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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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 3 반장은 딱히 할 일이 없으나 귀찮음은 극대화된, 감투치고는 초라한 자리였다. 그 자리에 내가 앉게 된 건 담임이 ‘무슨 감투라도 한 번 써봐야 입시에 쓸 말이 생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고, 또 담임이 쉽게 부릴 수 있는 학생이 나뿐이기도 했다.
학교에 사정이 나처럼 두드러지게 어려운 애는 단언컨대 한 명도 없었다. 우리 반 애들도 마찬가지였다. 반 애들은 ‘우리 학교는 장학금도 안 주냐.’라고 투덜거렸지만, 그건 받는 사람이 숨어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부촌에 있는 고등학교에 어쩌다 입학하게 된 나를 위해 담임은 내 몫의 장학금을 몰래 주곤 했다. 반 애들이 모두 사라진 늦은 저녁, 교무실에 따로 불러서 조금만 더 고생하자고 나를 타이르며.
“딱 반년만 더 고생하면 영도 대학 가고, 그러면 아르바이트해서 생활할 수 있으니까 생활고 그런 건 걱정 마. 알바 자리 못 구하면 선생님이 과외 자리 알선해줄 수도 있으니까.”
“네, 감사합니다, 선생님.”
“너 보면 꼭 예전 내가 떠올라서…… 더 잘해주고 싶은데 내가 뭐 해줄 수 있는 것도 마땅히 없고. 그래도 내가 항상 영도 응원하는 건 알지?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우리 반에서 선생님은 영도가 제일 대학 잘 갈 거라고 믿어. 꼭 그렇게 될 거고.”
“에이…… 아니에요. 다 같이 잘 가야죠.”
마음에도 없는 빈말이었다. 그 누구보다도 우리 반에서, 아니 전교에서 내가 제일 좋은 학교, 유망한 과에 들어가길 바라는 건 다름 아닌 나였다. 이미 과거에 수렁 같은 가난에서 벗어난 전적이 있는 담임이 은은하게 뒤틀린 내 성정을 제일 잘 알 테지. 그러나 그는 그걸 모른 척했다. 나는 그게 고마웠다. 꼭 ‘그렇게 생각하는 게 네 잘못도 아니고.’라고 말해주는 것 같아서.
현금 200만 원이 든 은행 봉투를 마이 안주머니에 넣었다. 교무실에 가기 전 반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으니 내 가방만 챙겨서 나오면 되었다. 분명히 그랬는데…….
“악!”
“아 씨, 내가 더 놀랐다.”
“너, 너 왜…… 아까 간 거 아니었어?”
텅 빈 교실에서 웬 덩치 하나가 나를 돌아보기에 절로 몸이 굳었다. 단말마의 비명을 지른 후에야 곰처럼 커다란 인영이 이은섭이었음을 확인했다.
4월 중순이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이은섭은 꾸준히 야자 시간에 남았다. 정말…… 왜 남는 걸까 궁금할 정도로 이은섭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자 시간을 꾸역꾸역 다 채우고 가기에 나는 그 애의 집에 우환이라도 생겼나, 편한 대로 미루어 짐작했다.
“뭐 놓고 간 거 있어서.”
“뭘 놓고 갔길래 이 밤에 학교를 다시…….”
“알 거 없고. 별거 아닌데 필요해서.”
부모님께 혼나기라도 했나 보지. 맨날 가방은 그냥 멋으로 들고 다니는 걸 누가 모를 줄 아나. 분명히 챙길 것도 없는데 동네를 배회하면 수상해 보이니까 학교로 온 것일 터였다.
별말 없이 가방을 싸는 이은섭에게 대충 고개를 끄덕여 보이는 것으로 너한테 딱히 관심 없다는 걸 드러낸 나는 잽싸게 마이 안주머니에 들어 있던 돈 봉투를 가방에 욱여넣었다. 이거야말로 남들 눈에는 별일 아닐 테지만 나로서는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일이기도 해서.
“잘 가, 내일 봐.”
“같이 나가. 어차피 나도 이제 갈 거야.”
“같이? 어…… 그래.”
텅 비었을 게 분명한 가방을 부산스럽게 멘 이은섭은 내 옆으로 와 맨날 아홉 시까지 학교에서 공부를 하는 거냐고 물었다. 늦은 시각까지 잔무를 하는 몇몇 교직원이나 행정 직원, 경비 외에는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교복을 입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으로 나가는 건 그 애와 나뿐이었다.
“응, 나는 혼자 공부하는 게 더 집중 잘돼서.”
“나도.”
“너도?”
“어. 나도 혼자서 공부하는 게, 야, 왜 웃고 그러냐?”
“아니…… 수업 시간에는 맨날 자면서 혼자 공부하는 게 잘된다니까 웃기잖아.”
어차피 사는 데야 비슷하지도 않을 테니 대충 지하철역에서 헤어지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웃음이 터져버렸다. 애들이 이은섭 무섭다고, 안 맞게 조심하라고 했는데. 그런데 저 말을 듣고 어떻게 안 웃느냔 말이다. 자습이 자기한테 맞는다는 헛소리를 하는데.
계속 헛기침을 하며 웃음을 감추려던 나는 가로등 불빛 아래서 벌게진 이은섭의 얼굴을 올려다보고 크게 웃고 말았다. 아, 진짜 한 대 맞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아하하하! 야, 너 얼굴 진짜 빨개. 뭐냐고 너!”
“아 씨…… 나도 공부 열심히 할 거라고. ……내일부턴 진짜 이은섭 새로 태어남. 진짜로.”
“알겠어. 나도 내일부터 더 열심히 해야겠다, 이은섭한테 추월 안 당하려면.”
“아 씹, 누구 놀리냐? 너 우리 반 1등이라며! 내 다짐 초라하게 만드네……. 태영도 사람 좋게 봤는데 존나 실망이다.”
한 대 때릴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이은섭은 입만 댓 발 내밀고서 구시렁거렸다. 깨끗한 보도블럭을 괜히 툭툭 차며 서운한 티를 내는데 내가 따로 해줄 말이라고는 공부 도와줄게, 정도였다.
“공부하는 거 도와줄게. 화 풀어.”
어느 정도는 맞지 않기 위한 발악에 가까운 농담이었다. 그러나 이은섭은 더 빨개진 얼굴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해. 나 대학 보낸다고.”
“아, 대학까지 내가……?”
“유튜브에서 보니까 공부 잘하려면 자기가 아는 거 선생처럼 가르쳐야 된대. 그게 제일 효율적인 공부법이래. 미친놈 마냥 인형에 대고도 가르치던데, 너는 말귀 알아듣는 나한테 가르치는 거니까 더 효율적이지 않겠냐?”
“어…….”
망설이는 내게 한 발짝 가까이 다가온 이은섭은 억지로 내 손을 잡고서 새끼손가락을 건 다음 이제 약속한 거라며 손을 아래위로 흔들었다.
“너만 믿는다.”
“……나 엄청 빡세게 할 거야.”
“나 무섭게 하면 우는데.”
입꼬리를 아래로 부자연스럽게 끌어내리고는 바로 씩 웃는 얼굴에 나도 웃어줬다. 한 달 정도만 상대하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겠거니, 그런 생각을 하며.

পহুৰ লগত নাচিব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