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봤어?
(사진) 11:07
너 이미지도 있고 하니까 프로그램 계속하는 건 안 되겠지...? 제작진들한테 지금이라도 못 하겠다고 말하자ㅠㅠ 배우는 이미지가 생명이라구 하던데...11:09
내 나름대로는 이은섭을 걱정한 거였다. 지금 이은섭이 명실상부 충무로 캐스팅 0순위 배우라고는 해도 이런 잡스러운 프로그램에서 이미지 소비를 계속한다면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나는 적어도 내 존재가 이은섭의 앞길을 막지만 않기를 바라며 이은섭에게서 올 답신을 기다렸다.
“여보세요?”
-아, 왜 아침부터 애교야……. 잠 다 깼네.
그러나 돌아온 건 헛소리였다.
“애교는, 내가 언제, 무슨 애교를 부렸다고.”
-먼저 메시지 보낸 게 애교가 아니라고? 이 새끼는 고딩 때부터 꼬셔놓고는 매번 지가 언제 그랬냐고 하기 선수다, 선수. 연락은 왜 한 건데.
“……방송 봤어? 자느라 못 봤으면 인터넷이라도 들어가봐. 사람들이 너랑 나랑 엮으면서 막…….”
-어디 보자…… 반응 좋은데 왜.
“아니, 반응이 이상하게 좋잖아.”
-아닌데. 내가 딱 바라던 대로 좋아. 이보다 더 좋을 수 있나 싶게 좋아.
아침부터 웬 애교냐고 1차 헛소리를 한 데 이어 이은섭은 바라던 반응이라며 2차 헛소리를 했다. 이걸 어떻게 좋은 반응으로 해석할 수 있느냐고, 앞으로 너의 배우 인생에 도움이 될 프로그램이 아니라고 침착하게 말하던 나는 자기는 송아지 엄빠라는 검색어가 마음에 든다고 실없는 소리를 하는 이은섭에게 결국 소리를 질렀다.
“야! 남은 너 생각해서 연락한 건데 자꾸 장난칠 거야?!”
-장난 아니라니까? 너 같으면 장난으로 이딴 짓 하겠냐?
“너처럼 잘나가는 배우가 왜 이런 프로그램에…….”
-궁금해?
목소리만 낮게 깔면 다냐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예나 지금이나 이은섭이 목소리 한 번 깔면 바로 깨갱하는 뱁새 수인일 뿐이었다.
아무 대꾸도 안 하고 이은섭이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던 나는 이어지는 말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궁금하면 오백 원.
“너 지금 나랑 장난해……?”
-하하하하! 나 오늘 스케줄 없는데 우리 집 놀러 올래? 같이 영화 보자. 맛있는 것도 해줄게. 나 심심해, 태 아나.
“짜증 나, 끊어!”
작은 탁상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새빨개서 거울을 엎어놨다. 그리고 아주 착실히…… 이은섭의 집에 갈 준비를 시작했다.
“문 열어줘!”
준비랄 것도 없이 대충 맨투맨에 청바지만 입고서 털레털레 이은섭의 집으로 향했다. 프로그램을 같이 해서 그렇기도 하고, 10년 전이기는 하지만 순수했던 시절이라 그런지 이은섭은 여전히 내게 편안하고 친근한 존재였다.
“진짜 왔어?”
“뭐야…… 기껏 왔는데.”
“아니, 아냐. 나도 너 안 오면 어쩌나 걱정했어. 존―나 맛있는 파스타 해줄게. 재료 손질하고 있었어. 봐봐, 맞지?”
이은섭은 나를 무슨 귀신 보듯이 보더니 끌어안을 것처럼 팔을 양옆으로 크게 벌렸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뒤를 돌아 주방으로 향했다. 하마터면 나도 안길 뻔한 걸 들키기 싫어 나는 괜히 더 툴툴대며 이은섭이 주방에서 일하는 걸 지켜봤다.
“새우를…… 스무 마리나 넣게?”
“보통 한 사람당 열 마리는 먹어야 먹은 것 같지. 너 그러니까 살이 안 찌는 거야.”
“감바스도 아니고 파스타에 새우 그렇게 많이 넣는 사람 처음 봐.”
“나 원래 먹성 좋잖아. 고등학생 때만큼 먹어, 아직도.”
묘하게 방방 뜬 분위기의 이은섭은 앞치마까지 하고서 요리에 임했다. 나는 그 애가 이리저리 효율적이지 않은 동선으로 움직이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이런 말은 좀 저급하지만, 홈웨어만 가볍게 걸치고 있어서 그런지 이은섭의 몸선이 부각되어서 그걸 계속 봤다. 네가 새우를 20마리 준비했든, 200마리를 준비했든 사실 상관없었다. 나는 너를 보느라 정신이 없었으니까.
오기 싫은 척을 하던 게 정말 튕긴 것뿐이라고 인정이라도 하듯이 나는 너를 훔쳐보았다. 새우를 다듬는 커다란 손에 튀어나온 핏줄은 보기 좋았고, 프라이팬을 꺼내느라 허리를 숙이며 드러난 맨살은 건강해 보이는 구릿빛이었다.
몰래몰래, 그러나 아주 집요하게 네 몸을 뜯어보던 때였다.
“아오.”
“왜?”
“영도야, 볼 거면 대놓고나 보든가. 왜 사람 민망하게 훔쳐보고 그러냐.”
“아, 안 훔쳐봤는데?!”
“거실에 가 있어…… 하여간 몸 존나 밝혀, 진짜.”
“진짜 안 훔쳐봤는데…… 네가 가라니까 가는 거야. 진짜 안 훔쳐봤다.”
“알겠다고. 좀 가라고.”
힐끔거린 걸 눈치채고 있었나. 마른세수를 하며 손까지 휘휘 내저으며 나를 내쫓는 이은섭에게 뭐라고 더 변명도 못 하고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거실 소파에서도 이은섭을 내도록 힐끔거리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다시 부르는 이은섭의 목소리에 쪼르르 주방으로 향했다. 요리에 열중해서인지 이은섭의 얼굴이 시뻘겠다.
“쪼끄만 게 자꾸 까부냐…….”
“뭐가?”
“그냥 너 여기에 있어. 거실에서 나 보다가 태 아나 눈 나빠질라. 목 빠지게 주방만 보던데.”
아, 또 들켰다.
머쓱해서 이번에는 나도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네가 오해한 거라고 열심히 둘러댔으나 이은섭은 내 이마에 아프지 않게 딱밤을 먹이고는 다 만든 파스타를 내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