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12월 31일에 만나 삼삼오오 모여 놀던 반 애들은 자정이 가까워오자 근처 술집에서 자리를 잡았다. 이은섭은 누가 나를 괴롭힐 리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텐데 내 곁에서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유난스러웠지만, 나는 그 애가 나랑 있을 때 유난스럽게 구는 게 좋았다.
“엄마! 우리 반 애들인데, 빠른 년생 애들 없으니까 자정 되면 단속 안 걸려. 우리 여기서 안주 축내고 있다가 술 시켜도 되지?”
“그러엄. 친구들 인물이 다 훤칠하니 잘생겼다. 오늘은 아줌마가 쏘는 거니까 많이들 먹어.”
“감사합니다!!”
고민도 없이 반 애들이 우루루 몰려간 술집은 알고 보니 학부모가 하는 곳이었다. 다들 폐 끼치면 안 된다고 술집에서 밥을 먹는 게 웃겨서 몰래 웃는데 이은섭은 그런 나를 빤히 보더니 입술을 삐죽였다.
“왜.”
“뽀뽀하고 싶어.”
“되겠냐……?”
“안 되는 거 아니까 더 하고 싶은 거거든?”
“밥이나 먹어. 너도 술 처음 마셔본다며.”
이은섭은 주변에 앉은 애들이 힐끗거리며 쳐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쉴 새 없이 치근거렸다. 반 애들 중에 우리가 여타 애들과는 조금 다른 감정으로 서로를 보는 걸 모르는 애가 있을까? 아마 없을 것 같았다. 이은섭이 이렇게 치대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자정이었다. 테이블에 모인 애들은 와글와글 소란스럽게 굴며 각자 지갑에서 민증을 꺼냈다. 나는 그 와중에도 무수히 많은 지갑 중 이은섭의 지갑이 가장 좋아 보이는 것에 주눅 들었다.
“야야, 우리 건배사 하자.”
“반장이 해!”
“뭐 할까?”
“베이직하게 가자. 스무 살을 위하여 어때?”
“반장! 빨리 스무 살을, 해!”
맥주잔과 소주잔이 즐비한 테이블을 멍하니 보고 있던 나는 반 애들의 성화에 자리에서 꾸물꾸물 일어났다. 그러곤 있는 힘껏 외쳤다.
“스무 살을!”
“위하여―!”
선창과 후창이 끝난 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자리에 앉았으나 주변에 앉은 애들이 야유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를 내는 바람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나는 그게 부끄럽고 민망해 주는 대로 술을 받아 마셨다. 옆에서 이은섭은 그만 마시라고 하는데도 취하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아서 그냥 쭉쭉 넘겼더니 나중에는 담임이 온 줄도 모를 정도로 취하고 말았다.
“우리 반에서 한국대나 두 명이나 나왔으니까 온 거야.”
이은섭이 기대서 좀 쉬라고 하기에 그 애 어깨에 기대어 있다가 담임이 하는 말을 어렴풋하게 들었다. 전교에서 한 학급 안에서 한국대가 두 명이나 나온 건 우리 반뿐이라고, 목소리에서부터 뿌듯함이 묻어나는 게 듣기 싫었다.
“우리 잠깐 나가자, 은섭아.”
“왜, 토할 것 같아?”
“그건 아닌데…….”
“바람 쐬러 나가고 싶어?”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은섭은 나를 따라서 두어 번 고개를 작게 끄덕인 후 같은 테이블 애들에게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하며 나를 거의 들쳐메듯 부축하고 밖을 향했다.
비틀거리는 내 발이 남의 것 같아 신기했다. 나는 두 쌍의 발이 멈춘 후에야 자리에 서서 네게 안겼다. 바람을 쐬자고 하더니 너는 나를 아무도 드나들 것 같지 않은 골목 끝으로 데리고 왔다.
“너 술 약하다. 나 없을 때 마시지 마.”
“안 약해……. 처음이라 그래.”
“나도 처음인데 나보다 빨리 취했잖아. 얼마 마시지도 않은 게.”
“소주 한 병이나 마셨어어.”
“난 소주에 맥주도 한 병 마셨는데 멀쩡해.”
비틀거리는 나를 끌어안고서 여기저기 부산스럽게 입 맞추는 너 때문에 자꾸 웃음이 피식피식 흘렀다. 그러나 나는 방학이 시작된 후 닷새간 꽤 많은 고민을 했고, 네가 나한테 고백을 하기 전에 할 말이 있었다.
“우리 살 집은 언제 보러 갈래?”
“아…… 나 같이 못 살아.”
“어? 왜? 부모님이 안 된다고 하셨어?”
“아니, 그게 아니라.”
거짓말을 하려면 입에 침이라도 바르라는 말이 십분 이해되었다. 입이 바짝바짝 말라서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한번 훑고 나서야 말할 수 있었다.
“나 사귀는 애가, 있어서…….”
“……네가?”
“어, 어…… 응.”
언제 비틀거렸나 싶게 술이 한 번에 다 깼다. 일부러 제정신이 아닐 때 말하고 싶어서 배가 부를 정도로 많이 마신 건데. 나를 내려다보는 네 표정이 하도 황망해서 내가 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언제부터?”
“방학하고…… 워, 원래 연락하던 앤데, 그래서 그렇게 됐어.”
“그럼 나는?”
“…….”
“야, 너는 씨발…… 야, 그럼 나는, 태영도. 나는.”
한 대 맞겠구나 싶었다. 나는 맞아도 싼 한심한 새끼였다. 좋아하는 너를 계속 곁에서 지켜보다가 내 가난에 미칠까 봐 무서워서 도망갈 준비나 하는 병신 같은 새끼였다.
“어…….”
그러나 너는 나에게 키스할 뿐이었다.
우리 둘 다 키스가 처음이어서 이가 부딪쳐 딱, 딱, 그런 소리가 심심찮게 났다. 내 머리통은 이미 벽에 몇 번이나 박아서 아마 뒤통수가 납작해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도 설렐 수 있다니. 나는 알고 있었다.
“…….”
“……최악의 첫 키스네.”
네가 아니면 이런 키스는 하등 설렐 만한 것이 못 된다는 걸.
너에게서 최악의 첫 키스라는 말을 듣고서 나는 연신 얼굴을 닦았다. 우리의 키스가 서툴러서 내 입술은 누구의 타액인지 모를 것으로 흥건히 젖어 있었다.
“흐으…….”
어쩌면 평생 이은섭에게 최악으로 남겠지?
반 애들한테 네가 먼저 갔다고 말을 해야 하는데, 당장 나부터도 네가 나를 두고 간 게 믿기지 않아 한참을 서서 울었다. 네 말이 맞았다. 최악의 첫 키스였다.
체험, 삶의 가치!
모든 직장인이 아마 똑같은 생각을 하리라고 본다. 일 년은 짧은데, 하루는 너무 길다. 그 긴 하루 동안 딱히 뭘 한 것도 없는데 일주일은 금방 가버리고, 이룬 것 없이 나이만 먹는다.
“그러면 이번 프로그램은 젊은 태 아나가 들어가는 거 어때? 피디들 말 들어보니까 멀끔하니 젊은 아나운서 두엇 정도가 필요하다고 하더라고.”
“아, 저는…….”
“왜, 싫어?”
싫지, 그럼 좋겠냐?
그런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으나 어렵사리 들어온 방송국이었다. 대학 졸업 후, 돈만 좇아 살기로 결심했으면서도 나는 옛꿈을 차마 못 놓고 이런저런 신문사를 기웃거렸다. 연예인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며 쓰레기 같은 기사를 배설하는 신문사 같지도 않은 곳에서의 인턴 생활, 수많은 언론 고시 낙방…….
그 후에 기자 생활을 거치고 나서야 입사하게 된 방송국에서 나는 어떻게든 자리를 잡아야 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요양원 비용을 대기 위해서라면 싫어도 싫다고 말할 수 없는 처지였다.
입을 벙긋벙긋 벌렸다 닫은 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스워 보일 게 분명하지만 나는 좀 더 뻔뻔하게 버텨야만 했다.
“안 그래도 제가 하고 싶었던 프로그램입니다. 기회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잘 어울려. 어른들이 태 아나 좋아하잖아?”
“깍쟁이 같기만 한 줄 알았는데 이제야 얘기가 좀 통하네.”
그렇게 나는 <체험, 삶의 가치!> 프로그램에 투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