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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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섭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마음이 다시 편해져서 침대 위에 축 늘어졌다. 원래 같았으면 이 침대에서 이은섭이랑 처음으로 섹스하는 날이 되었어야 했는데.
술기운이 어느 정도 가시고 나니 ‘콘돔이 삭아서 없어질 것’이라며 내게 눈치 아닌 눈치를 주던 이은섭에게 미안해졌다. 늑대 수인이면서 강아지처럼 구는 이은섭은 내가 싫어하는 짓은 일절 안 하려고 갖은 애를 썼다. 나는 그래서 더 미안했다. 그게 꼭 10년 전에 내가 네게 저질렀던 잘못 때문에 그리된 것 같아서.
오늘 섹스는 무리겠지만 그래도 이은섭에게 좀 기억이 될 만한 일을 하고 싶은데. 침대 위에서 뒹굴거리며 뭐가 좋을까, 생각하던 나는 우선 옷을 벗어 곱게 개켜놓은 후 이은섭이 방 안으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얼마쯤 기다리자 얌전한 발소리가 들려왔고,
“태영도…… 어?”
“삐!”
나는 아주 간만에 뱁새로 변했다.
“삐―, 삐삐!”
뱁새로 변한 것도 아주 간만이지만, 그보다도 술을 마시고서 뱁새로 변한 건 처음이었다. 취한 상태로 하는 비행은 이렇게나 즐겁구나. 술기운으로 인해 풀어진 내 모습이 싫어서 낯선 이들과의 술자리는 최대한 삼가는 편이었는데 이은섭과 같이 있을 때는 술을 좀 마셔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영도야, 이리 와봐. 야아―, 왜 나한테 안 오는데!”
“삐, 삐!”
“진짜…… 너무 귀여워. 어떡해? 너 이렇게 귀여워서 어떻게 하냐고!”
무엇보다도 뱁새로 변한 나를 이은섭이 너무 좋아했다.
취중 비행이 즐거워 이은섭의 방을 두 바퀴 크게 돌며 날았다. 날갯짓은 간만이었지만 내 비행이 이은섭에게는 꽤 빠르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내가 떨어지면 받아주려고 양손을 곱게 모아 펼친 채 나를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는 이은섭이 귀여웠다. 나는 법을 잊는 새는 없는데, 바보.
이은섭을 계속 뛰게 만들고 싶지도 않고 나도 아주 어린 시절이 아니고는 누군가의 손바닥에 안정적으로 안겨본 적이 없어서 곧 날갯짓을 멈추었다. 내가 편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손바닥을 우묵하게 만든 이은섭이 좋아서 손바닥 위에서 데구르르 한 바퀴 구르자 이은섭은 엄지를 살짝 들어 미간부터 동그란 머리통을 한 번 쓸어올렸다.
“삐빗!”
“살면서 본 모든 생명체 중에…… 이렇게 귀여운 존재는 처음이야.”
“삐―.”
나도 살면서 나를 이렇게 사랑스럽게 봐준 존재는 너뿐인데.
나를 한없이 귀엽고 예쁘게 봐주는 이은섭에게 감사와 사랑을 담아 입 맞췄다. 손바닥에서 살며시 날아올라 부리로 이은섭의 도톰한 아랫입술을 콕 찍은 후 다시금 그 애의 손바닥에 안착했다.
종이 다른 수인 간에는 동물 형상일 때 소통이 되지 않았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이은섭에게 수다스럽게 말을 걸었고, 이은섭은 그런 나를 손가락으로 조금씩 만지다가 이내 내 가슴팍에 쪽쪽 소리가 나게 뽀뽀했다.
“삐?”
“완전 똥그래.”
“삐삐, 삐.”
“뱁새는 다 그렇다고?”
이은섭의 말이 맞는다는 의미로 짧고 가느다란 다리를 굽혔다 펴고 날개를 작게 파닥거렸다. 그러나 이은섭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닌데, 네가 세상에서 제일 동그란 뱁새인데. 그리고 제일 뽀송하고.”
콩깍지가 씌어도 이렇게 심각하게 쓰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 말에 반박하고 싶지는 않아서 다시 앉았다 일어나며 몸을 크게 부풀렸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잔뜩 몸을 부풀려도 이은섭의 양 손바닥 안을 가득 채울 수는 없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한동안 이은섭은 침대에 누워서 나를 구경하고, 나는 이은섭을 구경했다. 평소에는 손으로 매만지던 네 몸을 가느다란 새 발로 타다다다 뛰듯이 걷는 게 재미있었다. 가끔 장난을 치고 싶을 때는 네 발바닥이나 겨드랑이께로 가 괜히 파닥파닥 날갯짓을 했는데, 네가 꾹꾹 참다가 웃는 얼굴이 귀여워서 나는 다시 인간으로 변했다.
“웃는 얼굴이 귀여워서, 안아주고 싶어서 다시 변했어.”
“그럼 안아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 부끄러워 이불 속으로 들어가 너를 안았다. 뱁새 형상으로 안기는 것도 좋았지만 역시 둘 다 인간 형상으로 팔을 뻗어 서로를 품에 가두듯 안는 게 훨씬 좋았다.
반쯤 발기한 네 좆을 모른 척하고 더 바짝 붙었다. 사귀게 된 후로는 거의 매번 발기한 상태인데 그걸 매번 신경 썼다가는 신경줄만 예민해질 게 분명해서 의식적으로 모른 척하기 시작한 게 도움이 되었다. 정작 너는 최대한 허리를 뒤로 빼긴 했지만.
“은섭아, 나중에 너도 늑대로 변한 모습 보여주라.”
“너도 뱁새로 자주 변해줘.”
“응……. 졸려.”
“자, 뱁새야.”
그리고 나 섹스 못 했다고 삐진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잠이 들락 말락 할 때에 내 귀에 자기가 절대 삐진 게 아니라고 해명하는 이은섭 때문에 한참 웃었다. 너무 많이 웃어서 못 잘 것 같았는데, 이은섭이 자장가를 불러줘서 깊이 잠들 수 있었다.
* * *
이것좀봐
싫어하는 사람도 많고 맞말보다 틀린 말 할 때가 더 많은 여성지 찌라시..... 자극적인 거 점철된 찌라시들 도파민.도.도.파민. 중독자라면 길티플레저로 보잖아^^; 나 심각한 도파민 중독입니다라서 매달 보는데 이번 찌라시 공유함
A군과 B군의 ‘너밖에 안 보여!’
“그 둘은 촬영장 밖이 찐이에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에디터와의 사석에서 나온 말. 좀처럼 접점이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의 조합이 몇몇 네티즌 사이에서 좋은 케미로 화제가 되어 물어보았더니 이게 웬걸, 진짜라고?
“A군은 대놓고 쳐다보고, B군은 그걸 피하지 않아요. 사랑은 아니라 할지라도 세상에서 가장 친한 사람은 맞는다고 봐요.”
누가 누구랑 만난다더라, 하는 소문은 사귄 지 한 시간 만에도 파다하게 퍼지는 연예계이니 걸러 들어야 하겠지만 둘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에디터의 지인은 확고하게 말했다.
이거 특종이 될 수도 있겠는데, 싶어 더 알아보았는데 속속 드러나는 증거들. 커플 티와 커플 목걸이, 커플 모자까지. 가장 티가 나는 반지만 빼고 거의 모든 아이템을 공유하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연예계 생활 동안 두 사람은 모두 열애설 한 번 없었다. 특히 A군은 ‘연기를 할 때 연애 감정을 잡기 위해 무던히 많은 노력을 해도 경험이 없어 항상 부족함을 느낀다.’라고 했을 정도. 입 발린 소리가 아닐까 했는데 B군과의 관계가 사실이라면, 이제 그의 농익은 로맨스물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다.
추천 28/반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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