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죽을 것 같아.”
별의별 쓰잘데기 없는 말을 하는 동안 미동도 않고 색색 숨만 몰아쉬는 태영도의 얼굴을 뜯어보다가 충동적으로 코끝과 입술에 입을 맞췄다. 날파리를 쫓듯이 이불을 쥐고 있던 손을 들어 작게 반원을 그리던 태영도를 내려다보던 나는 멀찍이 떨어져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대로 머리를 박았다.
“미친놈, 죽어, 이 쓰레기야.”
자는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지. 뒤늦게 쪽팔림과 후회가 몰려왔으나 나는 자괴감이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무릎걸음으로 태영도에게로 가 입술을 들이밀었다. 이번에는 뽀득뽀득한 볼에 쪽, 입을 맞추었는데 그래도 태영도가 깨지 않아서 그 애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고서 한참 동안 가만히 있었다.
“그러니까 누가 자래…… 고양이한테 생선을 맡기지.”
앞으로도 네가 우리 집에서 잔다면 나는 도둑 뽀뽀를 하겠지? 그때마다 네가 깨지 않길 바라며 나도 네 옆에서 낮잠을 청했다.
걱정과 달리 나의 도둑 뽀뽀는 오래가지 못했다. 태영도가 뽀뽀당하는 걸 그리 싫어하지 않은 덕분에. 이건 전적으로 내 시선에서 말하는 거긴 하지만, 내가 보기에 태영도는 뽀뽀해주는 걸 퍽 좋아하는 것도 같았다. 어떨 때는 살짝 고개를 외로 틀어주며 입술이 닿기 좋게끔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니 너를 안 좋아할 수가 있냐고…….
매일 사소한 일로도 네가 좋아져서 곤란하던 내게 태영도에게 점수를 딸 만한 기회가 생겼다. 9월 24일. 태영도의 생일이었다. 내 생일은 4월 24일인데 태영도 생일도 24일이네, 완전 운명.
생일을 맞은 태영도보다도 들뜬 나는 토끼 아빠에게 도움을 청했다.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있었다면 생일을 챙겨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돈을 좀 아껴 썼을 텐데 그런 경험이 없으니 아빠에게 손을 벌릴 수밖에 없었다.
“생일 선물? 영도는 뭐 갖고 싶다고 말 안 했어?”
“걔는 원래 그런 말 잘 안 해. 무슨, 나보고 모찌롤을 사달라는 거야. 웃기지, 아빠?”
“영도가 착해서 그래. 은섭이 너한테 부담 주기 싫어서 그랬나 보다.”
한 번에 원하는 걸 말하면 좀 좋을까, 생각하던 나는 아빠의 말을 듣고 태영도가 더 좋아졌다. 생일에도 내 생각을 먼저 하는 태영도. 그래서 더 그 애에게 정말 거창한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선물로 받는 건 조금 쓸모없어도 번지르르한 걸 주면 좋다지만 나는 쓸모도 아주 차고 넘치는 고가의 선물을 해주고 싶었다. 아빠는 그런 내게 딱 적당한 아이템을 제시했다.
“태블릿 피시 어때? 예전에, 은석 씨가 나한테 맨 처음으로 선물해준 게 그거거든. 그걸로 인강도 듣고, 게임도 할 수 있으니까 영도도 좋아할 것 같은데. 은섭이 생각은?”
“좋아! 나 대학교 가자마자 알바해서 갚을게요, 아빠. 감사합니다!”
“영도랑 잘되는 게 갚는 거지. 얼른 영도랑 사귀어야 우리 은섭이 한숨이 줄 텐데.”
“엄―청 잘돼가고 있으니까 걱정 마. 아빠 진짜 고맙습니다!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어울리지도 않는 애교를 떨어대며 그 애에게 줄 태블릿 피시를 샀다. 내가 쓰는 것과 똑같은 것으로. 기왕 사는 거 커플 템이면 좋으니까.
“맘에 들어. 잘 쓸게.”
“아―, 무슨 선물 받고도 반응이 이러냐? 좀 더 왁! 하고 좋아해야 재밌지.”
다행히 태영도는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기색이었다. 이게 다 뭐냐며, 좋으면서 괜히 부담스러운 척하는 것도 귀엽기만 했다. 나랑 사귀면 앞으로는 너 돈 쓸 일 하나도 없을 거라는 말까지 하려다가 내 돈도 아니고 아빠들 돈으로 유세 떠는 것 같아서 입을 다문 건 비밀이었다.
“쓸 때마다, 네 생각 할게.”
그렇게 말하며 내 두 번째 손가락에 입 맞추는 너도 분명히 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태영도는 스무 살이 되자마자 나와 사귈 수 없다고, 이미 만나는 애가 있다고 말했다. 추위나 술기운 때문이 아니라 쪽팔림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걸 들키기 싫어 정신 사납게 연신 마른세수를 하는데도 마음이 다 잡히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욕을 너무 많이 한 거? 아니면 좋아하는 티를 너무 많이 냈나? 그도 아니면 정반대로 표현이 너무 부족했나?
답이 나오지 않아서 무작정 네게 키스부터 했다. 술을 마시면서 다른 안주는 안 먹고 과일화채나 깨작이더니, 태영도와의 키스는 새콤달콤해서 더 슬펐다. 이런…… 이런 귀여운 새끼를 내가 왜 다른 놈한테…….
“……최악의 첫 키스네.”
태영도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 한 말이었는데 우는 너를 보니 내 마음이 더 안 좋았다.
나는 그날 밤거리를 배회하다 동이 터오기 전 집으로 들어갔다. 중학생인 은조가 나를 보고 ‘형, 무슨 청승을 이렇게 떨어.’라고 말하면서도 감기약과 비타민을 살뜰히 챙겨주는 것마저 슬펐다.
골골대면서 실연의 아픔에 괴로워하던 나를 위로해주는 건 의외로 늑대 아빠였다.
“차였냐.”
“…….”
“아버지 돈 끌어다가 웬 놈의 꽃꽂이과에 들어가 놓고는 차이기까지 했냐, 이은섭이.”
“아, 왜요……!”
“어리긴 어리다. 차였다고 울고. 아버지는 차여본 역사가 없어서 네 마음을 모르겠지만.”
듣기도 싫어서 아빠를 쳐다보지도 않고 돌아누워 있던 나는 다음 말에 힘을 얻었다.
“가오 죽게 포기하진 말고, 알겠지?”
“……알아서 할게요.”
“늑대 수인 가오가 있지. 너 설마 첫사랑이랑 이어질 자신 없냐? 아―, 호적에서 이은섭이 이름 파내련다. 앞으로 우리 집 장남은 이은조다.”
“아, 좀 나가요!”
우는 걸 들키기 싫어 괜히 더 씩씩거렸으나 아빠 덕에 나는 대학교를 다니면서도 태영도를 조용히 쫓아다녔다. 태영도에게 관심이 있어 보이는 놈들이 있으면 남녀를 막론하고 내가 소개팅을 주선했고, 정 안 되면 태영도가 오래 사귄 애인이 있다고 거짓말을 쳤다. 그러나 내가 그렇게 연막을 치지 않아도 태영도는 정말이지 누굴 만날 여유가 없었다.
오전 강의가 없는 날엔 카페 알바, 저녁에는 과외, 주말에는 대외활동과 프랜차이즈 음식점 알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태영도는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힘들어 보였다. 나는 대학생 태영도를 4년간 따라다니며 내가 얼마나 내 생각만 했는지 깨달았다.
저렇게 열심히 사는 애한테 생일 선물로 태블릿 피시를 사주고, 죽을힘을 다해서 들어간 대학에 기부 입학을 하게 되었다고 말해선 안 되는 거였다. 그냥 네 말대로 모찌롤만 사주고 내 수준에 맞는 대학에 들어갔다면 네가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거짓말을 할 일도 없었을 텐데.
도서관에서 몰래 잠든 네게 종합비타민과 힘내라는 쪽지를 남기고 간 날, 너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쪽지 하나를 남겨놓고 갔다.
감사합니다. 누군지 모를 좋은 분에게도 항상 행복한 일과 행운만 가득하길 바라요^^
나는 그 쪽지를 아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이런 종이 쪼가리도 버릴 수 없는데, 너를 어떻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까.
* * *
대학을 졸업하고 난 후에는 태영도의 소식을 접할 곳이 마땅치 않았다. 어디에서 인턴을 한다더라, 어디 신입으로 들어갔다더라, 그런 이야기를 듣기는 했다. 태영도는 잡지사나 신문사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 같았다. 나는 졸업 후 뭘 해야 하나, 방황하다가 태영도를 만나려면 우선 얼굴부터 알리는 게 중요할 것 같아 배우가 되기로 결심했다.
애초에 공부에도 재능이 없고 사무직도 내 길이 아닌 것 같아서 소속사가 생긴 후로는 말 그대로 개처럼 일만 했다. 다행히 소속사 대표가 작품을 보는 눈이 괜찮아서 초반에는 부족한 연기력을 커버칠 수 있는 작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처음부터 배우에 대한 꿈을 갖고 있던 게 아니라 걱정스러웠지만, 다행히 노력하는 만큼 연기력이 늘어서 발연기 배우로 불리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문제는 예상보다 내가 너무 유명해졌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