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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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슨, 불면 날아가냐? 너 콩깍지가 너무 심한 거 아니야? 태 아나 진짜 못 쓰겠네.”
“못쓰겠는 건 그 감독이야. 배우 건강 해치면서 촬영하는 건 능력 부족이라고.”
“그건 맞아. 촬영도 어찌나 늘어지는지 너 보러 오지도 못하고.”
집 갈 시간도 없다고 투덜거리는 너를 다시 보니 얼굴에도 살이 많이 내렸다. 크랭크인 전에도 이미 충분히 마른 상태였는데 거기에서 더 빠질 데가 있었다는 게 놀라웠고 동시에 속상했다.
“밥은 잘 챙겨 먹고 있는 거지?”
“걱정 마. 밥은 잘 먹어. 먹는 것 이상으로 고생해서 문제지.”
“그래도 살이 너무 많이 빠졌는데…….”
“이 정도면 빠진 것도 아니야. 앞으로 더 빠질걸, 이제 촬영 막 시작했으니까. 촬영보다도 너 못 보는 게 더 힘들어. 촬영은 별거 아냐.”
크게 한숨을 내쉰 이은섭은 앓는 소리와 함께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그게 우리가 다시 볼 날이 아주 멀리에 있다는 걸 알려주는 듯해 나는 너를 힘껏 끌어안았다.
“너네 가족 보고 나면 우리 빨리 결혼식 날 잡자.”
“그―래, 그 말 취소하면 가만 안 둬. 그리고 너 되도록이면 우리 집에 살림살이 좀 많이 갖다 놔. 촬영지랑 우리 집이 더 가까우니까 그럼 더 오래 볼 수 있어.”
“응, 살림 차릴게, 색시야.”
“어? 뭐야, 내가 색시야? 내가 서방님 아니었냐?”
“아닌데. 네가 색시인데.”
“뭔…… 쪼끄만한 게……. 알겠어요, 뱁새 서방님.”
얼른 색시네 집으로 들어오세요. 이은섭이 하는 말에 까르르, 웃다가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나보다 훨씬 큰 색시네 집에 들어가서, 하루빨리 살림을 합칠 생각뿐이었다.
이은섭에게 빈말로 너네 집에 살림을 차리겠다고 한 건 아니었다. 나도 서울에 살긴 하지만 교통이 편리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차이는 심했고, 나는 후자, 이은섭은 전자에서 살았다. 각자 촬영에 치이고 회사에 치이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서로를 자주 보려면 내가 이은섭의 집에 자주 가는 게 맞는 선택이었다.
“영도 씨, 이사했어요?”
“아뇨, 아직 살던 곳에서 삽니다.”
“별건 아니고. 지하철 타는 방향이 나랑 같아져서요.”
내 짐을 이은섭의 집에 차곡차곡 옮기고 매일같이 이은섭의 침대에서 자는 보람도 없이 이은섭을 못 본 지가 다시 일주일째였다.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게 웬 생이별이냐며 서글퍼하기에 급급했던 나는 어느 날 지하철에서 회사 선배의 질문에 느닷없이 얻어맞은 사람처럼 잠시 아무 말도 못 했다.
이은섭의 매니저 말마따나 처음 연애하는 티가 이런 데서 났다. 이은섭이 주변 시선을 신경 안 쓰니 나라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같이 희희낙락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오늘도 가서 이은섭의 베개나 끌어안고 자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던 내가 너무 애 같았나 싶었다.
“그래도 좋은 걸 어떡해.”
그런 걱정을 한 게 무색하게 이은섭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씻고 계획대로 네 베개를 끌어안긴 했지만.
애초에 이은섭과 연애를 하며 제정신으로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나가는 배우 중 하나라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이은섭은 내 첫사랑이었다. 이은섭 외에 성애적으로 나를 만족시킬 만한 사람은 단언컨대 이 세상에 없었다.
너와 같이 있으면 공기 중에 사랑만 짙어지는 기분인데, 하루 종일 네 생각을 하니 반쯤 취한 상태로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것과 진배없지.
열한 시가 되자 눈이 감겼다. 나는 이은섭에게 왜 안 오는 거냐며 메시지로 잔뜩 투정을 부리고서 잠들었다. 네가 안 오더라도 내가 이렇게 기다린다는 티를 내고 싶었다.
그날 밤 나는 웬일로 꿈을 꿨다. 얼마 만에 꾸는 꿈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랜만의 꿈이었다.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라더니 아니나 다를까 네가 나왔다. 너는 내 손등과 손목에 진득하게 입술을 묻었다가 이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나는 그런 네게 안겨 더없이 행복하게 웃었다. 너는 내가 웃자 따라 웃으며 부끄러워했다. 그 미소가 너무 어리고 순수해 보여서 나는 네가 고등학생이던 시절의 모습이 꿈에 나왔다고 느꼈다.
나는 너를 귀여워하며 손장난을 쳤다. 어릴 때처럼 네 손등에 도드라진 뼈와 힘줄을 문지르기도 하고 어깨에 기대었다가 이마를 콩콩 박기도 했다. 헤실헤실 웃으며 너를 끌어안을 때였다.
“응, 응…… 응?”
“아, 깼어?”
“응…… 은섭이야……?”
“나 아니면 누가 널 이렇게 만져.”
숨 쉬기가 힘든 게 너를 좋아하는 마음으로 인한 벅참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물리적으로 네가 나를 짓누르고 있어 그런 거였다.
꿈이 아니라 진짜 이은섭이 왔다니. 지금 몇 시인지 궁금했지만 그보다 먼저 확인한 건 목덜미였다. 목을 더듬거리자 축축하게 젖은 게 느껴져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네가 무슨…… 강아지냐고.”
“응, 나 영도네 멍멍이잖아.”
“깨우지. 변태처럼 자는 사람 위에서 뭐 하고 있어…….”
“변태도 맞잖아, 나.”
킁킁거리며 내 냄새를 맡느라 바쁜 이은섭을 끌어안았다. 역시 베개로는 역부족이었다. 실재하는 너는 이렇게나 뜨겁고 커다란데 베개 따위가 대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래도 네가 없을 때는 베개라도 끌어안고 있어야 하는 만큼 나는 너를 부둥켜안고 있다가 사이에 베개 하나를 끼워 넣었다.
“갑자기 베개는 왜?”
“너 없으면 이거 끌어안고 있어야 돼. 냄새 많이 묻혀놔.”
“야아…… 존나 귀여워, 태영도!”
“읍!”
어디가 귀엽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숨만 쉬어도 귀엽다고 하는 네게 이젠 조금 익숙해져서 비몽사몽인 상태에서도 뱁새로 변해주었다. 뒤로 넘어갈 듯이 좋아하는 너를 보며 열성팬을 보는 기분이 이런 걸까, 생각하다가 나도 너를 보면 속으로 발광을 해대니 그냥 연인이 쌍으로 주접스러운 것뿐이라고 결론 내렸다.
* * *
“오랜만이에요, 서방님. 오늘 힘 좀 줬네?”
“괜찮아? 아, 너무 긴장해서 토할 것 같아.”
혼전 순결에 대한 로망은 이은섭이나 나나 둘 다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섹스 한 번 하지 못한 채 각자의 아버지들과 조부모를 찾아뵙게 되었다. 소속사도 두 손 두 발 다 들었는지 이은섭에게 ‘내년에 기사 뜨기 전에 차라리 빨리 결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라고 말했다고 들었다.
솔직히 양가 어른들은 이미 우리 둘의 결혼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나야 연예인도 아니니 괜찮았고, 남은 건 이은섭의 소속사뿐이었는데 생각보다 쉽게 오케이 해주어서 나는 그 소식에 한시름 놓은 기분이었다.
“어제 토끼 아빠는 토했대. 태영도 아나운서 만난다고 너무 긴장해서.”
“뭐……?”
“아무래도 어릴 때 너 보고 처음 보는 거잖아. 그리고 우리 아빠 연예인 실제로는 처음 보거든.”

পহুৰ লগত নাচিব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