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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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은섭을 믿는 것과 별개로 착잡한 심정이었다. 바로 전날 ‘너랑 엮인 사람에게 치근댔다는 게 무슨 소리냐.’라고 말한 것까지 떠오르는 바람에 오후 근무는 본의 아니게 허투루 하게 되었다.
내일은 라디오 디제이 대타 마지막 날이니까 특히 더 잘해야 하는데. 퇴근할 때가 되자 네게서 메시지가 왔다.
섭♥
헐 연락 온 거 이제 봤다 오늘 일이 좀 많았어ㅠㅠ 17:39
오늘 아침에 데려다줬던 주차장에 있어 C구역 5기둥! 17:40
오늘 아침에 데려다줬던 주차장에 있어 C구역 5기둥!
사귀기 전에 네가 한창 나한테 대시할 때도 이렇게 심란하지는 않았다. 그때는 관계의 시작이 두려운 감정이었다면 지금은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에 두려웠다. 나뿐이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과거에 정말 아무도 안 만났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아무리 늑대 수인이라고는 해도 요즘은 모든 늑대 수인이 다 한 반려만 보는 것도 아니고…….
얼른 갈게ㅎㅎ 나도 보고 싶다 18:00
그러나 나는 네게 오늘 본 기사에 대해 이야기하는 대신 보고 싶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네가 먼저 말을 해주겠지. 아니, 실은 어떠한 말도 할 필요 없었다. 우리는 예정대로 내년 초 결혼할 것이고 결혼 전 있었던 과거사에 대해서 언급하는 건 지질하고 멋없었다.
“오늘도 고생했어, 우리 서방님―.”
“응, 너도.”
“나야 뭐 고생한 게 있나. 얼른 식사하러 가자.”
“아, 오늘, 그…… 예정대로 밖에서 먹어?”
“응. 예약 다 해놨는데? 집에서 먹고 싶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너 피곤할까 봐.”
“하나도 안 피곤해. 가자.”
대놓고 오늘 뜬 기사 내용에 대해 묻지도 못하는 주제에 나는 혼자 속을 썩였다. 누가 너를 보고 수군대면 어떡하지. 정작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는데 나는 밥을 먹기도 전에 체한 듯 속이 울렁거렸다.
이은섭이 예약한 식당은 조용한 한정식집이었다. 예전에 한 번 같이 와본 곳이어서 자연스럽게 건물 끝 방으로 걸어갔다. 이은섭은 주문을 받은 종업원이 나가자마자 내 옆으로 자리를 옮기고서는 볼을 쓰다듬었다.
“너 몸 안 좋지.”
“아냐, 그런 거.”
“근데 오늘 영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네.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아침엔 괜찮았잖아.”
“멀쩡한데…….”
내 걱정을 하는 얼굴이 수심에 잠긴 게 보여 마음이 안 좋았다. 나는 괜찮다고 말하고서 옷깃만 구겼다. 코너에 몰렸을 때 하는 안 좋은 버릇을 이은섭이 모를 리 없었고, 너는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핸드폰을 확인하고서는 내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나 오늘 동생이랑 조카 보러 갔는데. 그 기사 때문에 우리 서방님 기분이 상하셨나.”
“……동생?”
“은조. 걔가 나보고 누구 만나냐고 해서 결혼까지 한다고 했지. 저번에 한 번 말했는데 농담인 줄 알았나 봐.”
“…….”
“사연이 너무 길어서 날 잡고 말하려고 했는데 너 속상해할 줄 알았으면 미리 말할 걸 그랬네.”
“괜, 찮아…….”
“야야, 영도야, 울지 마, 어? 아 씹, 미안해, 응?”
은조.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었다. 은조가 벌써 다 커서 애기도 있구나. 네 동생 아이이니 너와도 어느 정도는 닮았겠지. 그제야 안심이 되어서 나는 쪽팔리게도 식당에서 울고 말았다.
이은섭에게 애가 있으면 그 애도 당연히 내가 키워야지. 그런 생각까지 했으면서 실은 엄청나게 불안했나 보다. 지나치게 안도해서인지 나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식당 직원들이 상을 차리는 동안 고개만 푹 숙여야 했다.
“미안해, 내가 생각이 짧았어. 은조 보러 가는 거라 굳이 말을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를 못 한 건데……. 아, 진짜 미쳤나? 다신 안 그럴게. 일거수일투족 다 보고할게.”
“알겠으니까 좀 조용히 해…….”
“네가 울잖아…….”
음식이 담긴 그릇을 비롯한 식기가 놓이는 소리가 아주 조심스러웠다. 조용히 하라고 했더니만 입을 다무는 대신 나를 끌어안고서 ‘내가 사랑하는 건 평생에 걸쳐 너뿐이다.’라고 속삭이는 이은섭을 내칠 수도 없어서 나는 종업원들이 빨리 나가주기만을 바랐다.
코끝이 빨개질 때까지 울고 나자 속이 좀 시원했다. 그리고 민망해졌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에 옹졸하고 미운 부분도 있는 걸 들켜버렸으니 민망할 수밖에.
아예 오늘 저녁은 내 수발을 들기로 작정했는지 이은섭은 반대편에 놓인 제 식기를 가지고 와서는 내 입에 맑은 북엇국부터 떠먹였다.
“나 이제 괜찮아. 너 먹어.”
“먹여주고 싶어서 그래. 그리고 오늘은…… 은조가 결혼, 음……. 결혼을 안 하고 애를 가지는 바람에.”
“뭐?”
“말하자면 좀 긴데, 이따 집 가서 얘기 마저 해줄게. 우선 밥부터 먹자. 너 울어서 기운 다 빠졌겠다.”
표정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 이은섭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밥을 크게 한 술 떠서 그 위에 갈비 한 점을 올렸다.
“얼른 먹어. 먹고 기운 내.”
“하하! 역시 서방님밖에 없다.”
“아― 해.”
한입 크게 먹고서 눈을 접어 웃는 이은섭이 음식을 다 넘기는 걸 보고 이번엔 나물반찬을 먹여주었다. 이은섭은 이것저것 다 얌전히도 받아먹고는 내가 식사를 마친 후에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가는 동안 나는 완전히 진정되어 이은섭의 동생이 과거에 어떤 이미지였는지 곰곰 떠올려보았다. 토끼 수인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굉장히 산뜻한 이미지의 중학생이었던 게 머릿속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모난 데 없이 밝아서 상대적으로 장남인 자신보다 더 믿음직하게 보이는 애라고 말해 줬던 게 생각났다.
그래서 나는 집에 도착해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이은섭의 말을 듣다가 주먹으로 매트리스를 퍽! 내리치고 말았다.
“걔가 스무 살에 첫 연애를 했는데 하필이면 그때 애가 생겼어. 딸인데 이름은 아현이. 은조가 지금 스물다섯인데, 첫 취업 한 데서 그때 헤어진 남자랑 만났다고 해서 가본 거야. 아빠들이 어떤 놈인지 좀 보고 오라고 해서.”
“어떤 사람인데?”
“개새끼야. 그 새끼 결혼도 한 번 했었대.”
어떻게 된 집안이 첫사랑에 이렇게 목을 매는지. 그 덕에 나는 이은섭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긴 했지만, 은조가 혼자서 애를 키웠다고 하니 마음이 안 좋았다. 내 기억 속 은조는 아직 중학생 이미지가 커서 더더욱.
남자와 헤어진 후에 임신 사실을 알았는데, 그가 결혼한 걸 알아서 연락도 못 하고 혼자서 아이를 키우느라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단다. 그 고생을 하고도 동생이 기어이 그 남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해서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다는 이은섭의 얼굴이 너무 지쳐 보였다.

পহুৰ লগত নাচিব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