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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섭이 잠옷을 갖고 오라고 했지만 정말 잠옷을 챙길 생각은 없었다. 걔네 집에서 정말 자고 올 것도 아니고. 그러나 나는 이은섭이 한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이은섭의 집에 가기 전까지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랐다. 이은섭이 한 말을 일일이 다 곱씹어보고 있는 스스로에게 충격받아 나는 옷장을 쾅 소리 나게 닫아버렸다. 별생각 없이 나를 놀리려 한 말에 잘 놀아나고 있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누구세요.”
“태영도입니다.”
예술가며 연예인, 재벌 3세가 몰려 사는 동네를 말하기에 집이 좋을 것은 예상했지만, 내가 생각했던 좋은 집의 모습을 훨씬 상회할 정도로 좋은 집에 나는 살짝 기가 죽었다. 그런 와중에도 10년 전에 지겹도록 드나들던 이은섭의 본가보다는 얌전한 집이라고 생각하는 내가 우스웠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여섯 시 반밖에 안 됐는데요.”
“그러니까요. 늦었어요. 난 다섯 시부터 우리 저녁 뭐 먹을지만 생각하고 있었다고요.”
“회사원은 보통 여섯 시까지는 일하잖아요. 저도 빨리 오고 싶었습니다.”
“아, 망했어. 떡볶이 만들었는데 다 퍼졌잖아요, 맛대가리 없게.”
문을 활짝 열며 나를 집 안에 들인 이은섭은 내가 감상에 빠질 틈도 주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내가 늦게 왔기 때문에 자기가 해놓은 떡볶이가 모두 퍼졌으며, 몇 시에 올 거라고 말을 안 해주니 자기는 항상 저녁을 먹는 시간에 맞추어 상을 차려놓은 것이라고 성심성의껏 투덜거리는데 내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죄송……할 일은 아니지만,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 맞죠, 난 식단 조절해야 돼서 떡볶이 같은 거 안 먹습니다. 다 태 아나 때문에, 어? 내가 태 아나 주려고 손수 떡볶이를 해놨는데 지금 늦어놓고는 죄송할 일은 아닌데 죄송합니다? 참 나, 진짜 염치가 없어도 이렇게 없는 사람이었어요? 됐어요, 버릴 순 없으니까 앉아서 먹어요!”
배우가 아니라 래퍼 해도 되겠네……. 하도 빠르게 말해서 뭐라고 반박도 못 하고 자리에 앉았다. 이은섭은 화가 난 사람치고는 매너가 아주 좋았다. 내가 먼저 손을 대기 전에 의자를 빼서 앉게 해주고 수저와 젓가락, 포크까지 챙겨주고서는 음료는 뭐가 좋은지까지 물었다. 내가 이은섭의 집에 온 건지, 분식집에 온 건지 헷갈렸다.
이은섭이 챙겨주는 대로 가만히 앉아 있던 나는 불어터진 떡볶이를 한 입 먹고서 그 애에게 손짓했다.
“은섭 씨도 앉으세요. 우리 프로그램 때문에 오늘 만난 거니까요.”
별 뜻 없이 한 말이었다. 그리고 사실이기도 했다. 그 망할 놈의 프로그램만 아니었다면 내가 이은섭 혼자 사는 집에 올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은섭은 순식간에 삐딱한 표정을 짓더니만 우당탕쿵탕 소리를 내며 요란스럽게 내 맞은편에 앉았다. 이유를 알 수 없어 묵묵히 떡볶이만 먹던 나는 불만이 가득 묻어나는 목소리에 눈동자만 들어 올려 그 애를 쳐다봤다.
“둘이서 있을 때는 말 놓으면 안 됩니까?”
이제 보니 샤워 가운만 입고 있네. 이은섭이 나를 집으로 부를 때부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할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라 나는 불었어도 꽤 맛있는 떡볶이를 집어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왜요? 우리 고등학교 동창이잖아요. 그냥 동창도 아니고 스무 살 되자마자 키스도 한 사이인데 왜 안 돼요?”
그러나 이은섭이 즉석에서 아까 전의 랩에 이어 버스2를 시작함에 따라 내 식사는 끝나고 말았다.
“옛날에 키스하고 나 찬 게 껄끄러워 그래요? 나는 다 잊었어요. 그러니까 태 아나도 편하게 생각하고 나한테 예전처럼 은섭아―, 그렇게 불러도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단 말입니다. 혹시 껄끄럽다면 왜 껄끄러워요? 보통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어야…….”
“잠깐, 잠깐만요.”
“네, 말씀하세요.”
“무슨, 말할 틈도 안 주시고…….”
“제가요?”
“……우선 식사부터 다 하고 말해요.”
“전 식사 다,”
“이은섭.”
충분히 납득 가능한 말도 이런 식으로 무작정 쏟아내기만 하면 안 받아들여지는 게 당연지사였다. 식사를 더 할 생각은 없었지만 나는 이은섭의 입을 우선 막고 싶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할 대화에 앞서 내 입장을 정리할 시간도 벌고 싶었고.
“어, 어?”
“떡볶이 먹으라며…… 먹겠다고.”
“어…… 그래라.”
흐물흐물해진 양배추와 양파를 우물거리며 생각했다. 이은섭은 내가 은섭아―, 그렇게 불러주던 시절이 그리운 걸까, 하는. 그런 생각을.
식사를 제대로 끝마칠 수 있을까 생각했던 게 무색하게도 나는 이은섭이 만들어준 떡볶이 한 접시를 말끔히 비워냈다. 이은섭이 무슨 생각으로 떡볶이를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이게 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 성공했다. 나는 떡볶이를 먹으며 10년 전 너네 집에 놀러 가서 하릴없이 희망찬 생각만 하던 과거를 떠올렸으니까.
그 시절 나는 이은섭이 해주는 떡볶이를 좋아했다. 굳이 떡볶이가 아니더라도 이은섭이 주는 거면 그저 좋았고, 나도 이은섭에게 무엇이든 해주고 싶어 안달이 났던 시절이었다. 너랑 침대에 같이 누워서 우리 어른 되면 이런 거, 저런 거 다 하자…… 그렇게 말하던 것도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너도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생각 해요?”
“언젠 말 놓자면서요.”
“……10년 만에 보니까 아무리 나라도 좀 어색해서 그럽니다. 왜요, 불만 있어요?”
“불만은 이은섭 씨가 저한테 많아 보이는데요…….”
그리고 지금 이은섭은 나를 곤란하게 만들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군다.
식사를 하는 내내 뚫어지라 쳐다보면서 얼른 밥 먹고 나랑 밀린 회포나 풀자, 그런 식으로 눈치를 주던 이은섭은 막상 내가 각을 잡고 앉자 미적거리며 대화 시기를 유예했다. 왜 저래 진짜……. 가뜩이나 샤워 가운만 입고 있어서 눈을 어디에 둘지 모르겠는데, 어울리지 않게 시선을 피하고 발가락을 꼼질거리는 이은섭은 적응하려야 적응할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시비조로 들릴 것 같아서 나는 차라리 일 얘기부터 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별로 궁금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프로그램 기획안과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해주는 게 좋겠지. 표면적으로는 일 때문에 방문한 것이니 서류를 챙겨 오기는 했다.
제대로 이야기를 해볼 생각이었기에 나는 멀뚱멀뚱 소파에 앉아 차를 홀짝이는 이은섭에게서 등을 돌려 가방을 들었다. 내도록 가만히 있던 그가 내가 일어났다고 버럭 화를 낼 줄은 몰랐다.
“자리에 앉아요!”
“네?”
“밥 먹고 그냥 갈 거면 왜 왔어요, 대체? 그때나 지금이나 아주 사람 멕이는 데는 도가 터서…….”
“그게 아니라 기획안 드리려고 한 건데…… 여기요. 이번 회의 때는 못 오셔서 제가 대신 챙겨 왔습니다. 받으세요.”
“……그럼 이런 걸 챙기려고 일어서는 거라고 좀 말을 하세요.”
키우는 개한테도 이렇게는 안 할 것 같은데. 이은섭은 술 마신 사람처럼 한순간에 불콰한 얼굴이 돼서는 연신 마른세수를 했다. 오히려 얼굴을 붉히며 짜증 내야 할 건 내가 아닐까. 그러나 이은섭이 당황해하는 걸 보는 게 신기하기도 했고, 이은섭의 말마따나 10년 전에 그런 식으로 관계를 끝낸 건 100퍼센트 내 잘못이 맞았다.
이해해야 하는 입장임을 알고 있었고, 프로그램의 존폐가 이은섭에게 달려 있는 만큼 나는 고분고분 말했다.
“자리에 앉겠습니다―.”
“아, 진짜 태영도…….”
이은섭을 열받게 만드는 게 여전히 재미있다니, 나도 참 나였다.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걸 간신히 숨기고서 다음 촬영지에 대해서 말했다. 다음 촬영지는 젖소 농장이었다. 처음 회의실에서 그 소식을 접하고 제작진이 우리에게 바라는 그림이 무엇인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서 영 껄끄러웠는데, 이은섭도 알 거 다 아는 나이이다 보니 그게 바로 보인 모양이었다. 이은섭은 입술을 삐죽 내밀면서 ‘송아지에게 젖 먹이기’라고 프린트된 부분을 가리켰다.
“태영도 이거 하기 싫어할 것 같은데.”
“사람을 바로 앞에 두고 남 얘기하듯이 하시네요.”
“말 놓으라고.”
“어, 그래. 하기 싫다. 됐냐?”
“아하하하! 소젖 짜기. 이것도 하기 싫지?”
“그냥 다― 하기 싫어.”
그 후로는 이것도 싫어, 저것도 싫어의 향연이었다. 나는 이은섭이 가리키는 것마다 다 하기 싫다고 고개를 저었고, 이은섭은 그때마다 뒤집어지게 웃으며 다 하기 싫어서 어떡하냐고 나를 약 올렸다. 우리는 예전처럼 서로의 팔을 치며 그만 좀 하라고 깔깔거리다가 이럴 사이가 아닌데, 싶어져 입을 다물었다.
“야.”
“왜.”
“나는 너랑 이 프로그램 하는 거 안 싫어.”
속내를 읽기 힘든 모호한 표정을 지은 이은섭은 낯선 사람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대놓고 내게 잠옷을 갖고 오라던 이은섭에게 한마디 해주고 싶은데, 길게 말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래서 아주 짤막하게 화답했다.
“나도, 그래.”
“…….”
“촬영일에 보자.”
이은섭의 집에서 나오자마자 무언가를 떨쳐내고 싶은 것처럼 내달렸다.
너는 내게 키스할 것처럼 다가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