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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 날은 항상 춥다고들 하던데, 우리 때도 어김없이 추웠다. 심지어는 눈까지 왔다. 평소 같았으면 내일 폐지 주우러 가기 힘들겠다고 투덜거릴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눈도 우리 손자를 축복해주는구나, 그런 어울리지 않는 말을 했다. 나도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아서 작은 조각 케이크 위에 초 하나를 꽂고서 수능이 끝난 걸 조촐하게 축하했다.
“여보세요?”
-나 은섭이.
방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공간에 아주 작게 난 창을 통해 보스스 흩어지듯 내리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이은섭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은섭은 ‘나 은섭이’ 하고 열아홉 남자애치고는 상당히 간질거리는 소개를 하고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눈 오니까 태영도 보고 싶어.
“…….”
-……그냥 그렇다고.
그러고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나는 이은섭이 넓은 방에서 혼자 쭈구리처럼 웅크려 있을 걸 생각하니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바보야.”
-……너는 분위기 같은 것도 못 읽냐? 공부는 뒤지게 잘하는 새끼가 왜…… 됐다, 말을 말자.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무 말이 나와버려서 나도 놀랐는데 이은섭은 숨도 안 쉬고 나를 타박했다. 하여간에 너는 무드도 없는 놈이고, 너 같은 놈은 드라마나 영화라도 봐서 없는 분위기를 재주껏 충전해야 되는데 공부밖에 몰라서 그럴 시간도 없는 게 최대 단점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 싶다고 하라고, 좀!
“……보구 싶어, 은섭아.”
-갑자기 또 은섭이래…… 가증스러워, 가증스럽고, 어? 존나…… 귀여워.
너도 내가 보고 싶다고 했다.
보고 싶다고 드러내놓고 말한 건 처음이었다. 그게 어쩐지 너를 좋아한다는 말보다도 더 노골적으로 너에 대한 마음을 표하는 것 같아서 나는 이불 안에서 발가락을 꼼질거렸다. 둘 다 한동안 말없이 침 삼키는 소리만 났다. 나는 그런 분위기를 빨리 무마해보고자 얼른 주제를 돌려버렸다.
“수능 잘 봤어?”
-그냥…… 그냥 봤다. 너 가채점 해봤어? 너는 수능 안 봐도 되는 놈이 왜 봐서는 나 같은 무지렁이를 다시 한번 좌절시키냐? 변태지, 너?
“가채점 해봤는데 수학에서 한 개? 두 개인가. 그렇게 틀린 것 같고, 영어는 만점.”
-미쳤다, 진짜? 와, 너 미국인이지.
“이번에 영어 변별력 없이 나온 것 같던데.”
-영도가 그렇게 말하면 좆된 은섭이는 눈물만 뒤지게 흘리는 거지 뭐…….
장난스러운 말투에 속없이 웃다가 웃을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시험 망쳤나? 그러면 이은섭 한국대 입학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한숨만 푹, 푹 내쉬는 이은섭에게 최대한 불쾌하지 않을 방식이 뭘까 고민하다가 고작 대학 따위로 우리 사이가 변치는 않을 거라는 식의 말을 건넸다.
“나는 너 명문대생 아니어도…… 괜찮아. 그런 거는 하나도 안 중요해.”
-푸핫! 한국대 경영 가는 놈이 말은 잘하네.
“어쨌든! 너 수능 못 봤어도 괜찮아. 우리 스무 살 되면 하기로 했던 것만 생각하면서 홀가분하게 푹 자. 너 고생 많았잖아.”
올해 4월, 나랑 짝이 된 후부터 안 하던 공부를 하겠다고 골머리를 앓던 이은섭을 생각하면 한국대가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대 까짓것 못 가도 이은섭은 내게 여전히 유일한 존재였다.
-응. 근데 나 한국대 갈 거야. 너랑 같이 학교 다닐 거니까 말리지 마.
내 첫사랑.
나는 네 꿈 꿀 테니 너도 내 꿈 꾸라고 오그라드는 말을 하고서 전화를 끊은 이은섭을 생각하며 몇 번이나 되뇌었다. 내 첫사랑, 내가 살면서 처음으로 좋아해본 애, 이은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