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뜬 상태로 술을 받은 나는 끊어서 마셔도 된다는 말을 무시하고 단번에 술을 들이켰다. 술이 달게 느껴지는 걸 보니 주량을 넘어서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내일은 쉬는 날이니 조금 과음을 한다고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취하면 이은섭이 어떻게든 해주겠지.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하며 막내 작가에게 잔을 한 번 더 받은 나는 입에 대지도 못하고 들고 있던 잔을 뺏겼다.
“영도 씨 주량을 이미 넘어선 것 같은데. 제가 산책 좀 시키고 오겠습니다. 영도 씨, 일어나요.”
“은섭아!”
“진짜 많이 취했네. 일어날 수 있겠어요?”
“응, 가자!”
이은섭이다! 마침 이은섭이랑 바깥바람을 쐬고 싶었던 터라 나는 벌떡 일어나 가게 문을 박차고 나갔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는데 무슨 내용인지는 잘 안 들렸다. 그보다는 뒤따라 급하게 나오는 구둣발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이은섭!”
“얼마나 마신 거야…… 태영도, 너 몇 잔 마셨어.”
“오백 잔.”
“……다섯 잔 정도 마셨냐?”
“오만 잔.”
“말을 말자. 편의점 갈래? 숙취 해소제나 헛개수라도 마시자. 너 이 상태 그대로 자면 머리 아파.”
“초코우유 마실래!”
“알겠으니까 손잡아. 너 넘어질 것 같아.”
거짓말. 그냥 잡고 싶어서 그러는 거 다 아는데. 자꾸 웃음이 나왔다. 사실 오백 잔은 아니고 한 열 잔 정도 납죽납죽 받아 마셨다. 딱 기분 좋은 주량은 다섯 잔 정도인데. 나는 이은섭의 손이 없다면 갈지자를 그리며 걸을 게 분명하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고 ‘하여간 이은섭은 나를 이렇게 좋아해서 어떡하냐.’라는 등의 생각으로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은섭은 자꾸 은섭아, 은섭아, 하고 부르는 내게 차라리 업고 가는 게 마음이 편하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동갑이고 나도 그렇게 작지는 않은데 업겠다니? 나는 버럭 화를 냈다.
“나는 니 애기가 아냐!”
“이제 편의점이니까 조용히 합시다, 태 아나.”
“……알겠다.”
업장에 들어가서도 주정을 부리는 건 꼴불견이니 제정신을 차릴 겸 뺨을 몇 대 때렸다. 이은섭을 은섭 씨라고 불러야지, 아니, 아예 말을 안 거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지금 입을 열면 말실수를 할 게 분명하니. 그러나 나는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눈을 마주치기 위해 상체를 살짝 숙여가며 조곤조곤 묻는 이은섭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초코우유랑 또 뭐 사줄까? 아이스크림도 하나 먹을래? 숙취 해소제랑 헛개수도 사고.”
“…….”
“찾는 게 없어? 다른 데 가볼까?”
“……뽀뽀해줘.”
“이, 이게 미쳤나……! 이리 와, 너는 그냥 입을 다물고 있어. 계산해주세요.”
말을 하고 난 후 나도 실수인 걸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둘이 있을 때나 이러라고 입을 막는 이은섭에게 순순히 부축을 당하며 비척비척 걷던 나는 이은섭과 태영도가 맞냐는 알바생의 물음에 고개만 저었다. 하도 세차게 저어 입술이 이은섭의 손바닥에 마구잡이로 비벼졌고, 이은섭은 입술을 꼬집고서는 대신 알바생에게 해명했다.
“회식 때문에 영도 씨가 무리를 해서요. 사진 같은 건 올리지 말아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아, 네! 그럼요. 실물이 훨씬 잘생기셨어요, 두 분 다……!”
“감사합니다아.”
“조용히 하고 가자, 영도 씨.”
나는 편의점에 들어올 때와 달리 이은섭에게 반쯤 안기다시피 기대서 나가야 했다.
“피디님, 이은섭입니다. 다른 게 아니고 태 아나운서가 많이 취해서요. 제가 데려다줘야 할 것 같습니다. 회식 끝까지 같이하고 싶었는데, 네, 네. 나중에 따로 식사 자리 마련하겠습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다른 예능이나 교양 하실 때도 편하게 연락 주세요.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벤치에 앉아 있는 이은섭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통화하는 걸 엿들었다. 가물가물하니 눈이 감기는 와중에도 이은섭이 나를 대할 때와는 확연히 다른 톤과 매너를 장착한 게 신기했다. 이은섭은 단둘일 땐 항상 고등학생 때처럼 굴곤 했으니까.
앉아서 도드라진 무릎을 가만가만 문지르며 하품을 하자 이은섭은 내 볼을 쭉 끌어당겼다.
“아파!”
“섹스는 개뿔, 에휴……. 이따 일현이가 차 갖고 온다니까 그거 타고 가자. 집 가서 씻고 잠이나 자.”
이기지도 못할 술을 이렇게 마시면 어쩌냐고, 이러면 데리고 살기 힘들다고 투덜거리는 말에 몸을 일으켰다. 찬 바람을 쐬니 좀 정신이 들어와서 아닌 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였던 것이다.
“나 키우기 힘든 애 아니었대.”
“갑자기 네가 순한 아이였다고 어필하는 이유가 뭔데.”
“데리고 살기 안 힘들어.”
“뭐?”
“나 데리고 살아.”
“……당연하지, 누가 너 데리고 사는 꼴을 어떻게 봐.”
기특한 말을 했으니 섹스를 못 하게 된 것쯤은 봐주겠다는 말을 하는 네 표정이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내 생각에도 오늘 거사를 치르는 건 영 글러먹은 듯했다. 술김에 얼레벌레 첫 경험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만(적어도 무섭지는 않을 테니), 나는 둘 다 제정신일 때 오래 기억에 남을 첫 경험을 만들고 싶었다. 누가 들으면 너무 낭만을 찾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이은섭이랑 처음 하는 섹스는 맨정신에 해야지―!”
“너 진짜 밖에서 술 마시면 안 되겠다. 차라리 자, 자라고.”
무슨 놈의 아나운서가 술 마시니 입만 열면 말실수냐고 입을 꾹 틀어막던 이은섭은 기억이 난다. 그다음에는 이은섭의 매니저가 차를 끌고 와서 이은섭이 나를 안아 뒷좌석에 앉았었고, 그런 후에는 어떻게 됐더라.
“……은섭아―.”
눈이 뻑뻑해서 한참 깜빡거리다가 주위를 둘러봤다. 이은섭의 방은 확실한데 이은섭은 없었다. 나는 몇 번 더 성의 없이 너를 부르다가 물소리가 들리는 밖으로 나갔다.
“은섭아, 씻어?”
“어―. 나 금방 나가. 방 안에 있는 화장실에서 씻어!”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