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셨어요? 방금 전에 제작진이랑 같이 왔습니다.”
“커피 한잔할래요?”
“괜찮습니다. 오기 전에 마셔서요. 마음만 받겠습니다.”
“마음은 받아주는 거네요?”
이 새끼는 지치지도 않나. 저번 주말에 프로그램에 계속 출연하는 걸 다시 재고해보라고 갔다가 어처구니없이 한 시간 동안 입술이나 빨리다 온 나는 촬영 장소에 오자마자 들소처럼 들이대는 이은섭에게 기가 질렸다.
이은섭은 주말에 내가 제집을 나갈 때까지 말했다. 족히 50번 정도는 말한 것 같았다. 나랑 사귀자. 싫어? 왜? 내가 인기가 없어서? 네가 필요할 때만 부르는 남자친구여도 괜찮아. 귀찮게 안 할게. 나랑 사귈 수 없는 이유를 100가지 대면 포기할게…….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늘어놓으며 사람을 들들 볶더니만 촬영장에서도 뭇사람 신경 쓰지 않고 대차게 들이대는 게 나로서는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나도 좀 억울한 게, 나는 싫다고 하지 않았다. 다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되었다고 했을 뿐. 그건 내 나름대로는 ‘나 역시 네게 가벼운 호감 이상의 감정이 있어.’란 뜻이었는데 어째 잘 전달이 된 것 같지는 않았다.
“주말은 잘 보냈어요?”
“네? 아, 뭐…… 그냥.”
“그냥? 그냥 어떻게?”
잠시 넋 좀 놓고 있었더니 이은섭은 팬츠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는 연신 사람을 추궁하듯 몰아세웠다. 왜 이래 진짜, 어쩌다 보니 주말의 반을 같이 보냈으면서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정식으로 사귀기로 한 것도 아닌데 마치 사람들에게 알아달라는 듯이 구는 이은섭에게서 한 발짝 멀어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나는 10년 전 네게 저질렀던 일을 정식으로 사과하고 시작하고 싶었다. 정작 너는 고리타분하다고 여길지도 모르지만.
“말 놓지 마시고요.”
“아아―, 태 아나는 너무 딱딱해요. 은섭이 서운해.”
“촤, 촬영 들어가야죠. 얼른 대본 읽어보세요. 저는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은섭이 서운해. 그 말을 듣자마자 고등학생 때 네가 서운하다고 할 때마다 뽀뽀를 해줬던 게 떠올라 나는 황급히 자리를 벗어났다.
“화장실? 나도 같이 가요!”
“왜 저래 진짜……!”
진짜 화장실까지 쫓아오려는지 달려오는 이은섭의 발소리를 듣고 나도 황급히 뛰기 시작했으나 뛰어봤자 벼룩이었다. 기어이 나는 이은섭에게 붙잡혀 화장실 대신 비상구 계단으로 끌려갔고,
“야, 야! 좀…… 나중에, 응? 나중에.”
“뽀뽀 한 번만 해주면. 안 해주면 나 촬영 안 해. 펑크낼 거야.”
“아, 진짜 진상…….”
고등학생 때처럼 네 볼에 뽀뽀를 해줬다.
뽀뽀 한 번만 해주면 조용히 촬영에 임하겠다던 이은섭은 무려 다섯 번이나 뽀뽀를 종용하고선 내 입술을 앙앙 깨물기까지 했다. 누가 늑대 수인 아니랄까봐 이가 날카로워서 인상을 찌푸리자 살금살금 혀로 핥아주는 게 싫고, 또 좋았다.
아마 이은섭도 내가 내심 스킨십을 좋아라 하는 걸 눈치챘는지 뽀뽀를 다 하고서도 귓가를 만지작거리다가 바람 새는 듯한 웃음 소리를 냈다.
“네가 이런 식으로 구니까 사람들이 방송 보고 다 네 팬 됐잖아.”
“내가 뭘 했다고.”
“네가 이렇게 생겨서 말이야, 어? 한 번씩 건드리고 싶게 생긴 게 하는 짓도 귀여우니까 네 팬카페도 생겼잖아.”
“팬카페도 있어, 나?”
“어. 네 팬들이 다음 촬영에는 커피차 보내겠다고 와글와글 신났더라.”
메이크업이 망가지면 안 되니 얼굴은 차마 못 만지고 구레나룻이나 귓바퀴만 쓱쓱 문지르듯 만지던 이은섭은 인상을 팍 찌푸리고는 갑자기 내게 팬이 생긴 게 고깝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팬 많아져도 너는 인기에 취하고 그러면 안 돼. 알았어, 몰랐어.”
“아나운서 인기가 많아져 봤자지…….”
“아냐, 인기 존나 많아서 놀랐어. 네 팬카페 글 리젠 빠르더라.”
“그래? 근데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어? 아, 어, 우리 매니저가 말해줘서 알지. 하여튼 자만하지 말아라. 가자.”
자만하지 말라는 의미라며 또 뽀뽀 공격을 한 이은섭은 내친김에 한 번 나를 꽉 끌어안고 나서야 앞장서서 비상구 계단을 벗어났다. 나는 얼굴에 오른 열을 식히느라 1분 정도 늦게 오늘 촬영할 사무실 안으로 향할 수 있었다.
정갈하게 쓰여진 대본이 있기는 하지만, 기본적으로 체험, 삶의 가치는 대본이 그대로 적힌 큐시트대로 흘러가는 방송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돌발적인 상황에 출연진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지켜보는 재미가 있는 프로그램이었지. 그런 의미에서 이은섭은 제작진이 좋아할 수밖에 없는 출연진이었다.
“오늘은 은섭 씨와 연이 깊은 AQ 잡지의 에디터 1일 체험을 하러 오게 되었어요. 은섭 씨가 AQ 잡지의 표지 모델을 하셨을 때 전국 품절이 떴다고 들었는데, 아마 그때 잡지 100호 출간 기념 표지를 모르시는 분이 없을 거예요.”
“영도 씨도 잡지 표지 보셨어요?”
“그럼요. 워낙에 유명한 사진이어서 모르고 지나갈 수가 없었죠.”
“오―, 그럼 사진 본 소감 말씀해주실 수 있으세요?”
“네?”
오늘도 대본대로 무난하게 갈 생각이 없어 보이는 이은섭이 불쑥 얼굴을 들이밀며 묻는 말에 식겁해서 뒤로 고개를 뺐다. 지켜보던 사무실 직원들이 꺅꺅거리는 소리에 제작진의 표정이 흐뭇하게 변하는 것을 보니 당황스럽다고 엔지를 내면 나만 이상한 놈이 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리고 나도 이제는 이은섭의 행동에 어느 정도는 장단을 맞춰줄 용의가 있기도 했다.
“살면서 본 사람 중에 제일 잘생겼다고 생각했어요.”
“…….”
못 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눈에 띄게 뚝딱거리는 이은섭을 모른 척하고 카메라를 향해 팔을 뻗었다.
“……자! 그러면 오늘 잡지사 에디터로서 체험, 삶의 가치 시작합니다!”
이은섭이 한 박자 늦게 팔을 뻗는 바람에 어설픈 그림이 완성됐다. 그게 웃겨서 방송인 것도 잠시 잊고 소리 내어 웃자 그 애도 나를 따라 웃었고, 촬영 감독이 둘이 진짜 뭐 있냐고 물어봐서 우리는 사이좋게 고개를 저었다. 사귀지는 않지만, 뽀뽀하는 사람은 서로뿐인 사이라는 걸 굳이 밝히고 싶지 않아서.
* * *
에디터라고 하기에 글을 보는 일만 할 줄 알았는데 패션지 특성상, 그리고 방송으로 흥미로울 법한 내용을 송출하기 위해서는 글만 내도록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두 분은 오늘 패션지 에디터 체험을 하실 건데, 저희가 요즘 짧은 영상도 올리고 있거든요. 룩북 형식으로요. 그걸 두 분께서 서로 세 벌 정도 코디를 해서 입는 방식으로 촬영을 해보려고 하는데 괜찮으시죠?”
“혹시 옷을 다 벗고 시작하는 건 아니죠……?”
“필요 이상의 노출은 없을 거예요. 옷 갈아입으실 공간도 따로 마련되어 있으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