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은섭 배우 오면 바로 촬영 시작할게요―!”
“10분 정도 걸린다니까 다들 화장실 갔다가 오세요!”
첫 촬영과는 사뭇 다른 들뜬 분위기 속에서 2회차 촬영이 시작되었다. 이은섭이 인기가 좀 많은 배우가 아니어서 촬영은 직장인들이 연차를 내기 어렵고, 보통 공강을 만들지 않는 화요일에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은섭 팬들의 정성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우리 엄마가 해주는 밥보다 더 진수성찬이다.”
“나도 이런 식사 얼마 만에 해보는지 모르겠네.”
“이은섭 우리 프로그램 계속했으면 좋겠다.”
“다음 촬영일에는 커피차 보낸다는 글 봤어요. 이미 돈은 다 마련했다던데요?”
“아―, 진짜 제발 그만두지 말아주세요, 이은섭 배우님!!”
제작진은 그 배우에 그 팬이라며 이은섭을 칭송했다. 그만큼 인기 많은 배우가 뻗대지 않고 싫은 소리 하나 없이 촬영에 임하는 것만 봐도 인성을 알 만하다는 말이 들려왔다. 나는 구태여 말을 더 얹지 않고 이은섭의 팬덤에서 보낸 고급 도시락만 먹었다.
두 번째 촬영의 주제는 목장 1일 체험이었다. 이런 프로그램의 핵심은 출연진의 노동이 아니었다. 특히나 이은섭과 나처럼 출연진의 케미로 유명세를 떨친 프로그램이라면 더더욱.
오늘 이은섭과 나는 육아 체험이나 다를 바 없이 어린 양과 송아지에게 우유를 먹이고, 젖소들에게서 젖을 짜는 일을 할 예정이었다. 촬영 사이사이에 제작진이 우리 둘에게 무엇을 요구할지 잘은 모르겠으나, 아마 1회차 촬영처럼 어물쩍 넘어가는 그림을 원하지 않으리란 것은 자명했다.
저번엔 정말 우연이었다지만, 오늘은 우연을 가장한 포옹을 할지도 몰라……. 이은섭의 집에서 어색하게 헤어졌던지라 오늘 촬영이 좀 껄끄러운 게 사실이었다. 이은섭은 별일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아니었다. 그냥 그 자리에서 닥치라고 하고 나올걸. 괜히 나도 싫지 않다고 유난을 떨어서는…….
“왔다!”
“자, 스탠바이 들어갑시다!”
그러나 내가 상념에 잠겨 있을 틈도 주지 않고 이은섭이 도착했다. 몇 입 정도 남은 도시락이 좀 아까웠으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개펄에서 촬영할 때와 엇비슷하지만 좀 더 포근한 느낌이 드는 차림새를 한 나는 멀리서 손을 홰홰 흔들며 뛰어오는 이은섭을 보고서 반사적으로 손을 흔들었다. 촬영진이 전부 우리를 이상하게 바라보는데도 우리는 서로의 목소리가 들리는 거리까지 가까워진 후에야 안녕을 멈추었다.
“야, 왜 연락 안 받아.”
제 기분대로 구는 건 여전하구나. 분명 둘이서 있을 때만 말을 놓자고 했는데 이은섭은 주변에 사람이 있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고등학생 때처럼 굴었다.
“여기 너랑 나만 있는 거 아닌데.”
“아. 죄송합니다, 영도 씨.”
“……연락은, 요즘 제가 좀 바빴어요. 그리고 연락도 별거 없어서 답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던데요.”
“별게 없긴 왜, 왜 없어요…… 있었잖아요, 별거.”
사람들이 ‘쟤네가 저렇게 친했나?’ 하는 눈으로 보는데도 이은섭은 기어이 나를 축사 뒤로 끌고 갔다. 그걸 거부하면 더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 나는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우리 집에 놀러 오라고 했잖아. 그게 왜 별거 아닌데, 태영도.”
“못 갈 것 같아서 답장 안 했어. 그리고 너 바쁘잖아. 우리 둘이 마주 보고 뭐 쎄쎄쎄 하냐? 그럴 것도 아닌데 뭘 오래.”
“답답하게 구네. 야, 이 프로그램 어? 우리 케미가 중요하다고 기획안에 떡하니 적혀 있던데. 케미가 돋으려면 좀 친해져야 하거든?”
“안 친해져도 제작진이 친해 보이게 편집해주고, 사람들이 알아서 우리 다 엮어먹을 텐데 그럴 필요 없어.”
“아오, 필요하다고!!”
발을 구르며 왜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지 아나운서답게 논리정연하게 설명해보라는 이은섭의 눈에 광기가 비쳤다. 얘가 10년 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순간적으로 이은섭이 연예계에서 못 볼 꼴을 많이 봤나 싶어 그 애의 손가락 하나를 슬그머니 쥐었다.
“혹시 제작진이 너한테 무슨 압박 넣었어……?”
“……하…… 말을…… 말자. 그냥 소젖이나 짜러 가자…….”
“그런 거 아니지?”
“어어…… 너랑 무슨 말을 하겠냐……. 너처럼 말귀 못 알아듣는 놈도 아나운서가 되는 게 신기하다, 야…….”
“왜 사람이 앞에 있는데 욕해!”
“안 하게 생겼냐?! 따라와, 그냥 좀!”
이은섭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진짜 얘가 무슨 압박을 받은 건 아닌지 걱정되어 약간 심란했다.
큰 보폭으로 앞서나가는 이은섭을 따라잡으려 탁탁 소리 나게 땅을 차며 걸었다. 이은섭은 신나게 앞으로 나아갈 땐 언제고 불현듯 나를 돌아보더니 뒤처진 걸 확인하자마자 대놓고 속도를 줄여 걸었다.
“넌 키 안 크고 뭐 했냐?”
“보통 소동물 수인은 고등학생 때까지 크고 안 커.”
“난 졸업하고도 5센티미터나 더 컸어.”
“너는 늑대 수인이잖아……. 그래서 지금 키 몇인데?”
“189. 크지?”
“……그래, 커서 좋겠다.”
10센티미터도 더 넘게 차이 나네. 촬영 준비를 마친 축사 앞으로 가기 전까지 내내 자기 키를 자랑하던 이은섭은 내 정수리를 손바닥으로 톡 치더니만 혀를 끌끌 찼다.
“나 차서 벌받은 거다, 너.”
“내 키도 작은 키 아니거든?!”
“아냐, 작은 키야. 인정해. 나 차서 벌받은 것도 인정하고.”
사람 신경을 살살 건드리며 머리를 톡톡 치는 이은섭에게서 멀어지며 속으로 생각했다. 절대 인정 안 할 거라고. 나라고 너를 차고 싶어서 찬 게 아니니까.
이은섭과 나는 서로 다른 이유로 투덜거리며 카메라 앞에 섰다. 둘 다 축사에서 일하기 적합한 복장을 갖춰 입었는데, 입고 나니 저번 촬영지에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별히 차이점이 있다면 우리 둘 다 뉴스보이캡을 쓰고 있다는 정도?
모자 같은 게 일할 때 특별히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는 건 누구보다도 제작진이 잘 알 터였다. 그러나 이은섭과 나는 군말 없이 그 모자를 썼다. 제작진이 우리를 엮어서 어떻게든 프로그램의 명운을 이어가고자 하는 의지를 차마 꺾을 수가 없었다.
“이번이 두 번째 촬영인데 두 분 컨디션은 어떠세요? 아마 개펄에서의 촬영보다 더 힘들 것 같아서요.”
“이 목장에 소들이랑 친한 고양이도 꽤 많던데 걔네랑도 시간을 보낼 거예요. 그림이 꽤 괜찮게 나올 것 같아서요.”
“따로 일 안내해주시는 분이 한두 분 정도 있는데, 그냥 두 분이서 촬영하는 시간이 제일 기니까 그렇게 알고 계시면 됩니다―.”
저번 촬영보다도 힘들다는 말에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개펄 촬영 마치고 난 후에도 꼬박 3일은 좀비처럼 생활했는데 그보다 강도 높은 촬영이라면 최소 닷새간은 고생할 게 분명했다.
애써 표정을 다시 펴며 이은섭을 보았다. 이은섭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개펄 촬영도 그렇게 힘들지 않았는데요. 막 짜낸 우유도 먹을 수 있는데 고생 좀 하는 게 대수겠어요.”
“하하…… 그렇죠, 고생은 무슨 고생…….”
진짜 괘념치 않는 듯한 태도에 할 말이 없어졌다. 난 당장 집에 가서 눕고만 싶은데 얘는 뭐가 이렇게 신난 거지? 뱁새 수인과 늑대 수인 간에 넘어설 수 없는 체력 차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래도 같은 남자인데 마음가짐부터 이렇게 다르다니.
자존심이 상할 일은 아니지만 나도 뒤처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힘차게 오프닝 멘트를 쳤다. 카메라에 들어온 빨간 불이 촬영 개시를 알리고 있었다.
“은섭 씨,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태 아나운서님 덕분에 잘 지냈죠. 영도 씨는 제 생각 많이 했어요?”
“네? 아, 그럼요!”
그런데 얘는 또 왜 이렇게 사람을 안 도와줄까…….
제작진이 전달해준 큐시트에는 서로의 생각을 했다느니 같은 느끼한 멘트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우리 둘을 사람들이 원하는 식으로 엮어서 팔려는 의지가 거의 묻어나지 않는 담백한 멘트뿐이었는데. 그러나 이은섭은 큐시트에 적힌 대로 진행할 생각이 없는지 제멋대로 나불거렸다.
“우리 그때 연락처 교환도 했잖아요. 그런데 영도 씨가 번호는 줘놓고 연락은 안 받아서 속상했어요.”
“아…… 하하…… 저는 은섭 씨가 워낙 바쁘신 분이니까, 방해될까 봐 연락을 못 드렸어요. 앞으로는 프로그램에 대해 상의도 할 겸 자주 연락해요, 우리.”
카메라 너머 제작진의 표정이 환희로 물드는 걸 보는 게 영 겸연쩍고 불편해 일부러 ‘프로그램에 대해 상의를 할 때’에 상정해 네게 연락하겠노라고 방점을 찍었다. 이은섭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간에 별 상관이 없어 보이는 게 문제였지만.
“그럼 사흘에 한 번씩 촬영하면 좋겠다. 그럼 시청자분들도 좋고, 우리도 친해지고. 좋죠?”
“오…… 그게 그렇게 되나요……?”
“전 안 친한 사람이랑은 영 어색해서요.”
“딱히 낯을 안 가리시나 봐요.”
“그거야 제가 영도 씨랑 친하게 지내고 싶으니까 그렇죠.”
이미 오프닝이라기보다는 그냥 사담의 장이 되어버린 촬영장에서 전전긍긍하는 건 나뿐이었다. 싱글싱글 웃으며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이은섭을 빤히 보다가 나는 그냥 그 애의 옷깃을 끌었다.
“가요, 일 시작해야죠.”
“네에―.”
유치원생처럼 귀여운 척 말꼬리를 늘여 대답하는 이은섭을 딱 한 대만 패주고 싶었다.
이은섭은 내게 정말 협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자기가 귀가 어두워서 내가 하는 소리가 잘 안 들린다며 불쑥불쑥 가까이 올 때마다 나는 퍼뜩 놀라 주먹을 쥐는 일밖에 하지 못했다. 바짝 얼어 있는 나를 힐끔 보며 이은섭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고, 아마 화면에는 내가 영 숙맥처럼 잡힐 게 분명했다.
그러나 이은섭은 내게 협조할 생각이 없는 것뿐이지 촬영장에서의 태도는 젠틀하기 그지없었다. 유명하지 않고 붙임성도 없는 나와는 달리 이은섭은 유명한 데다 서글서글한 생김새처럼 성격도 좋았다. 일을 가르쳐주기로 한 젊은 남자는 나보다는 이은섭이 더 편한 듯 보였다. 아예 내 쪽은 보지도 않고 이은섭을 향해 몸을 틀어 일을 알려주는 통에 나는 조금 초라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이은섭은 내 쪽을 보며 ‘잘 듣고 있죠, 영도 씨?’ 같은 말로 흐름을 유연하게 바꿨다. 그러면 나는 어쩔 수 없이 우리가 고등학생이었던 때를 떠올리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예전에는 내가 너를 반 애들과 잘 지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이었는데, 완전히 반전된 역할도 나쁘지 않았다.
촬영이 이어지며 일을 가르쳐주는 남자는 우리 둘을 번갈아 볼 줄 알게 되었다. 자기 아버지를 따라 귀향해 목장에서 일하게 되었다는 남자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저희 목장은 애들 억지로 사료 먹이고, 젖 돌게 하려고 주사 놓고 그러지 않거든요. 억지로 어미 소랑 송아지를 떼어놓지도 않습니다. 보세요, 소들 인상이 훤―하잖아요.”
“그러게요, 소들이 진짜 행복해 보여요.”
“제가 처음에는 이 일 하기 정말 싫어했거든요. 저희 아버지가 아주 소밖에 모르는, 아, 저희 아버지께서는 소 수인이시거든요. 하여튼 간에, 그래서 소들 복지에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주는 사람이시다 보니까 나는 내가 그렇게 일을 하지는 못하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와서 보니까 아버지가 진심으로 일하는 걸 나도 도와드리고 싶더라고요.”
“그러셨구나……. 듣자 하니 여기가 소 수인들 아르바이트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면서요?”
“네. 건강한 사람들이야 잘 모르겠지만, 짐승들 중에서도 장애를 안고 태어나는 녀석들이 있거든요. 그러면 그런 보조를 소 수인들이 해줘요. 페이는 딱 최저에 수렴하는데 시간 나면 언제든 와서 일도 도와주고 송아지들 케어도 해주니 목장에서는 고마울 뿐이죠.”
무구한 눈망울을 빛내며 나와 이은섭 사이를 파고드는 송아지 두세 마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줬다. 목장주의 아들은 어린것들은 젊은 사람들을 보면 환장한다고 놀리듯이 말하고선 가르칠 건 다 가르쳤으니 힘들면 저를 찾으라고 한 뒤 훌쩍 떠났다.
“아, 근데 이거 진짜 귀엽다.”
“리본이요?”
“응. 우리 온다고 이렇게 꾸며줬나 봐.”
나와 이은섭은 들판에서 내키는 대로 풀을 뜯으며 놀고, 어미 소와 헤어지지 않아도 되는 송아지들의 귀에 리본이 매여 있는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머리와 볼, 등허리까지 쓱쓱 쓰다듬어주니 기분 좋은지 꼬리를 양옆으로 세차게 흔들어대는 송아지들은 리본까지 매고 있어서 더 현실성이 없었다.
그건 그거고, 이은섭이 무의식적으로 자꾸 말을 놓는 것은 문제였다. 제작진은 우리가 고등학교 동창이었다는 사실도 모를뿐더러 아는 사이여도 방송에서는 기본적으로 서로 존댓말을 하는 게 먼저였다. 이 프로그램 성격상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이 주 시청자이기도 한 만큼 이은섭이 계속 반말을 하는 건 곤란했다.
말도 못 알아들을 송아지들에게 차례대로 줄을 서야 맘마를 줄 거라며 으름장을 놓는 이은섭의 귓가로 다가갔다.
“야, 말 놓지 마.”
“내가 언제?”
“우리라고도 하지 마.”
송아지들에게 둘러싸여 그게 무슨 소리냐고 소리치는 이은섭을 뒤로하고 소젖을 짜러 축사 안으로 향했다. 끝까지 모른 척하는 걸 보면 연기자는 연기자였다.
“안녕―.”
“푸르르르―.”
“안 아프게 잘 짤게. 아까 내가 너 젖 짜준 거 기억하지? 아까 하나도 안 아팠잖아.”
“태 아나님, 은섭 배우 오고 있으니까 같이 하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아, 네.”
“태 아나님이 아까 안 아프게 짜줬나 봐요. 소가 태 아나님 오니까 앞발 콩콩거리면서 좋아하잖아요.”
“그래요? 나도 너 좋아, 해피야.”
소들마다 이름표를 걸고 있어서 살갑게 이름을 불러줄 수 있었다. 소는 자기 이름을 불러주자 푸릉푸릉, 콧김을 뱉다가 내 손등을 쓱 핥아주었다. 축축하고 따뜻한 혓바닥이 훑고 가는 게 간지러웠다.
“태―영―도―! 왜 나 빼고 가는데!”
“그런데 이은섭 배우님이랑 엄청 친해졌나 봐요? 두 분 이제 막 말도 놓는 사이 된 거예요?”
“아…… 이은섭 배우님이 낯을 안 가리시는 것 같더라고요. 저는 아직 말 안 놨습니다.”
카메라 돌 때는 말 놓지 말라니까 왜 저래…….
털레털레 뛰어오는 이은섭을 흘겨보다가 해피의 축 처진 손바닥만 한 귀를 들추고 속삭였다. 이은섭 쟤 오면 뒷발로 좀 차달라고.
귓속말을 한 보람도 없이 착한 소 해피는 이은섭이 오자마자 내게 해줬던 것과 똑같이 손등을 핥아주었다. 본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소에게 약간 배신감을 느끼며 이은섭을 향해 손짓했다. 이은섭은 나이를 대체 어디로 먹은 건지 쉴 새 없이 투덜거렸다.
“그렇게 먼저 가면 어떡해요? 나 길 잃어버리면 찾으러 올 거예요?”
“길을 왜 잃어요. 여기 목장이 길 잃을 만한 곳도 아니고.”
“난 원래 길 잘 잃거든요? 태 아나가 나를 잘 챙겨야 촬영이 수월하게 진행된다고요. 유념해주세요, 아시겠죠?”
“……알겠으니까 같이 소젖 짜는 거나 해요. 프로그램 취지가 직업 체험인데 저희 너무 놀기만 한 것 같아요.”
“프로그램 취지는 친해지길 바라 아니었나?”
투덜거림에 말도 안 되는 주장까지. 통제도 힘들다는 점에서 내게 있어서는 뭐 하나 빠질 것 없는 진상 출연자였지만, 제작진은 이은섭을 그저 흐뭇한 눈으로 바라봤다. 잘나가는 배우라고 빼는 것도 없고, 숫기 없어 보이는 아나운서에게 서글서글하게 말도 먼저 놓으며 방송 분량도 착실히 뽑게 도우니 당연한 일이었다.
곤란한 건 정말 나뿐이네. 우리는 좀 더 친해져야 된다고 말하며 내 머리를 통통 치는 이은섭을 있는 힘껏 노려봤다. 그래봤자 올려다봐서 딱히 위압감은 없겠지만. 실제로 이은섭은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내 옆에 쪼그려 앉아 해피와 시선을 마주하며 잘 부탁한다고 인사했다. 소도 얼굴을 밝히는지 나는 한 번 핥아주고 만 해피는 이은섭의 손등은 세 번이나 핥아주었다.
“두 분이서 짜보다가 어려우면 말씀하세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게 숙달된 사람이랑 아닌 사람이랑 차이가 좀 나는 일이라. 못해도 이상한 거 아닙니다.”
소젖을 짜랬더니 둘이서 투닥거리다가 소를 쓰다듬기만 하는 게 영 답답했는지 목장주의 아들이 말을 보태었다. 이은섭은 어떤지 모르겠으나 나는 실제로 살짝 겁을 먹기도 한지라 살짝 눈치를 보며 해피를 몇 번 더 쓰다듬어줬다.
“해피야, 아프면 아프다구 해, 알겠지?”
“태 아나가 먼저 해봐요. 난 태 아나 하는 거 보고 해야지.”
“……얌체.”
“얌체는 무슨 얌체? 이게 다 사는 방법이지. 얼른 해봐요. 아까 배웠잖아요.”
카메라만 없었다면 뒤에 딱 붙어서는 얼른 네가 먼저 해보라고 팔을 꾹꾹 찌르는 이은섭을 한 대 정도는 때려줬을 것이다. 물론 카메라가 돌지 않으면 우리가 만날 일도 없었지만.
설명은 같이 들었으면서 실습은 나 먼저 하라고 부추기는 이은섭의 등쌀에 못 이겨 해피의 배 아래로 조심스럽게 손을 옮겼다. 아무래도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해피는 내 손도 핥아줬으면서 젖에 손을 대자 대번 싫은 티를 냈다. 촬영 전에 연습차 소젖 짤 때는 협조 잘해줬으면서. 난감함에 녀석의 볼에 손바닥을 대니 그건 좋은지 바로 얼굴을 기대와서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는 내 뒤로 하루 종일 함께했던 온기가 스몄다.
“그걸, 그렇게 하면 안 되거든요? 하여간 태영도 너는 좀 헛똑똑이 같을 때가 있어.”
이은섭은 말없이 내 뒤로 자리를 옮겨 나를,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덮치듯 안고서 소젖을 짰다. 제작진 쪽에서 ‘역시 방송을 안다.’라고 감탄 어린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그림을 확실히 이은섭은 잘 아는 듯했다. 나는 후끈거리는 이은섭의 가슴팍에 최대한 기대지 않으려고 주의하며 묵묵히 젖을 짜는 걸 도울 뿐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고 마음이 전혀 수런거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정말이지 척에 불과했다. 나는 뒤에 있는 이은섭을 계속 신경 썼다. 방송이 잘되면 좋잖아. 이은섭은 안 그래 보여도 사람들을 두루두루 잘 챙기던 애였으니까 고생하는 제작진을 위해서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속으로는 계속 ‘어쩌면’이 붙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은섭이 말을 놓는 건 내가 단지 편해서가 아니라 나를 설레게 만들고 싶어 그럴지도 몰라. 어쩌면 이은섭은 친근한 이미지를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하는 프로그램이라 이 프로그램 섭외에 응한 것일지도 몰라.
“다 짰다.”
“두 분 고생하셨습니다. 기념으로 한 잔씩 드시죠, 여기 컵 받으세요.”
“아, 잠시만요.”
되도 않는 생각을 하던 나는 멀어지는 온기에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잔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이은섭은 앞치마를 뒤적거리더니 내게 초티 하나를 건넸다. 그러고는 한마디를 소곤거렸다.
“너 비린 거 못 먹잖아.”
“……고마워.”
“어, 뭐…… 별것도 아니고.”
우유에 타 먹는 초코맛 가루. 나는 살짝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소젖에 이은섭이 준 초티를 탔다.
“맛이 어떠세요?”
“목장에서 소를 사랑으로 키우셨는데 맛이야 당연히 좋죠. 사람들이 방송 보고 동물 복지 우유를 많이 마시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면 더 바랄 게 없죠. 아나운서분은 어떠세요?”
“아, 네. 맛있습니다. 제가 직접 짜서 바로 마시는 우유니까…… 못 잊을 것 같아요.”
비리고 달콤한 초코 우유를 마시며 나는 이은섭을 힐끔거리고 싶은 걸 꾹 참았다. 정말이지 이은섭은 나를 헷갈리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