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부터 한 시간 꼬박 대본대로 방송을 했다. 어린 친구들은 별 얘기가 아닌 사연에도 까르르, 까르르 웃었고 나는 그 애들의 삼촌처럼 허허, 하며 비교적 인자하게 웃었다. 이제 막 데뷔했으나 나보다 라디오 출연을 많이 해본 듯한 어린 친구들은 라디오 부스 안에 있는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보며 녹음에 임했다. 보이는 라디오에 익숙지 않아 머쓱해하는 건 나뿐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앞으로 노래 많이 들을게요. 파이팅!”
라디오 부스 안에서 기념 촬영까지 하고 나니 11시였다. 젊다는 말보다도 어리다는 말이 어울리는 걸그룹 멤버들은 부스를 나갈 때도 웃음소리를 남겼다. 뒤에 남은 나는 허름하게 이은섭에게 연락을 하는 게 전부였다.
“응, 나 이제 내려가.”
-A구역에 차 댔어. 오늘은 까만색 차.
“어디…… 아, 보인다.”
얼마 없는 차들 사이에서 전조등을 깜박이는 차는 단연 눈에 띄었다. 나는 채신머리 없이 촐랑거리며 뛰어가 차창을 여는 이은섭에게 바로 입술을 내밀었다. 며칠 전에 선물한 립밤 맛이 느껴지는 입술이 곧장 닿아와 피로가 다 풀리는 기분이었다.
“얼른 가서 쉬자, 우리 영도―.”
“응!”
조수석에 앉자 안전벨트를 매어주는 이은섭이 좋아서 나는 푼수처럼 까르르 웃었다.
운전하는 이은섭의 옆에 앉아 라디오 앱으로 들어가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태영도 아나운서 목소리 좋네요, 박재현 배우 빈 자리가 느껴지지 않네요 등 편안하게 라디오를 들은 사람들의 반응이 즐비했다. 그런 반응도 좋았지만, 내가 가장 뿌듯했던 댓글은 ‘애들이 편하게 방송한 것 같아요.’였다.
어쩌면 라디오 디제이로서 재능이 있는지도 몰라. 요새 부쩍 자존감이 올라간 나는 마음에 드는 댓글을 캡처하며 가볍게 발을 굴렀다.
“뭐 때문에 신났어. 나도 같이 신나자.”
“댓글들 보는 중인데, 사람들이 나보고 재능 있대. 네가 듣기엔 어땠어? 나 라디오 디제이 첫 데뷔 괜찮았어?”
“하하! 야, 나한테 물어봐 봤자 제대로 된 의견 안 나오는 거 알면서 물어보냐. 나야 뭐 다 좋았지. 귀엽던데, 태영도.”
“귀여운 건 게스트로 온 걸그룹 애들이 귀여웠고.”
“은섭이보다 더?”
순간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내일모레 서른인 놈이 양심도 없이 10대 걸그룹 멤버들보다 자기가 귀엽지 않느냐는 질문을…….
“그건 아니고. 은섭이가 세상에서 제일 귀엽지.”
“그 대답 안 나왔으면 나 삐져서 밤새 울었다. 제대로 정답 말한 거야.”
누가 들으면 아주 쌍으로 주접을 떤다고 흉을 보겠지만, 진짜 내 눈에는 이은섭이 제일 귀엽기에 볼을 꼬집어줬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엄살을 떠는 얼굴마저 사랑스러웠다.
* * *
첫 방송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화요일은 다시 생방송이었다. 그리고 수요일과 목요일은 녹화 방송. 그래서 화요일에 나는 라디오 부스에 거의 다섯 시간가량 앉아 있어야 했다.
“태 아나운서님, 배 안 고프세요?”
“조금요. 근데 못 버틸 정도는 아닙니다. 혹시 저 때문에 뭐 사 오시려는 거면 괜찮아요.”
“아뇨, 저희 항상 이 시간대에 간식 시키거든요. 태 아나운서님도 샌드위치 하나 시키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여기 메뉴요!”
“아, 감사합니다―.”
내일과 내일모레 분량 녹음을 마치고서 이은섭에게서 온 링크를 확인했다. 웨딩 포토 스튜디오로 유명하다는 곳만 추린 블로그 링크였다. 샌드위치가 오기 전까지 잠깐 통화나 할까 싶어서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비상구로 향했다.
“은섭아.”
-링크 확인했어, 여보?
“여보는 무슨……. 응, 확인했어.”
이은섭은 매번 내게 불편하게 대중교통 이용하지 말고 자기 차 중에 한 대 골라잡아서 몰고 가라고 말했다. 내가 그 말을 무시하고 꾸준히 대중교통을 이용하니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요즘은 아주 현관 근처에 있는 스툴에 소장하고 있는 차의 모든 키를 놓아서 보고 있으면 좀 웃기기도 했다.
나 편하라고 그러는 건 알았지만, 나는 면허가 있음에도 운전은 아직 무서웠다. 기억도 안 나는 일이긴 하지만 부모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으니까. 그래서 내 면허는 완전히 장롱면허 신세였다.
“다 너무 좋아서 못 고르겠어. 너는 어디가 제일 좋아?”
-나도 못 고르겠어서 너한테 링크 보낸 건데.
“그러면 이따 밤에 같이 골라 보자. 급한 것도 아니잖아.”
-급하지! 내년 1월 1일에 열애설 날 때 쓸 사진은 올해 겨울에 찍히기로 했으니까 그 전에 결혼사진을 찍어야 할 거 아냐.
“그럼 가을쯤?”
-응. 늦가을에 딱 찍고서 봄에 결혼하는 거지. 아, 벌써 태영도 꼴려.
“……끊자.”
-내 생각 하면서 라디오 진행하세용, 서방님―!
같지도 않은 말을 하는 이은섭을 타박했으나 목소리에 진득하게 웃음기가 묻어나서 다 실패였다. 전화를 하며 내도록 비상구에 혹시나 누가 지나가지는 않을까 긴장했는데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이럴 때는 차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운전 연수나 받을까.”
원래는 택시 타는 것도 좀 꺼리는데 이은섭이 운전하는 차는 편했다. 그건 내가 이은섭을 믿어서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은섭이 운전을 아주 잘해서였다. 차 몰겠다고 말하면 이은섭이 직접 운전 연수를 맡겠다고 할지도 모르겠네.
이은섭과 운전 연수 날짜를 한번 잡아봐야겠다고 의욕적인 생각을 하며 라디오 부스로 들어갔다. 작가들이 약간 난감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어서 나는 혹시나 작가 중 통화를 들은 사람이 있나, 걱정스러웠는데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어…… 그, 샌드위치 말고 돈가스 드셔야 할 것 같아요.”
“네?”
“안녕하세요, 저 때문에 일이 많아지셨을 것 같아서 들러봤습니다.”
대신 내가 라디오 디제이를 하게 된 이유와도 같은 사람이 와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박재현입니다.”
박재현이 내게 악수를 청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