이었다. 분명 넘어졌을 때만 해도 오늘은 꽝이라는 생각에 괴로웠던 은섭은 영도를 맞닥뜨리고서 내심 놀랐다. 하마터면 “씨발!”하고 쌍욕을 할 뻔했는데 희게 질린 얼굴을 보자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쟤는 나랑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뭐 저렇게 놀라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절뚝거리며 제 옆에서 작은 보폭으로 걸음을 옮기는 영도를 따라 걸었다. 은섭이 봐온 바로 영도는 말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곁을 잘 내주지 않는 것 같기도 했다. 태영도는 반에서 누구랑 가장 친할까? 애들이 말하는 걸 들어보면 매번 일등이라던데 그러면 대학은 어디에 가려나?
전혀 생산적이지 않은 잡생각에 사로잡혀 걷는 동안 배달을 하려던 오피스텔 건물 앞에 도착했다. 은섭은 영도에 대해 골몰하느라 아르바이트가 망한 데 대한 생각은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꽝이라는 생각도, 일당을 못 벌어 큰일이라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으…… 너 이거 내일 병원 가야 돼. 안 그러면 덧나.”
“안 갈 건데.”
“왜?”
“보면 모르겠냐. 돈 없어.”
“……그러면 이거 약이라도 다 챙겨 가. 나는 필요 없으니까.”
누구를 챙겨 본 적이 없는 티가 여실히 났다. 은섭은 소독약과 연고의 설명서를 1분이 넘도록 보고서 손을 벌벌 떨며 응급처치를 하는 영도를 빤히 바라봤다. 귀엽게 생겼다. 그러곤 그런 생각을 한 자신에게 놀라 고개를 홱 돌렸다.
은섭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영도는 은섭을 조금 가엾다고 생각했다. 저는 공부하는 것도 스트레스받는다고 투덜댔는데 그게 전부 복에 겨운 소리처럼 여겨졌다. 영도는 무릎을 굽혔다 펴길 반복하며 고맙다고 하는 은섭에게 넌지시 말했다.
“여기 나랑 아는 애들이랑 과외받을 때나 가끔 오는 데야. 사는 집은 따로 있어.”
“어쩐지. 사람 사는 것 같지가 않더라.”
“너 배달일 하다가 힘들면, 애들은 여기 화수목 여섯 시부터 열 시까지만 있다가 가거든? 월요일이랑 금요일이랑 주말은 여기에서 쉬다 가도 돼.”
나름대로 위한다고 한 말이었는데 은섭에게서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영도는 뒤늦게 제가 주제넘었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영도는 미안해서, 그리고 은섭은 좀 다른 쪽으로 생각을 하느라.
“……아무도 없는 집에 어떻게 오냐.”
“응?”
“너라도…… 있으면 또 모르겠지만.”
가난하다고 가족 외의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싶은 욕구까지 거세당한 건 아니었다. 은섭도 또래들처럼 놀고 싶고, 돈 생각은 하지 않고서 이것저것 즐기고 싶었다. 다만 여건이 되지 않아 꾹꾹 모든 욕구를 눌러 참았을 뿐.
안광이 선명한 눈동자를 마주 보자 영도는 활짝 웃었다. 은섭은 내심 놀랐다.
“응! 그럼 내가 주말에 와 있으면 너도 와. 생각해 보니까 비밀번호까지는 못 알려주니까 그게 낫겠다.”
“어, 그래.”
웃으니까 더 귀여워서.
“내가 공부도 도와줄게.”
“나 공부에는 관심 없는데.”
“나랑 하면 관심 생길지도 모르잖아.”
관심은 공부가 아니라 태영도라는 인간 자체에 생길 것 같았다.
* * *
그날 이후 영도와 은섭은 꽤 친해졌다. 오피스텔에서 둘은 어쩌다 보니 주말마다 만나게 되었고, 만나서는 공부와 취미 생활을 공유했다.
“너는 가족관계가 어떻게 돼?”
“동생 셋, 아빠 둘. 아빠 둘은 하던 사업 일으키려고 지방에서 사시고 나랑 같이 사는 건 둘째 동생. 셋째랑 막내는 아빠들이랑 살고 있어.”
“아아.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랑 나.”
둘 다 사회가 규정한 정상 가족과는 은근히 거리가 멀었다. 은섭은 영도에게 처음으로 자신이 부모와 떨어져 지낸다는 것을 말할 수 있었고, 그랬기에 영도도 마음을 열고 자신은 조부모와 살고 있다는 걸 말할 수 있었다.
바닥에 누워 은섭이 갖고 온 해진 담요를 덮은 영도는 은섭의 무릎을 콕콕 찔렀다.
“왜.”
“그냥.”
“……너 무슨 수인인지 물어봐도 되냐.”
“뱁새.”
“존나 귀엽네…….”
“귀엽다고?”
“어. 좀.”
은섭은 이제 영도에 대한 호감을 숨길 여유도, 이유도 없어 틈만 나면 귀엽다고 하는 중이었다. 제가 귀엽다고 할 때마다 미세하게 붉어지는 얼굴과 싫지 않다는 듯 씰룩씰룩 올라가는 입꼬리를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뱁새, 뱁새라면 그 갈색 동글동글한 작은 새일 텐데. 잘 어울렸다. 태영도의 이미지와도 찰떡처럼 맞아떨어지고, 소동물 수인은 남자도 임신할 수 있으니까…….
“아, 씨발.”
“갑자기 씨발……?”
“나 동생 밥 챙겨 준다는 걸 까먹었네. 미안. 내일 학교에서 보자.”
“동생이 밥 혼자 못 챙겨 먹어?”

পহুৰ লগত নাচিব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