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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방학이 끝나자 반 분위기는 알게 모르게 삭막해졌다. 방학 동안 이은섭을 자주 만나기는 했지만 우리는 둘 다 공부에 매진했다. 그래서 수능을 망칠 거라는 불안함은 없었다. 운이 좋으면 학생부 전형으로 다른 애들보다 조금 더 빨리 대학 진학을 결정지을 수도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뒤숭숭하지만 묘하게 가라앉은 반 분위기에도 이은섭은 언제나 같은 분위기를 유지했다. 붙으면 붙는 거고, 말면 마는 거고. 그렇게 말은 안 했지만 이은섭이 대학 진학에 크게 집착하지 않는다는 건 피부로 느껴졌다. 타고난 여유로움은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살짝 무너졌고, 나는 그 애의 시선이 흔들릴 때마다 기묘한 고양감을 느끼며 괜히 손바닥에 찬 땀을 닦아야 했다.
“태영도, 너 어디가 1지망이야?”
“한국대. 안 되면 다른 데 가도 괜찮고. 경영학과 가고 싶어.”
“아 씨, 한국대? 경영? 난 죽었다 깨어나도 한국대 못 가는데.”
낮에만 여름 냄새가 풍기는 9월이었다. 이은섭과 나는 여전히 야자를 했다. 내 성적은 흔들리지 않았고 이은섭의 성적은 저번 학기보다도 올라서 아주 좋은 대학은 아니더라도 어디 가서 후지다는 소리 듣지는 않을 만한 대학에 갈 성적이 되었다.
경영학과를 지망한 것은 가능성을 열어두기 위해서였다. 문과에서 가장 취업 잘되는 과이기도 하니 괜찮은 중견 기업 정도엔 쉬이 들어갈 수 있을 듯했다. 운이 좋으면 이은섭에게 말한 대로 기자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은섭과 지내다 보니 전에 없이 밝아진 나는 분수에 넘친다는 생각도 못 하고 총천연색의 미래를 그리는 열아홉이 되어버렸다.
이제는 아주 자연스럽게 손을 잡아오는 이은섭에게 군소리 않고 손을 잡혀준 채 버스 정류장을 지나쳐 걸었다. 우리는 일주일에 한 번, 금요일에만 이렇게 온 동네를 손잡고 걸어 다녔다. 처음에는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너무 떨려서 말을 제대로 못하곤 했는데 그것도 곧 익숙해져 이제는 손에 땀이 차면 서로 자리를 옮겨가며 손을 잡기도 했고, 끊이지 않고 대화도 나누었다.
“너 대학 가서 나 쌩까면 안 된다.”
“너나 쌩까지 마.”
“내가 태영도를? 너는 내가 못 그럴 거 알면서 괜히 그런 말 한다.”
“못 그럴 건 또 뭐야. 그럴 수도 있지.”
“아니, 절대. 절대 안 그럴 건데.”
선선한 바람이 우리 사이를 가볍게 지나다녔다. 너희가 하는 이야기의 진의를 나는 알고 있다는 듯이. 나는 대학에 가서도, 대학 졸업 후에도 계속 연락할 거라는 말을 하는 이은섭이 점차 손에 힘을 주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도 고개만 끄덕였다.
동네를 두 바퀴나 돌고 나서야 나를 버스 정류장에 데려다준 이은섭은 버스가 오기 전에 일상적인 것을 물었다.
“너 생일 언제야? 나는 4월 24일.”
“봄에 태어났구나. 나는…… 아, 다음 주 금요일이네.”
“뭐?!”
격한 반응에 놀라서 움칠 몸을 떨었다. 이은섭은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자리에 앉아 내 손을 쥐었다. 내 생일이 다음 주 금요일인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중학교를 졸업한 후로는 딱히 생일을 챙겨본 적이 없어서 나는 이은섭이 안절부절못하는 걸 구경하는 게 더 대수로웠다. 이은섭은 ‘미리 물어볼걸.’, ‘일찍도 물어본다.’ 하며 자기 이마를 팍팍 내리치더니 내게 불쑥 물었다.
“너 뭐 갖고 싶은 거 없냐?”
“선물 주게? 됐어. 나도 네 생일 못 챙겨줬는데.”
“아, 그거랑 이거는 다르지. 그때는 네가 내 생일인 거 몰랐고 나는 아는데 어떻게 안 챙겨주냐? 정도 없네, 태영도. 너 알고도 내 생일 안 챙겨주려고 그러냐? 우리 사이에 치사하게 그럴 건 아니지?”
숨도 안 쉬고 말하는 이은섭을 구경하느라 내가 탈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이은섭은 익숙한 번호의 버스가 나를 안 태우고 가자 낭패감이 섞인 얼굴을 해서는 내 어깨에 자기 이마를 두어 번 박았다.
“그러니까 그냥 갖고 싶은 거 말했으면 됐잖아…….”
“갖고 싶은 게 없어서 그래. 진짜야.”
“아, 그럼 내가 맘대로 산다?”
“안 사줘도 되고.”
“싫어, 사줄 거야.”
“그럼 마음대로 해.”
어깨에 기대었던 얼굴을 슬그머니 들어 올린 이은섭은 자기가 생각한 것보다 내 얼굴이 더 가까웠는지 연신 헛기침을 하며 손을 조몰락댔다.
“어차피 버스 간 거 편의점이나 가자.”
“응, 그러자.”
“근데 진짜 갖고 싶은 거 없어?”
“없다니까!”
“아오, 사준대도 이러냐, 너는!”
투닥거리면서도 편의점에 가는 내내 손을 잡고 있던 우리는 다시금 버스가 도착했을 때 아쉬운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내일 봐―, 그렇게 소리치고도 나는 한참 동안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가 가는 걸 지켜보는 이은섭을 뒤돌아봤다.
다음 날에도 이은섭은 갖고 싶은 게 있으면 아무거나,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말하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가장 먹고 싶은 걸 말했다.
“모찌롤 사줘.”
“아, 뭔…….”
“모찌롤 먹고 싶어. 끼리 크림치즈 맛.”
“지 같은 것만 말하네. 왜 이렇게 협조를 안 해줘, 자기야!”
“자기야, 모찌롤이면 된다니까.”
“내가 왜 네 자기야!!”
감정 기복이 상당한 이은섭은 자기가 한 말을 내가 좀 따라 하자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러면서도 집에 가는 길에는 모찌롤을 사주긴 했고 우리 둘은 버스를 기다리면서 그걸 하나씩 나눠 먹었다.
“모찌롤 사줬으니까 또 다른 거.”
“이거면 됐어.”
“아직 네 생일 아니거든? 일주일 남았으니까 더 생각해봐. 그리고 케이크에 초도 안 꽂았는데 이게 어떻게 선물이냐? 무슨 열아홉이 이렇게 낭만이 없어.”
“근데 정말 필요한 게 없어서 그래.”
“아오…… 알아서 살게. 버스 왔다, 잘 가!”
내 생일에 왜 이렇게 열을 올리는 건지. 나는 이은섭의 생일을 궁금해한 적도 없고, 그래서 챙겨주지도 못했는데. 더 미안한 건 그 애의 생일을 알았다손 치더라도 돈이 없어 번듯한 선물을 챙겨주지 못했을 게 분명해서였다. 네 생일을 모른 채 지나친 게 조금은 다행스러운 걸 너는 알까?
어제처럼 버스를 못 태우는 불상사가 일어나길 바라지 않는지 서둘러 내 등을 밀어 버스에 태우고서 손을 홰홰 흔드는 이은섭을 향해 소리쳤다. 내 딴에는 단전에서부터 용기를 끌어올려서.
“응, 모찌롤 고마워…… 자기야!”
“……아, 진짜 너 미쳤냐?! 빨리 가!”
버스 기사 아줌마가 나를 보고는 ‘좋을 때다.’라고 작게 말하는 걸 듣고 맨 뒷자리로 향했다.
“내일 봐, 은섭아.”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인 후 나는 새빨간 얼굴의 이은섭이 점으로 변할 때까지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네가 시야에 걸리지 않게 된 후에도 나는 입속에서 되뇌었다. 내일 봐, 은섭아. 또 봐, 매일매일,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