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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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여름 방학이 되었다. 이은섭은 자기 집에 사람이 있든 없든 나를 왕왕 초대했고,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우리 집에는 에어컨이 없었으니까. 매번 도서관 내에 있는 독서실에서 죽치고 앉아 있다가 열기가 빠져나가지 않는 골방에서 진이 빠져 잠드는 게 내 여름 방학이었다.
특별할 게 없던 여름 방학에 생긴 변수라고는 이은섭 하나뿐이었다. 그러나 그 변수는 처음으로 내게 쾌적한 여름을 가져다 주었다. 내게 여름은 그저 땀과 비 때문에 추적추적, 습기로 가득한 싫은 계절일 뿐이었는데 이은섭과 같이 있으면 선선한 바람이 부는 푸릇한 계절로 변했다.
이은섭과 함께 있는 동안 나는 몇 번 그 애를 가르친답시고 국어 지문을 읽곤 했다. 그때마다 이은섭은 ‘너는 목소리가 어쩜 이렇게 좋냐?’라고 말하면서 굳이 내 목젖을 한 번씩 톡 쳤다. 왜 그런 데를 만지냐고 한마디 하기도 전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탓에 내가 이은섭에게 눈치를 준 적은 전무했다. 그래서인지 이은섭의 가벼운 스킨십은 끊이지 않았다.
“너는 공부가 재밌냐.”
“그냥, 할 만해.”
“나도 그냥저냥 할 만한데 나는 전교 150등이고 너는 1등이잖아. 난 솔직히 공부 재미없는데 억지로 하는 거거든?”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누가 뭐래?”
“그럼 태영도가 나랑 안 놀아주잖아.”
그리고 가끔은 지나칠 정도로 설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었다.
어쩌다 보니 이틀에 한 번꼴로 이은섭의 집에 가게 된 나는 그 애의 가족과도 안면을 트고 식사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은섭은 내가 학원도 다니지 않고 과외도 안 하는데 전교 1등 자리를 사수하는 게 대단하다고 추켜세워줬다. 그걸 우리 둘이 있을 때만 그러는 게 아니라 그 애의 가족들이 있을 때도 말해서 문제였다.
그만 좀 하라고 눈치를 줘도 이은섭은 고장 난 태엽 인형처럼 ‘영도 진짜 대단하지?’라고 말했다. 이은섭의 그런 말들이 더 부끄럽게 느껴진 이유는 그 애의 부모가 가볍게 웃으며 진짜 대단하다고 맞장구를 쳐주기 때문이었다. 그 애의 부모님이 영도는 커서 뭐가 되고 싶으냐고 장래희망에 대해 물어보면 나는 자꾸 작아졌다.
딱 이은섭에게만 몰래 말한 건데, 나는 기자가 되고 싶었다. 이은섭은 그런 내게 생긴 걸 보면 아나운서가 더 어울린다고 호응해주었었다. 그런 날들이 이어지며 나는 어쩌면 정말 그렇게 될 수도 있으리라 믿게 되었다.
하루는 그 애 부모님에게 이은섭이 나 대신 떠벌거렸다.
“우리 영도는 아나운서나 기자 될 거야.”
“우리 영도? 얼씨구, 영도 네가 키웠냐?”
“대충 그래.”
“야, 야아…….”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어디에라도 좋으니 숨고 싶어서 나는 내 칭찬이 시작될라치자 얼른 이은섭의 새끼손가락 하나를 잡고 살살 끌어당겼다. 방에 올라가자고. 이은섭의 귀가 빨개져서 더 부끄러워지긴 했지만.
“좀 쉴까?”
“어, 제발.”
그날은 웬일로 집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이은섭이 이모라고 부르는 하우스 키퍼도 오지 않는 날. 이은섭은 샤프와 볼펜을 문제집 사이에 끼워 넣고 책장을 덮는 나를 보고 있다가 물었다.
“뭐 하고 놀까?”
“음…… 낮잠 자자.”
“아 씨, 피곤해?”
“좀…… 어제 잠을 못 자서.”
아닌 게 아니라 어젯밤은 더워도 너무 더웠다. 냉수마찰을 하고 할머니가 모시로 지어준 잠옷을 입고도 나는 한 시간에 한 번씩 깨서 괴로워했다. 이은섭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불면의 밤을 설명하기가 구차해서 나는 힘없이 웃는 걸 택했다.
“너는 뭐 하고 놀고 싶은데?”
“아오…… 됐다. 침대에 누워.”
다행히 이은섭은 뭐 하느라고 자지 않았냐고 추궁하는 대신 제 침대를 팡팡 내리쳤다. 아마 내 얼굴이 좀 많이 안 좋은 모양이지.
마다할 몸 상태가 아니어서 사양 않고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남색 침구 위에 양말을 벗고 올라갔다. 나는 침대에 모로 누워 바닥에 앉아 나를 쳐다보는 이은섭을 내려다봤다. 그러고는 걔가 종종 물어오는 유의 것을 물어봤다.
“연애 해봤어?”
이은섭은 꽤 집요하게 내 연애에 대해 묻곤 했다. 농담이 아니라 진짜 연애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데. 그런 질문을 열 번 넘게 듣다 보니 나도 이은섭의 과거 연애사에 대해 궁금해졌다. 연애라고는 딱히 관심 없어 보이는 내 짝도 연애를 해봤으려나? 생긴 것만 보면 양다리, 아니 세 다리까지도 너끈히 할 수 있을 성싶었다. 너처럼 잘생긴 사람은 우리 학교가 아니라 서울 내에 찾아보기 힘들 터였다.
“무, 뭐?! 이게, 어린 게 발랑 까져갖고는! 잠이나 자!”
“왜. 너는 나한테 별거별거 다 물어봐놓고.”
“그런 게 왜 궁금한데? 진짜 영도 씨 이상해.”
“그냥. 자기 전에 물어보고 싶었어, 갑자기.”
“없어. 아다임, 아다.”
“야, 아다는…… 아다는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닌 것 같은데.”
연애 해봤냐는 물음에 ‘나 아다야.’라는 답이 돌아올 줄은 몰랐던 터라 말문이 막혔다. 이은섭은 씩씩대며(대체 왜?) 숨을 거칠게 쉬다가 이제 밤톨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짧은 머리카락을 마구 쓸어댔다. 나는 민망함을 느끼면서도 에어컨 바람 덕에 차끈하게 한기가 도는 폭신한 침구가 몸을 감싸는 느낌에 취해 잠이 들기 직전이었다.
“이불에서…….”
“이불 뭐.”
“네 냄새 나…….”
“……야.”
“…….”
“자냐?”
아다니까 당연히 연애는 해본 적 없겠구나.
“야, 야! 아, 태영도 이 새끼 존나 싸패 아냐? 너 씹, 넌 진짜 네가 뭔 말을 하는지 알긴 아냐? 아오, 아오!!”
아다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본인에게 확인을 받으니 더없이 만족스러워 이은섭이 쿵쾅거리는 것도 무시하고서 잠을 청했다. 꿀 같은 낮잠이었다.

পহুৰ লগত নাচিব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