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노란 후드 티셔츠에 하늘색 데님 팬츠, 핑크색 볼캡까지. 어린 남자 아이돌 무대 의상 같았다. 내 나이가 몇인데 이런 걸 입나, 싶어 잠시 나가기 싫어졌으나 얼른 나와야 촬영 진행을 한다는 말에 억지로 발을 떼었다.
“병아리처럼 입었네요.”
“대학생 같다, 영도 씨.”
“저렇게 큰 후디도 있었어, 우리?”
“이번에는 브이 말고 꽃받침 한 번만 해주세요!”
박수까지 치며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은섭 혼자 나를 뚫어지라 보다가 정작 눈이 마주치면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예나 지금이나 좋아하는 기색을 못 숨기는 게 귀여웠지만 까딱 잘못하면 등 뒤로 조그마한 날개가 돋아날 것 같아 카메라 앞에서 얼른 꽃받침을 하고서 다시 탈의실로 들어갔다.
룩북 촬영은 짧게 끝나니 걱정할 것 없다더니 그 말은 사실이었다. 다만 내게 남은 코디가 스쿨 룩이라는 게 문제지.
나는 회색 슬랙스와 셔츠 차림에 커다란 베이지 컬러 니트 베스트를 입은 내 모습에 순간 멍해졌다. 고등학교 때 춘추복과 비슷한 차림새였다. 이은섭도 아마 옛날 생각을 하며 코디를 했을 것 같아서 유독 탈의실을 나가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일은 일이니 머쓱하게 나온 나는 마지막으로 카메라 앞에서 책을 보는 척을 하며 촬영을 마쳤다. 내도록 나를 보는 척, 마는 척 하던 이은섭은 룩북 촬영이 끝나자마자 핸드폰을 들이댔다.
“저랑 같이 셀카나 찍죠, 이것도 다 추억인데.”
“아, 네.”
“좀 웃으세요. 태 아나 나랑 아직도 내외하는 사이도 아니면서.”
“……너는 그만 좀 웃어, 이은섭.”
부드럽게 어깨를 감싸고서 얼굴을 바짝 붙여오는 이은섭을 피하지 않고 나도 밝게 미소 지었다. 꼭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아 그런지 평소보다 표정이 자연스럽게 나와 다행이었다.
“저도 사진 보내주세요, 은섭 씨.”
“이따 보내드릴게요. 그리고 오늘 촬영 끝나면 같이 저녁이나 할까요?”
제가 볶음밥 해드릴게요.
같이 사진을 찍을 때와 달리 퍽 긴장한 듯한 이은섭을 보고 순간 벙쪘으나 빙빙 돌아가는 것도 어느 정도가 있다는 생각에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따 같이 가요.”
“진짜지? 약속.”
“약속. 그리고 말 좀 놓지 마세요.”
“네―.”
자기가 자꾸 말 놓는 걸 보니 뭐에 취한 모양이라며 쉴 틈 없이 애교를 떠는 이은섭을 피해 다시 탈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벽에 머리를 박으며 되뇌었다.
“진짜 이번엔 잘해봐야지.”
일도 일이지만, 이번에는 나도 이은섭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 * *
“점심 먹으면서 촬영 잠깐 쉬어 가겠습니다―.”
내가 보기엔 엔지라고 해도 무방한 장면이 꽤 많았으나 잡지사도 그렇고 프로그램 제작진도 그렇고 이대로 가면 되겠다고 흡족해했다. 아마추어 같은 모습을 담아내는 게 목적이었던 건가? 근데 또 얼핏 보면 그냥 서툰 모델 같기도 하고……. 헉, 방송물 좀 먹었다고 자만하면 안 되는데.
정신 차리자고 생각하며 뺨을 찰싹찰싹 내리치는 내 뒤로 익숙한 인영이 드리워졌다.
“태 아나는 나랑 같이 밴 가서 쉴래요? 여기 사람들 많으니까 불편하잖아.”
“아, 네. 도시락 갖고 가서 먹어도 되죠?”
“그럼요, 내 것도 챙겨주라.”
“……반존대도 하지 마시고 존댓말 쓰세요.”
“꼰.”
“꼰은 무슨 얼어죽을 꼰이에요, 존댓말 하세요. 은섭 씨.”
“꼰!”
한 발짝만 더 가까이 오면 볼에 입술이 닿겠다 싶을 정도로 내게 바짝 붙어온 이은섭은 존댓말을 하라는 내 말에 대놓고 투덜댔다. 생긴 건 어리게 생겨서 왜 이렇게 꼰대 같은 거냐며, 이러면 정말 재미없다고 중얼거리면서도 내 옆을 졸졸 따라오는 게 밉지 않아 나도 더는 존댓말하라고 하지는 않았다.
도시락 두 개를 챙겨서(이번에도 이은섭의 팬클럽에서 지원해줬다) 이은섭의 옆으로 갔다. 이은섭은 내 어깨를 슬쩍 감싸고는 제작진 하나에게 둘이서 쉬고 올 테니 촬영이 시작되기 전 연락 달라고 말한 후 곧장 자리를 떴다.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말든 신경 안 쓰겠다는 의지가 너무 드러나는 거 아닌가. 그러나 내가 거기에서 장단을 맞춰주지 않으면 더 이상해질 것 같아 아무렇지 않은 척 이은섭을 따라 나섰다.
“차에 매니저 있을지도 모르는데.”
“아, 그러면 도시락 세 개 챙길걸.”
“아냐, 내 카드 주면 되지. 얼른 가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면 될 걸 굳이 비상구 계단으로 향한 이은섭은 계단을 내려가는 내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빈말로도 ‘누가 보면 어떡해, 이러지 마’ 따위의 말은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이은섭 같은 애가 나 좋다고 대놓고 드러내는데 그걸 어떻게 싫어할 수가 있지? 오히려 고등학생 때보다도 다 커서 이런 식으로 치대니 더 귀여운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사귀지도 않는데 팔불출이 된 나를 이은섭은 좀 모르고 있었으면 했다. 내가 관계의 우위에 서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이은섭에게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너와는 못 사귄다고 했던 10년 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쪽팔리지만 열등감 때문이었고, 그때의 나에 대해 이은섭에게 제대로 설명하고 난 다음 관계를 시작하고 싶었다.
“일현아, 너 오빠가 카드 줄 테니까 카페 가 있을래?”
“갑자기요?”
“안녕하세요, 매니저님. 태영도라고 합니다.”
“아, 아아―. 안녕하세요.”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그냥 정면돌파가 제일 낫겠지?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벌써 이은섭의 밴 앞이었다. 선팅을 얼마나 짙게 해놓은 건지 들어가기 전 나는 매니저가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일현이라는 매니저는 안대까지 하고 제대로 잘 준비를 한 듯 보였다.
괜히 불편하게 만든 것 같아 안절부절못하고 이은섭을 돌아봤다. 이은섭은 사람 속도 모르고 ‘왜, 꼰대야’ 같은 말이나 했다.
“은섭아, 매니저님 피곤해 보이시는데 그냥 우리가 카페 가서…….”
“아냐, 아냐. 일현이 체력 좋아. 그치? 나 요즘 스케줄도 없어서 너 운전할 일도 많이 없잖니, 일현아. 만약에 졸리면 카페에서 편하게 자.”
“운전할 일이 많이 없지만, 오빠가 스케줄을 다 취소하시니 저로서는 잘리지 않을까 매일이 걱정입니다만……. 그리고 카페에서 어떻게 편하게 자요?”
일현이라는 매니저가 마지막엔 이를 악물고 말한 것도 같은데. 이은섭은 나와 저를 번갈아 바라보며 작게 한숨 쉬는 매니저의 어깨를 두어 번 대충 주무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어떻게든 매니저를 밖에 보내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