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 한번 말해봐. 네가 10년 전에 구라 치고서 나 찬 거는 예상하고 있었어.”
“그거 알고 있었으면 달리 할 말이 없는데?”
“할 말이 왜 없어? 지난 10년간 상처받은 은섭이한테 해명을 해야 할 거 아냐.”
침대 헤드에 기대어 눕듯이 앉은 이은섭은 쉴 새 없이 조물조물 나를 만져댔다. 그 손길에서 묻어나는 애정을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나는 자연스럽게 내 손을 들어 올려 이은섭의 손등에 쪽쪽 뽀뽀했다.
사실은 내가 엄청나게, 아마 네가 아는 사람 중에서는 가장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왔기에 너에 대한 열등감이 컸다는 말을 전하기가 10년이 흐른 뒤에도 쉽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 한 인터뷰가 네게 사실대로 말하자는 마음을 굳혔다. 반은 허세겠지만 첫사랑과의 재회를 위해 배우가 되었다는 네게 솔직하지 못해 다시 멀어지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 애기였을 때 엄마랑 아빠랑 돌아가셨거든.”
“응.”
“그래서 할머니랑 할아버지 밑에서 컸어. 고3 때 담임이 그래서 더 신경 써준 것도 있고……. 너랑 같은 반이었을 때 나도 너를 집에 초대하고 싶었는데.”
입이 말라서 괜히 마른세수를 했다.
나도 너를 초대하고 싶었다. 집에 비가 새지 않는다면, 곰팡이 냄새가 조금만 덜 나는 집이었다면 너를 초대했을 것이다. 너랑 자기 전까지 이야기하는 게 좋았으니까. 네가 주는 것보다 좋은 걸 줄 수는 없겠지만 그에 엇비슷한 것이라도 줄 수 있었다면 언제고, 몇 번이고 너를 내 공간에 불렀을 텐데.
“그때는 내가 너무 어려서 가난하면 연애도 하면 안 되는 줄 알고 그랬는데, 이제는 싫어.”
지금도 내가 잘산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번에 너를 놓치면 완전히 끝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결혼까지 가는 건 힘들지 몰라도, 너랑 연애는 꼭 한번 해보고 싶었다. 살면서 너만큼 좋아할 상대가 다시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이제야 섰다.
목이 메어 헛기침을 하자 너는 나를 품 안 가득 끌어안고서 뒤통수를 쓰다듬어줬다. 그리고 나는 네 덕에 울지 않았다.
“나 꽃 별로 안 좋아해.”
“…….”
“너 아니었으면 대학 안 갔을 거야. 늑대 아빠한테 공부 못해서 대체 몇 억을 쓰게 하는 거냐고 존나…… 존나 혼났어, 그때.”
“내가 이런 말을 하는데 왜 웃기고 그래?”
“아니, 웃을 일이 아니야. 그러니까 나는, 어?”
나는 네가 알아주길 바랐어.
이은섭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 콧방울을 아프게 쥐어 비틀었다. 분명 코가 빨개졌겠지. 그래도 난 울지 않았다.
“너 아니면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꽃을 4년이나 만질 일도 없었는데. 주제에 안 맞는 대학에 어떻게든 가고 싶었던 이유는 너 하나였는데…….”
오히려 나보다 더 울먹거리는 이은섭을 달래주느라 내가 10년 내내 마음에 켕겨 하며 안고 있던 고민은 순식간에 기화했다. 가난에 짓눌려 좋아하는 애한테 좋아한다고 말도 못 하던 열아홉 살 태영도는 내가 붙잡을 수 없을 정도로 먼 곳에 가버린 듯했다.
내 탓을 조금이나마 할 줄 알았는데 이은섭은 그러는 대신 턱에 주름이 지도록 심통이 난 표정을 짓고서 이불 속에 숨어들었다. 이은섭의 마음에 여전히 남아 있을 열아홉 살 이은섭을 달래줄 때인 것 같아 나도 살그머니 그 애가 있는 이불 안으로 들어가 허리를 끌어안았다.
“미안해.”
“됐어. 넌 항상 그런 식이야.”
“너 꽃이랑 잘 어울려, 은섭아.”
“그래서 어쩌라고.”
화도 하나 안 났으면서 새침하게 구는 이은섭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네가 너무 좋아.”
“…….”
“내가 잘해줄게, 나랑 사귀자.”
“……내가 더 잘해줄 거거든?”
“아하하! 간지러워, 그만해!”
새침하게 내 위로 올라타는 이은섭의 귀에 속삭였다. 지금은 혼자 사니까, 너도 우리 집에 놀러 오라고. 나중에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인사도 가자고.
뱁새와 함께 춤을
“오늘부터 네 짝이고, 나는 태영도야.”
동글동글……보다는 땡글땡글한 애와 새로운 짝이 되었다.
* * *
나보다 10센티미터 넘게 작고 공부를 뒤지게 잘함. 우리 반 반장. 반 애들이 좀 어려워하는 것도 같음. 잘 안 웃는데 엄청 친절함. 담임이 존나 아낌. 교복 맨날 단정히 입고 다님. 야자 하나? 하는 것 같음.
사흘간 태영도를 관찰한 결과를 종이에 단순 나열했다. 눈이 땡그래서 귀엽게 생긴 태영도는 의외로 잘 안 웃었다. 반 애들이 뭘 물어보러 오거나 같이 어울리려 하면 입은 웃는데 눈은 잘 안 웃던 게 생각나 ‘입은 웃고 있음.’이라고 덧붙였다.
두루두루 친한 반 분위기에 나만 겉도니 담임이 반장을 짝으로 붙여줬으리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가능했다. 나라고 내가 겉도는 걸 모르는 게 아니니……. 지금껏 담임의 지시로 인해 억지로 내 짝이 되었던 무수한 남자애들이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내가 특별히 욕을 하거나 겁을 준 것도 아닌데 반 애들은 나를 꺼려 했다. 아마 예전에 내가 우리 부모님 욕한 새끼를 좀 팼다고 소문이 돈 모양이었다. 근데 그건 맞을 짓을 해서 때린 거였다. 가만히 있는 반 애들을 내가 왜 때릴 거라고 생각하는지 이해되지 않아서, 해명도 안 했을 뿐인데 언젠가부터 고립되었다.
“아마 태영도도 그냥 자리 바꾸겠지.”
내 옆에 좀 붙어 있던 애들도 내게 별게 없다고 판단이 서면 순식간에 자리를 바꾸곤 했다. 나는 태영도도 그러리라 생각하며 그 애에 대해 이것저것 적은 종이를 보기 싫게 구겨버렸다.
* * *
왜 자리를 안 바꾸지?
2주가 다 되도록 태영도는 내 옆에서 공부만 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그냥 공부만. 틈틈이 훔쳐보면 영단어를 외우거나 수학 문제를 푸는 네가 보였다. 그래서 하루는 네게 물어봤다.
“야. 너는 자리 안 바꾸냐?”
말주변이 없어서 아무런 맥락 없이 그렇게 묻자 태영도는 별 미친 새끼를 다 보겠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이 자리가 싫으냐고 도리어 물어봤다. 난 고개를 저었다. 실은 처음으로 나도 짝이 싫지 않은 참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