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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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북 촬영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이은섭과 달리 나는 까라면 까야 하는 방송국 직원이었다. 1일 사수라고 소개한 여자를 졸졸 따라다니며 사무실의 위치와 해야 할 일에 대해 설명을 듣던 나는 룩북 촬영 시에 노출은 없다는 말에 안도했다. 빈약한 몸을 만천하에 공개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아, 그럼 걱정 없겠네요.”
“재밌겠다. 영도 씨한테 어울릴 만한 옷으로 내가 딱 코디해줄게요.”
“저는 옷을 잘 못 입어서…… 코디 잘 못해도 이해해주세요, 은섭 씨.”
협찬 받은 아이템이 즐비한 공간에서 눈을 반짝이는 이은섭에 비해 나는 코디에 자신이 없어 소심하게 재킷 소매나 몇 번 만졌다 놓았다. 이은섭은 아마 내게 어울리게 잘 코디해 줄 게 분명하지만 나는 패션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나마 이은섭이 워낙에 몸선이 예쁘니 개떡같이 코디를 해줘도 어느 정도는 커버를 칠 수 있겠지? 이은섭의 소매를 살짝 끌어당기며 미리 미안하다고 하자 이은섭은 잠깐 맹한 표정을 짓더니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도 네가 입혀주는 건데 어련히 잘 어울리겠냐.”
“……이건 편집해주세요, 감독님.”
“어어, 알아서 할게 태 아나―.”
사람 약 올리는 데 도가 텄는지 빙긋 웃으면서 어떤 거 코디해줄 거냐고 귀찮게 구는 이은섭에게 손사래를 치며 반말이나 하지 말라고 했다.
이은섭은 뭐 어떠냐, 우리 동갑인 거 사람들이 다 아니 괜찮다면서 중간중간 반말 좀 한다고 안 죽는다고 투덜댔다. 나는 그에 지지 않고 그래도 방송인데 반말을 하면 어떡하냐, 프로답지 못하다는 말로 반박했다.
카메라가 돌고 있지 않는 동안 열심히 투닥거리다 보니 작은 창고 같은 공간에 도착했다. 우리의 사수가 되어줄 에디터는 둘이 많이 친한 것 같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한 후에 잽싸게 창고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모든 게 일사천리인 그에게서 만사가 귀찮은 직장인 분위기가 풍겼다.
“여기가 협찬 아이템 보관하는 창고예요. 비좁아서 촬영팀분들이 다 들어가는 건 불가능할 것 같고, 몇몇 분만 들어가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은섭 배우님이랑 태영도 아나운서님이 작은 카메라를 들고 직접 촬영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그쵸, 감독님?”
“괜찮겠다. 괜히 우리처럼 덩치 큰 아저씨들 우루루 들어가서 물품 망가뜨리는 것보다야 훨씬 낫지. 영도 씨랑 은섭 씨한테 부탁 좀 드릴게요.”
엉겁결에 촬영팀이 쥐어주는 핸디캠을 들고서 이은섭과 둘이 창고로 향했다. 창고 안은 완전히 별천지였다. 우리가 오늘 에디터 체험을 하는 잡지는 남성복을 주로 다뤘지만, 잡지사 내에 여성 패션지도 따로 나오고 있어서인지 창고에 협찬 받은 아이템이 조금 섞인 것 같았다. 잘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반짝반짝, 눈이 돌아가게 영롱한 액세서리며 유명한 명품 브랜드의 모노그램이 새겨진 비키니 등 별의별 아이템이 다 있었다.
“야, 그만 좀……!”
“내가 뭘 했다고요. 그리고 왜 저한테 말 놓으세요? 저한텐 말 놓지 말라더니.”
“……이은섭 씨, 어떻게 코디할지나 고민하세요. 저 괴롭히지 마시고요.”
그리고 이은섭은 분명히 코디에 흥미가 있어 보이더니 그게 다 연기였는지 내 뒤를 졸졸 따라오면서 허리나 콕콕 찔러댔다.
그만 좀 하라는 뜻으로 뒤로 팔을 뻗어 휘휘 내젓자 애먼 손가락을 쥐었다가 이내 내 손바닥에 하트를 그리고 자빠진 이은섭을 기어이 한 대 때려줬으나 속이 풀리지 않았다. 연락은커녕 서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른 채 살았던 기간이 10년이니 이은섭의 마음이 아예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나와 달리 이은섭은 연애를 했을 것 같긴 하지만, 어릴 적 풋사랑을 다시 만났으니 유독 설레기도 하겠지.
그렇지만 네가 나보다 설렐 것 같지는 않았다. 내 사정을 다 밝힐 용기가 없어 너와 멀어졌지만 그러고도 나는 염치도 없이 너를 자주 생각했고, 부끄럽게도 네 필모그래피를 줄줄 꿰고 있을 정도로 여전히 네게 향하는 관심이 차고 넘쳤다. 심지어 연애도 한번 해본 적 없으니 당연히 내가 더 너를 좋아할 게 분명한데도 나는 자중할 줄 안단 말이다. 근데 이은섭 너는! 대체 뭐가 문제길래?!
“빨리 가세요―, 아, 여기 교통체증 심하네. 차 한 대밖에 없는데 운전 미숙자인가 봐. 면허 어제 땄어요?”
아무리 우리 둘이 촬영을 하느라 사람이 없다고는 해도 엉덩이까지 꾹꾹 찌르는 손가락에는 화를 안 낼 수 없었다. 손만 뻗어 대충 파리 쫓듯 이은섭을 제지하던 나는 기어이 뒤를 돌아 그 애의 배를 주먹으로 때렸다.
“억!”
“코디나 해주시라고요, 제발.”
“정 없다, 정 없어. 자꾸 이렇게 정 없이 굴면 태 아나한테 확 비키니 입혀 버립니다?”
“왜 이래요, 진짜…….”
다른 것도 아니고 촬영 중에 엉덩이 좀 만지지 말라는 건데도 삐진 티를 못 숨기는 이은섭에게 잠시 카메라 좀 끄라고 손짓한 후 대충 입술에 입 맞춰줬다. 이은섭은 눈이 둥그레져서는 내가 그럴 줄 몰랐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뽀뽀 해줬으니까 코디하자, 이제.”
“어? 어. ……한 번만 더 해주면 안 돼?”
“안 돼. 너는 애가 왜 정도를 모르냐?”
“아앙, 영도 씨이―.”
“밖에서 사람들이 들으면 어쩌려고, 입 다물고 옷이나 골라 빨리.”
“내 애교가 안 통하는 수인은 영도 씨가 처음이야.”
당신의 도발이 날 흥분시켜.
거기까지 듣고서 나는 또 한번 이은섭의 배에 정권지르기를 날렸다.
한 대만 때리려고 했는데 이은섭이 워낙에 까불거리다 보니 서너 대를 더 때리고 말았다. 나처럼 빈약한 놈이 좀 때린다고 이은섭에게 흠 하나 갈 것 같지는 않았지만 괜히 눈치가 보여 몇 번 이은섭을 힐끔거리자 그 애는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코디하자며.”
“……하고 있거든?”
“세 벌 입히기로 했잖아. 우리 아무 컨셉도 없이 코디 짜면 재미없으니까 컨셉부터 정하자.”
“그건 밖에서 정하는 게 낫지 않아? 아, 우선 캠부터 켜자.”
“아아―, 나 영도한테 존댓말하기 싫은데.”
“……촬영 끝나고는 마음대로 해도 되니까 우선 캠부터 켜세요, 은섭 씨.”
“캠 켜기 전에 마지막으로 뽀뽀 한번.”
“읍, 야!”
예나 지금이나 뽀뽀를 좋아하는 이은섭은 열 번 같은 한 번의 뽀뽀를 하고서도 만족하지 못한 낯으로 캠을 켰다. 뭐 저런 게 다 있나 싶었다. 진짜 별…….
촬영에 영 집중을 못 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이은섭은 캠을 켜고 난 후에는 꽤 진득하게 옷을 살피며 컨셉 짜는 걸 주도했다. 고등학생 때 네가 크면 어떤 어른이 될까, 그게 많이 궁금했는데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한참 넘어선 어른이 된 너에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우리 컨셉 하나는 우선 출근 룩으로 하죠.”
“그리고 음…… 하나는 데이트 룩이 좋을 것 같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스쿨 룩.”
“저희 스물아홉인데요……?”
“스물아홉에서 열 살 빼면 열아홉이니까 딱이죠.”
출근 룩과 데이트 룩, 그리고 스쿨 룩. 나쁘지 않은 컨셉들이었지만 스쿨 룩은 어딘가 민망했다. 오히려 데이트 룩보다도 더. 예전에 우리가 어릴 때 대학로에 가서 교복에 걸칠 카디건을 같이 사던 기억 때문인지도 몰랐다.
싱숭생숭한 나와는 달리 이은섭은 정말 열심이었다. 어디서 찾아낸 건지 모르겠지만 내 눈에는 안 보이던 옷과 액세서리를 바리바리 챙기는 모습은 동대문 시장에서 소매점 하나를 운영하는 사장 같기도 했다.
그에 반해 나는 옷걸이를 열심히 뒤적이기는 했으나 썩 조합이 잘 되었다고 보기는 힘든 코디를 완성했다. 들어본 적 있는 브랜드의 옷이면 무작정 담다 보니 이은섭에게 입힐 옷들은 구색을 맞췄다기보다는 졸부들의 원픽 패션의 장이 되어 있었다.
“와…… 태 아나 취향이 이런 거였어요? 뭔 놈의 스팽글 재킷을 고르셨어.”
“왜요!”
“아니, 나는 영도 씨를 진심으로 꾸며주고 싶은 마음에 제대로 된 아이템만 쏙쏙 골랐는데 어째 영도 씨는……. 아니에요. 설마 영도 씨가 나한테 일부러 이런 옷만 입히는 거겠어?”
“그런 거 아니에요……. 제가 옷을 잘 못 입어서 그래요, 죄송합니다.”
“네? 아니, 죄송할 일은 아니고.”

পহুৰ লগত নাচিব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