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초반에는 만날 시간이 잘 안 날 거라는 말은 진짜였다. 일주일에 단 한 번도 못 만나게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 못 했던 나는 이은섭에게 연락이 오기만을 기다리며 핸드폰을 들여다보기 바빴다. 먼저 연락을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그게 이은섭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아 하지 말자고 결심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러니 이은섭에게서 먼저 온 연락을 거부할 수 있을 리가.
“저 잠시 통화 좀 하고 들어가겠습니다. 먼저들 들어가세요!”
“그래, 애인이랑 통화 잘하고 와―.”
식사 후 사무실로 돌아가려는 차에 온 이은섭의 메시지를 확인하고 나는 공터로 향했다. 아나운서 선배들과 동기들 모두 내가 연애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다. 아닌가, 그 찌라시를 봤다면 대충은 짐작하고 있으려나.
어찌 되든 간에 매너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꼬치꼬치 캐묻고 불편하게 만드는 일은 전혀 없었다. 나는 좋은 동료들을 만났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이은섭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태영도 보고 싶다.
“……나도 보고 싶어.”
-아빠들이 너한테 금칠했냐고 눈치 준다. 보여준다고 해놓고 왜 소식 없냐고. 아오, 나도 못 보는 애인을 단박에 보여줄 줄 알았나 봐. 어이없어.
“나는 주말에는 다 시간 돼. 맡고 있는 프로그램도 얼마 없고, 유튜브 짤막하게 올라가는 영상 기획이랑 촬영에만 참여하면 돼서.”
-유튜브?
벤치 틈새로 빼꼼 싹이 난 걸 바라보며 활달하기 그지없는 이은섭의 목소리를 따라가던 나는 갑자기 심기가 불편해진 그 애가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 사람들이 또 너 보잖아.
“유튜브로?”
-어. 하여간에 방송쟁이들 인물 괜찮은 놈만 있으면 어떻게든 조회 수 끌어올리려고…….
“네가 할 말이야? 너는 드라마며 영화며 주구장창 나오면서.”
-태 아나는 내가 질투 나서 요절하면 책임질 거야?
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살다 살다 질투 때문에 요절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드러내놓고 툴툴거리며 나를 남들에게 보여주는 게 싫다고 유난을 떠는 건 좋아서 신발 앞코로 바닥을 톡톡 쳤다.
“그래서 아버님들은 언제 뵈러 가면 되는데?”
-음…… 다음 주 주말 괜찮아? 그 할저씨들은 나오라면 나오니까 너랑 나만 시간 맞추면 돼.
“응, 괜찮아. 선물은 뭐 사는 게 좋을까? 나 어른들께 선물 드려본 적이 없어서 뭘 사면 좋을지 모르겠어.”
-선물은 무슨 선물? 아들 구제해줘서 고맙다고 아빠들이 너한테 줘야 할 것 같은데. 그냥 대충 등산 양말이나 사. 딱히 필요한 것도 없을걸.
“등산 양말은 좀 그런데…… 그냥 알아서 살게. 근데 우리 그 전에는 못 만나?”
이은섭이 연애의 시작과 동시에 결혼, 결혼 염불을 외서 그런가 나도 당연히 이은섭과 결혼을 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첫사랑과의 결혼이라니, 괜찮은 정도가 아니라 아주아주 좋기도 했고.
다만 그러다 보니 이은섭의 아버지 두 분을 뵙는 게 거의 결혼 허락을 받으러 가는 것처럼 내게는 부담이었다. 두 분을 뵙고 난 후에는 나의 조부모에게도 이은섭을 소개해야 할 테니 그에 대한 마음의 준비도 해야 했다.
결혼은 서른이 되는 내년에 하면 좋겠지, 나는 뭘 준비하면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능글거리는 이은섭의 말소리에 한순간 긴장이 풀렸다.
-흐흥, 그 전에 못 만나면 울 것 같아? 그럼 보러 갈게.
“울기는 무슨. 내 나이가 몇인데.”
10년 전에 이은섭과 헤어질 때 빼고는 딱히 크게 운 기억이 없었다. 감정의 진폭도 크지 않았고. 그러나 나는 이은섭이 많이 보고 싶었다.
놀리는 투가 확실한 이은섭에게 나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울면, 와 줄 거야……?”
-어?
“아냐, 됐어.”
-아, 어, 갈게. 어…… 오늘 저녁에 갈게.
“응? 은섭아, 이은섭!”
오늘 보자는 말을 끝으로 통화가 끝났다. 고작 3분밖에 안 되는 통화였는데 할 게 꽤 많아져서 걸음을 조급히 옮겼다. 우선 오늘은 이은섭이 올 테니 집을 깨끗이 청소해야겠다. 그러려면 칼퇴를 해야지.
하루 종일 이은섭을 볼 생각에 들뜬 걸 가라앉히기에 급급했다. 몇 번이나 시간을 확인하며 퇴근만 기다리던 나는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나가기 시작할 때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자리에 앉은 지현 씨에게 인사를 하고 난 후에는 평소 타지도 않던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하니 여섯 시 반이 채 되지 않은 시각이었다. 좁은 집에 청소할 게 뭐 이리 많은지. 이은섭이 언제 올지 모르니 30분 동안 빠르게 청소를 마쳤다. 오늘 와서 자고 가면 좋겠지만, 그냥 잠깐 얼굴만 보고 가도 좋을 것 같았다.
“어디쯤이야?”
-조―금 늦어질 것 같은데. 쉬고 있으면 너네 집 앞에 도착해서 연락할게.
“응, 조심히 와.”
아니, 실은 몇 시간 동안 너를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었다. 네가 촬영에 들어가고 얼굴도 못 본 게 벌써 2주째였으니까. 촬영 스케줄이 빡빡하다고 하기는 했다. 그래서 나도 어느 정도는 각오를 하고 있었고. 다만 너를 좋아하는 마음의 크기를 간과한 게 실수였다.
일이 주 정도 못 보는 건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뭐 별거라고. 네가 나를 못 봐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우스갯소리를 할 때 주접 좀 떨지 말라고 하기도 했다. 내가 이렇게 될 줄은 모르고서.
이은섭은 자기가 나를 훨씬 더 좋아한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고 그건 나도 반박할 여지가 없었다. 10년간 한 사람만 기다린다는 게 보통 일은 아니니까. 그러나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누군가를 만날 기회가 있어도 ‘이은섭 좋아했던 것처럼 좋아하지 않는데 어떻게 만나지.’라는 생각이 연애를 막았고, 너를 다시 만난 후에는 절대 헤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굳건히 믿었다.
삶에 유일무이한 존재가 생기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끝 간 데 없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마음에 대해 곰곰 생각하는 동안 나는 네 모습만 그렸다.
-영도야, 나 다 왔어. 문 열어줘.
전화를 받자마자 알겠다는 짧은 답도 못 하고 바로 현관문을 열고 너를 맞았다. 씻지도 못하고 왔는지 땀 냄새가 풍겼고, 그걸 가리기 위해 뿌린 향수 냄새도 났다. 반짝반짝 빛나는 금안은 내게 한없이 자상한 네가 늑대 수인이라는 걸 여실히 드러냈다.
“왜 이렇게 급하게 왔어, 천천히 오지.”
“거의 도망치듯이 온 거라…… 나 빨리 또 가봐야 돼.”
“얼마나 빨리? 자고 가는 거 아니었어?”
“나도 자고 내일 가고 싶은데, 아오 씨발! 액션신이 초반에 몰려 있어서 죽을 뻔했어. 여기 봐봐, 나 멍도 들었어.”
덩치도 작은데 꾸역꾸역 너를 안아주겠답시고 네게 매달린 나를 한 품에 안고 있던 이은섭은 갑자기 훌떡 배를 깠다. 단번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제 막 멍이 들기 시작한 곳과 사라져가고 있는 멍이 혼재했다.
“미친 새끼, 그 감독 내가 죽일 거야.”
“어?”
“죽일 거라고. 애를 어디에 던지면서 촬영했나, 멍이랑 상처가 왜 이렇게 많아!”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감독을 죽여버릴 거라고 하자 이은섭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내 등을 토닥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계속 열을 냈다. 누구는 불면 날아갈까 안으면 꺼질까 애지중지하는 애인을 왜 막 굴리는 것이냐며 소리치자 이은섭은 도저히 못 들어주겠다며 제 입술로 말을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