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놈, 미친놈! 이보다 더 어떻게 찜을 해놓겠다는 거지?
나는 결사반대의 의미를 담아서 날갯짓을 했다. 파닥파닥 소리가 났다. 이은섭은 그런 나를 가만히 보다가 납작하게 엎드려 나와 눈을 맞추고서 입을 열었다.
“어쩌라고. 너 내 건데.”
“삐…… 삐…….”
“목 아프게 울지 말고 이리 와. 자장가 불러줄게.”
도무지 말이 안 통하는 애인의 품에서 나는 힘없이 몇 번 더 파닥이다가 잠이 들었다.
* * *
한 번 섹스를 텄으니 틈만 나면 붙어먹겠다는 게 이은섭의 계획이었으나 그건 절대 이루어질 수가 없는 일이었다. 내가 거부해서가 아니었다. 이은섭이 바빠도 너무 바빠서였다.
-어제 울었어.
“안 울었으면서 괜히 그런다.”
-아냐. 너 생각 하면서 마스터베이션하다가 너무 비참해져서 울었어, 진짜로.
“……너는 좀 더 울어야겠다.”
-꾸짖지 마. 또 눈물 나.
아프긴 했어도 내내 아프기만 했던 건 아니라, 몇 번 더 하다 보면 확실히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다. 이은섭도 자기가 처음이라 너무 흥분했다고, 앞으로는 자제하겠다고 몇 번이나 다짐하기도 했고. 그런데 아예 배를 맞출 기회 자체가 주어지지 않을 줄이야.
영화 한 작품이 완성되기까지의 여정에 배우가 하는 역할은 촬영에 임하는 정도일 거라 생각했던 건 큰 오산이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이은섭은 오만떼만 행사에 끌려다녀야 했고 작품 촬영을 하느라 미처 소화하지 못했던 스케줄에 오히려 영화 촬영을 할 때보다도 더 바빴다.
“그래도 우리 내일 보잖아.”
-그게 보는 거냐? 네 옆에서 영화를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같은 영화관 안에 있는 게 전부인데.
“난 그래도 너 보니까 좋은데.”
-아니, 나도 좋지. 좋은데……. 은퇴할까?
“웃기지 말고.”
그러던 중에 VIP 시사회 초청장을 받았다. 이은섭에게 직접 받은 것도 아니고 이은섭의 회사 대표에게. 누가 봐도 커리어 우먼의 정석이라고 할 법한 중년 여성은 내게 초청장을 주며 빙긋 웃었다.
「나 못지않게 은섭이도 사람 보는 눈이 좋네요.」
「네?」
「잘 어울린단 얘기예요. 은섭이 말대로 정말 좋은 분 같아요. 시사회 때 또 뵐 수 있으면 봬요.」
저번 주, 방송국 앞 카페에서 이은섭의 소속사 대표와 잠깐 만나 받은 초청장보다도 잘 어울린단 소리가 더 기분 좋아 다음 날까지도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했었다. 아직은 이은섭과 사귀는 게 비밀이지만 만인에게 알려졌을 때도 이런 반응이면 더 바랄 게 없을 듯했다.
-내일 너무 예쁘게 입고 오지 마. 껄떡대는 새끼들 있으면 나 못 참아.
“예전에 네가 선물해준 거 입고 가려고 했는데, 괜찮지?”
-아, 아! 그거 존나 잘 어울리는데 내일 입고 오게? 사람들이 다 너만 보면 어떡해? 근데 네가 그 옷 입은 것도 보고 싶어…….
“주접 좀 그만 떨어……. 네가 주연인 영화인데 사람들이 다 너를 보지 왜 나를 봐.”
-원래 대중은 뉴페이스에 환장하는 법이야. 그리고 나는 닳고 닳은 배우1이고.
“닳고 닳은 것치고는 너무 잘나가는 이은섭 씨, 내일 시사회 갈 준비 하게 전화 끊어요.”
-무슨 준비를 하게? 작작 해!
“그냥 팩이나 좀 하게.”
-패―액?! 누구한테 예쁘게 보이려고, 해명해!!
“끊을게. 잘 자, 자기야―.”
-야, 귀여우면 다야?!
꽥꽥 소리를 지르는 이은섭을 무시하고 전화를 끊었다. 입만 열면 주접에 질투인데 그게 밉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진짜 팩을 해야 했다. 이은섭이 초대한 손님으로 가는 자리인 만큼 최대한 멀끔하게 가고 싶었다.
내일 바용 은섭찌-3- 21:09
섭♥
영화 보다가 잠깐 나오라고 연락하면 재깍 나와 알게찌?-3- 21:10
흥분한 상태로 전화를 끊었으나 메시지는 귀엽기 그지없었다. 통화와 메시지 간의 차이에 팩을 올려놓은 채 끅끅대며 웃다가 답신을 보냈다.
알게써용-3- 21:11
섭♥
잘 자고 내꿈꼬 영도찌-3- 21:11
남들이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다고 할 메시지를 밤이 늦도록 돌려보다가 이은섭에게 또 전화를 걸었다. 결혼을 하고 제대로 살림을 합치게 되면 좀 덜 보고 싶으려나? 남들보다 늦게 연애를 하는 바람에 모든 게 지나치게 설레서 고민이라고 털어놓았더니, 이은섭이 자기도 그렇다고 해서 조금 안심이 되는 밤이었다.
다음 날, 어떻게 시사회에 올 거냐는 이은섭의 말에 버스를 타고 갈 거라고 했다.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연예인이 아니었다. 따로 차도 없었고, 방송국에 출근을 할 때도 항상 지하철과 버스를 타곤 했다. 그래서 그러겠다고 한 거였는데 이은섭은 뭐에 또 꽂혔는지 길길이 날뛰었다.
지가 화를 내면 뭐 어쩌겠나. 열 낼 필요 없다고 이은섭을 진정시킨 나는 아침이 되자마자 이은섭에게 선물받은 작은 크로스백에 지갑과 립밤, 버스에서 읽을 책 한 권을 챙기고 집을 나섰다. 그러나 버스 정류장까지 갈 수도 없었다. 이은섭이 화를 내는 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 집 앞에 찾아오기까지 한 것이다.
“오랜만이에요, 일현 씨. 잘 지내셨어요?”
“그럼요! 영도 오빠 덕분에 제가 진짜 편해졌어요.”
“일현아. 너 누가 영도한테 오빠라고 하래.”
“편해졌다는 거 취소할게요.”
“여기 앉아, 영도야.”
미리 말이라도 하지, 내가 아주 일찍 갔으면 길이 어긋날 뻔했는데 이은섭은 그저 싱글벙글이었다. 제 옆에 앉으라고 시트를 팡팡 내려치는 이은섭을 흘겨보다가 일현 씨에게 눈인사를 마저 하고 착석했다.
“일현이 너는 영도 씨라고 불러.”
“아―, 예―, 영도 오빠라고 부르는 건 죽어도 안 되나요? 저는 여성이고 영도 오빠는 남성인데 오빠라고 불리면 영도 오빠가 갑자기 무슨 저주라도 받나요?”
“너 지금 말하는 동안 오빠만 네 번 말했어. 그 정도면 오빠란 단어에 중독된 거야. 영도 씨라고 부르면서 치료 시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