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바꾸고 싶으면 너나 바꿔. 나는 이 자리 좋아.”
“뭐, 나 좋다고?”
“뭐?”
왼쪽 눈썹이 살짝 들렸다 내려가더니 너는 눈을 접어 웃었다. 눈동자가 안 보일 정도로 가느다랗게, 미술 시간에 쓰는 세필붓으로 그린 것처럼 눈매가 가늘어진 네 모습은 처음 봐서 신기했다.
“하하! 내가 언제 네가 좋댔어. 이 자리가 좋댔지.”
“어…… 그러냐.”
“자리 바꿀 거야?”
“아니.”
그날 나는 몽정했다. 다름 아닌 내 짝의 웃는 얼굴 때문에.
* * *
최악이다. 태영도 꿈을 꾸고 싸다니.
어안이 벙벙해서 이불 속을 멍하니 보다가 ‘그럴 수도 있지, 내가 말만 안 하면 아무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며 학교에 갔다.
“안녕.”
“어, 안녕.”
그러나 누군가를 반찬 삼아 몽정했는데, 그게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할 짝이라는 건 좀 심각한 문제였다. 나는 하루 종일 내가 태영도의 어떤 점 때문에 몽정한 것인지 밝혀내기 위해 틈만 나면 태영도를 관찰했다. 그러면서도 정작 눈이 마주칠라치면 얼른 보지도 않던 교과서를 뚫어져라 쳐다봤고, 태영도는 그런 나를 보며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지 왜 그러느냐 묻지도 않았다.
나 같으면 한 번쯤은 궁금해서 물어봤을 텐데. 너 뭐 잘못 먹었냐든가…… 그 정도는 물어볼 수 있지 않나? 태영도는 나한테 관심이 없나? 솔직히 내가 왜 반에서 겉도는지 반장으로서 좀 관심을 가져야 정상 같은데. 반장이라는 놈이 어쩌면 그렇게 반 애들의 관계에 대해서 무심할 수 있지?
그날 태영도가 꿈속에서 내 반찬이 된 이유를 알아내려다가 나는 별안간 태영도에게 서운함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애가 아니고, 내가. 나는 태영도에게 서운함을 느낄 주제가 되지 않았다. 태영도와 나는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심지어 짝이 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나 혼자 자나 깨나 태영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씨발, 가오 상해.”
동급생들과 잘 어울리지는 못해도 가오만큼은 지키는 게 나였다. 나는 주말 내내 태영도 생각을 최대한 하지 않도록 아주아주 번잡스럽고 활동적으로 지냈다.
“영도, 어디 아파?”
그러나 태영도는 정말이지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
또 태영도를 대상으로 몽정하게 되면 나는 일평생 한 수인만 바라보는 늑대 수인 중 하나로서, 좆을 끊어버리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한 결과 주말 이틀간 평온한 밤을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지킨 좆을 태영도는 우습게 끊어버릴 작정을 했는지 월요일 아침부터 담요를 둘러쓰고 자리에 죽은 듯이 엎드려 있었다.
태영도가 곁을 내어주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반 애들은 반장인 태영도를 무척 신경 쓰는 것 같았다. 하기야, 태영도가 항상 곧게 앉아서 공부만 하기는 했지. 그렇다고 한 10분 엎드려 있는 동안 다섯 놈이나 왔다 갔다 하며 ‘어디 아픈 거야?’ 내지는 ‘조퇴하자.’라는 둥 지나친 걱정을 쏟아내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반 애들에게 자기는 괜찮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나는 주말 내내 태영도와 가까이 지내지 않으리라고 다짐한 게 무색하게도 태영도가 담요를 무릎에 얹고서 허리를 꼿꼿하게 피려고 노력하는 걸 진득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허옇게 뜬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손을 들었다.
“선생님, 반장 보건실 좀 데려갈게요.”
“영도 어디 아파? 얼굴이 안 좋네. 은섭이 네가 책임지고 영도 데리고 가줘.”
“네.”
태영도는 진짜 몸이 안 좋은지 팔을 잡아 일으키는 내게 한마디 반박도 않고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조례 시간이라 그런지 복도에 아무도 없었다. 각기 할 말을 하는 여러 명의 담임들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태영도가 발을 직직 끌며 걷는 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며 그 애를 내려다봤다.
“감기 걸렸냐?”
“춥게 자서 그런가 봐. 많이는 안 아프고…… 좀 자면 괜찮아질걸. 귀찮게 해서 미안.”
마음이 수런거렸다. 춥게 잤다고? 얘는 4월인데 얼어 뒈지려고 창문을 열어놓고 잔 모양이었다. 나는 주말에 꽃샘추위가 심하다고 아빠가 겨울 이불을 꺼내줬는데.
5층 교실에서부터 1층 보건실로 가는 내내 태영도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건실 선생님은 태업하기로 소문난 나무늘보 수인이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태영도의 열도 재지 않고서 대충 해열제와 종합 감기약 한 알을 먹고 자라고 지시했다.
저딴 놈도 교사가 될 수 있구나.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며 침대에 자리를 잡고 반쯤 누운 태영도에게 따뜻한 물과 알약 두 개를 건네줬다. 태영도는 군소리 없이 그걸 받아먹고는 이불을 덮는 둥 마는 둥 하며 말했다.
“나 한 시간만 잘게.”
“어쩌라고. 너 데리러 오라고?”
어, 씨발. 데리러 오라고 안 하면 어떡하지?
태영도의 앞에서는 말을 나오는 대로 뱉게 되어서 문제였다.
“응, 데리러 와.”
“……내, 내가 네 따까리냐?!”
“그럼 오지 마…….”
“누가 안 온대?!”
나는 반쯤 눈을 감고서 희미하게 미소 짓는 태영도의 목 끝까지 이불을 덮어주고서 도망치듯 보건실에서 나왔다.
쿵쾅거리며 보건실에서 벗어난 나는 학교 화단의 구석진 곳에서 숨을 골랐다. 이상하다, 우리 아빠가 결혼할 때쯤 첫사랑이 생길 거라고 했는데…….
“아, 씨발, 씨발…….”
나는 열아홉밖에 안 됐는데 왜 벌써 태영도 같은 애가 내 앞에 나타난 거지?
* * *
그 주 내내 나는 태영도를 내가 진짜 좋아하는 건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했다. 그러려면 새벽같이 학교를 나오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아침잠까지 줄여가며 일주일간 관찰한 결과, 태영도는 하는 짓이 꽤 귀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