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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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날 이후 이은섭과 어색해지는 일은 없었다. 나는 그게 전부 이은섭의 유들유들한 성격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애의 그런 무던함과 여유가 부러웠다. 다른 애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그리 유연한 사고를 지니지 못했다. 금전적, 심리적 결핍을 메우는 건 정신력과 오기였다. 불확실한 미래를 최대한 보지 않으려 노력해야 나는 일상을 다른 애들과 비슷하게 살 수 있었다.
그나마 요즘은 이은섭 덕분에 약간은 숨 쉴 공간이 생긴 기분이었다. 이은섭은 여전히 나와 같이 야자를 하는 유일한 학생이었다. 예상과는 달리 성실한 면도 있어서 기말고사 성적은 무려 반 등수가 10등이나 오르기도 했다.
“와, 은섭아 너 성적 되게 많이 올랐어.”
“어 씨, 그러게. 존나 이게 무슨 일이냐.”
“다행이다. 하면 되네, 너 머리 좋은가 봐. 보통 갑자기 공부한다고 성적이 이렇게 뛰지는 않는데.”
“별로…… 태영도 아니었으면 나 여전히 바닥에서 놀았을걸?”
나는 드물게 순수한 마음으로 누군가를 축하해줬다. 항상 학교의 불특정 다수를 경쟁자로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이은섭은 그렇게 여겨지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말 잘 듣는…… 내 학생?
“푸흡.”
“왜 웃어, 같이 웃어.”
“아니…… 네가 꼭 내 학생 같아서.”
“맞지 뭐.”
항상 생각하는 걸 다 말로 뱉지 않았는데 이은섭은 편해서인지 스스럼없이 내가 말하고 싶은 걸 말하게 되었다. 내 감정을 축소할지언정 이은섭 앞에서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은섭과 내가 ‘진짜’ 친구라고 생각했다. 고등학생에서 벗어나게 되어도 오래오래 연락하며 심심하면 찾게 될 친구가 될 것이라고.
이은섭은 내 말이 맞는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불쑥 귓가로 입술을 댔다. 갑작스러워 어깨를 움츠리는데도 떨어지지 않던 그 애는 소곤소곤 내게만 들리게 말했고, 나는 그걸 듣고 열없이 웃었다.
“담임보다 태영도가 훨씬 잘 가르침. 여기 선생들 다 꼴통이야, 반성 좀 해야 돼, 씹새들.”
1학기의 마지막 시험을 쳐서 그런지 우리 둘 다 긴장이 풀려 한참 킥킥거렸다. 그래서였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내게 같이 집에 놀러 가자고 한 이은섭에게 선뜻 그러겠다고 한 건.
놀러 가자는 제안을 한 건 본인이면서 이은섭은 내가 고민도 없이 그러겠다고 하자 몇 번이나 ‘진짜지? 진짜?’ 하며 되물었다. 언제는 선생보다 잘 가르친다더니 그 말이 너를 신용한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 진짜.”
“오늘 야자 안 하고?”
“안 해, 성적도 나왔는데 오늘 하루는 놀지 뭐.”
“하긴. 태영도 또 전교 1등인데 은섭이랑 하루쯤은 놀아줘야지. 아빠한테 늦게 오라고 해야겠다.”
이은섭은 방방 뜨는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핸드폰을 빠르게 두들겨 메시지를 보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이은섭의 집에 놀러 가는 데에 별생각이 없었다. 그저 오늘은 좀 특별한 날이네, 하고 말았지.
그러나 그 애의 집…… 집이라기보다는 대저택에 가까운 건물 앞에 갔을 때는 기가 질려버렸다.
“여기가…… 너네 집이야?”
“어. 아, 근데 오늘 아빠 보고 천천히 오랬더니 벌써 집이래. 친구 데리고 오는 거 처음이라 아빠 신났다, 신났어.”
“아아…….”
“아빠, 나 왔어. 문 열어줘.”
조금의 소음도 없이 부드럽게 열리는 대문을 멍하니 보다가 이은섭의 뒤를 따라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겉에서 보기에도 상당히 좋아 보이던 집은 육중한 대문 안이 더 대단했다. 사는 곳에 정원이 딸린 집은 내가 어릴 적 드라마에서나 보던 풍경이었다. 머리가 어느 정도 크고 나서는 사정이 더 안 좋아져 후진 텔레비전도 팔아버리는 바람에 드라마를 볼 수 없었고, 그 때문인지 나는 이은섭의 뒤를 잠자코 따라 걷기만 했다.
이은섭은 뭐가 그리 급한지 걸음을 재게 놀렸다. 성큼성큼 걷는데 그 애를 따라잡는 게 벅찰 지경이었다. 하기야, 나 같아도 집이 이렇게 좋으면 얼른 가고 싶겠네. 자조적인 생각은 다람쥐가 수놓인 앞치마를 하고 나오는 중년 여성의 등장으로 더욱 깊어졌다.
“오셨어요, 도련님.”
“네. 여기는 제 친구예요. 태영도라고, 공부도 잘하고 반장이에요.”
“친구 데리고 오신 거 처음이잖아요. 저는 도련님이 친구 없는 줄 알고 내심 걱정했는데.”
“아, 이모 왜 저 놀리세요! 저 영도랑 친하거든요? 영도가 공부도 맨날 가르쳐줘서 반에서 15등 했어요, 이번에.”
“어머나……. 맛있는 거 많이 해드릴게요. 올라가 계세요.”
“네! 영도, 올라가자. 아빠한텐 이따 인사하겠다고 전해주세요!”
“네, 그럴게요.”
자조적인 감상에 빠져 있을 틈도 없이 이은섭이 내 손목을 끌어당겼다. 뭐가 그리 급한지 쿵쿵 뛰듯 계단을 오르는 그 애를 따라 나도 다급하게 계단을 올랐다. 우리 두 사람 몫의 발소리가 섞이지 못하고 제각각 시끄러웠다.
“이모가 음식 잘하시거든. 나 태어났을 때부터 일해주시던 분인데, 그래서 그냥 이모라고 불러.”
“아아, 응.”
“영도 너 편식 안 하지? 뭐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내려가서 얘기하고 올게.”
“아, 뭐…… 별로 가리는 거 없이 다 잘 먹어.”
“그럼 방에 있다가 내려가자. 구경할 거 없긴 한데 아무거나 봐도 돼. 근데 진심 볼 거 없어, 내 방.”
방에 들어가자 나는 좀 더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은섭이 있는 집 자식이라는 건 왕왕 들어서 예상하고 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볼 게 없다는 이은섭의 방이 내가 사는 집보다도 넓은 걸 확인하니 비참해지는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괜히 헛기침을 하면서 이런 집은 익숙하다는 듯 행동하는 내가 구차하게 느껴졌다. 나는 어떻게든 내 가난과 방금 생긴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천천히 이은섭의 방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그런 기분도 잠시였다.
“태영도 연애 해본 적 있냐?”
“나? 연애? 어…… 연애…….”
“……있어?”
어째 조용하다 싶더라니 내 옆에 붙어와 느닷없이 연애 경험을 묻는 이은섭 때문에 방금 전에 내가 무슨 감정이었는지가 모호해졌다. 내 감정을 들여다볼 새도 없이 이은섭의 높은 콧대 너머의 눈과 내 눈이 마주쳤다. 지금까지 하던 모든 생각은 급히 소각되고, 그 자리엔 당혹감이 자리했다. 얘는 왜 사람을 이렇게 뚫어져라 보지.
중학생 때는 두어 번 고백을 받긴 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는 딱 한 번. 중학생 때는 여자애에게서, 고등학생 때는 남자애에게서. 그러나 연애를 하지는 않았다. 친구를 사귈 여력도 없는데 연애는 무슨. 아마 대학생이 되더라도 연애는 요원할 게 분명했다.
“아니. 없어.”
“그럼 고백받아본 적은?”
“있긴 있는데…….”
“우리 학교 애?”
“……야, 좀 떨어져서 말해.”
“어, 미안.”
이은섭은 내게서 한 발짝 멀어졌다. 그제야 그 애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오른 게 보였다. 나는 그걸 못 본 척하며 빠르게 아무 말이나 했다. 더 이상 이은섭의 방이 얼마나 좋은지는 보이지 않았다.
“그냥, 작년인가 우리 학교 애한테 고백받았었어. 사귀진 않았고.”
“너는 이상형이 어떻게 되냐?”
내가 얼마나 빠르게 답을 하느냐는 중요치 않았다. 답을 하면 꼬리 물듯이 바로 이은섭이 질문으로 치고 들어왔으니까. 별걸 다 물어본다 싶었지만, 이은섭이 내게 이상형을 묻는다고 해도 나는 할 말이 없었다. 특별히 좋아하는 스타일 같은 게 없었기에.
“그러는 너는?”
“어?”
“네 이상형. 너는 어떤 스타일 좋아하냐고.”
별달리 말할 거리가 없어 되돌려준 질문에 이은섭은 꽤 진지하게 생각하다가 끝도 없이 이상형을 늘어놨다.
“착하고, 나보다 똑똑하고, 귀여운 애. 눈이 땡그래서는 웃을 때 반달처럼 휘어졌으면 좋겠고, 귓바퀴가 선명한데 턱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선이 가냘픈 게 좋아.”
“뭐가 그렇게 많냐.”
“아직 안 끝났어.”
다 기억하기 힘들 정도로 상세하고 많은 이상형의 조건을 나열하던 이은섭은 아직도 뭐가 더 남았는지 침대에 나를 앉히고서 그 옆에 앉아 손가락을 꼽아가며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애가 확실하게 있구나, 단박에 알아차릴 정도로 집요한 구석이 있었다.
“옷은 유난스럽지 않게 입고, 피부가 나보다 하얗고 좋아야 돼. 손톱은 항상 바짝 깎는데 조약돌처럼 반질반질 귀여워야 되고, 좀 소박한 사람이 좋아. 그리고 또…….”
“응, 또?”
“목소리가…… 좋아. 걔가 말하면 누가 깃털로 귓가를 간지럽히는 기분이야.”
거기까지 말하고서 이은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더니 이제 자기 아빠에게 인사를 하러 가자고 수선을 떨었는데, 나는 그 애의 뒤를 따라가다가 몰래 뒤춤에 손에 찬 땀을 닦아냈다. 이은섭이 좋아하는 애가 누구일지 궁금했다.
우당탕탕 층계를 내려간 이은섭은 거실이며 부엌을 둘러보다가 이내 큰 보폭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애 뒤를 졸졸 따라가자 똑똑, 노크하는 등이 보였다.
“아빠, 나 친구 데려와서 인사하려고.”
“응, 기다리고 있었지!”
장난기가 많으면서도 일견 무뚝뚝한 이은섭을 생각했을 때, 그 애의 부모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었다. 학교에서 살짝 겉도는 면도 있으니 어쩌면 부모님이 좀 엄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나는 방 안에서 활기차게 튀어나온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안녕, 은섭이가 친구를 데리고 온 건 처음이라서 아저씨가 너무 긴장을 많이 했다. 친구는 이름이 뭐야?”
“안녕하세요, 태영도입니다. 반갑습니다.”
“영도! 이름 예쁘네. 태씨는 처음 보는데 성이랑 이름이랑 너무 잘 어울린다. 아저씨는 서해원이라고 해. 식사 아직 안 했으면 같이 할까?”
“아, 좀 진정해, 아빠…….”
아빠……가 아니라 형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젊은 남자가 나올 줄은 미처 몰랐기에.
친구들의 집에 자주 놀러 간 건 아니지만 아예 안 가본 건 아니었는데 자기 이름을 말해주는 부모님은 처음이었다. 나는 얼떨떨한 기색을 미소로 숨기려 했다. 이은섭에게 금세 들통나긴 했지만.
얼른 저녁부터 먹자고, 같이 먹으려고 내내 기다렸다는 이은섭의 아버지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이은섭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내게 귓속말했다.
“초딩 때 빼고는 친구들 안 데리고 와서 아빠가 좀 신났어. 이해해.”
“응. 아버지께서 되게 젊으시다.”
“어, 좀. 근데…… 영도 너 키 좀 작다. 무슨 귓속말을 매달리듯이 하냐.”
“내가 언제……!”
“지금 그러는데?”
까치발을 들었던 건 사실이라 얼른 발을 제대로 바닥에 딛고 섰다. 그러자 이은섭의 말마따나 우리 둘 키 차이가 꽤 나는 게 느껴졌다. 항상 거의 옆자리에 앉아만 있어서 인식하지 못했는데.
이은섭은 저를 올려다보는 나를 내려다보다가 콧잔등에 세로로 주름이 가도록 찡긋거리며 웃었다. 별로 분한 기분은 아니었지만 괜히 그 애의 배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밉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얄밉지 않은 건 아니어서.
“오늘 은섭이가 친구 데리고 온다고 해서 이것저것 많이 차렸는데, 다 먹기 힘들면 남겨도 돼 알겠지? 편하게 먹어, 영도야.”
“네, 잘 먹겠습니다.”
식탁 위에는 말 그대로 진수성찬이 차려져 있었다.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아서 괜히 식탁 아래를 한 번 확인할 정도로 음식이 끝도 없었다. 일주일 정도는 너끈히 먹고도 남을 만큼 음식이 즐비하게 놓인 식탁은 살면서 처음 보는지라 나는 잠깐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집에서는 맨날 김이랑 김치로만 대충 식사하는 게 내 일상이기에. 이은섭이 진짜 잘사는 집 애인 게 여러모로 피부로 와닿았다.
“이거 먹어봐. 맛있어.”
“응, 너도 먹어.”
“이것도 먹어.”
“알겠으니까 너도 먹어, 얼른…….”
다만 애초에 내가 부정적인 감상에 빠져들 환경이 되지 않아 우울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내가 애도 아닌데 자꾸 반찬을 옮겨다주는 이은섭에게 괜찮다고 하기 바빴다.
저는 밥그릇에 소복하게 담긴 밥알의 겉이 살짝 마르도록 한 입도 먹지 않아놓고 이은섭은 내 밥그릇에는 산처럼 이것저것 옮겨주었다. 말려도 보고, 부러 더 와구와구 먹었는데도 이은섭이 반찬을 주는 속도를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고 종국에는 내 밥그릇에 밥은 보이지 않고 모형처럼 예쁜 반찬만 가득했다.
도저히 다 먹을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 식탁에 이은섭네 아버지도 계시고 음식을 남기는 게 예의는 아니니 다 먹어보자고 다시금 의욕을 다질 때였다.
“은섭아, 친구 배 터지겠다.”
“어? 아, 너 다 못 먹겠어?”
“은섭이가 영도 챙겨주고 싶어서 그랬나 보다. 이래서 친구 없는 애들은 안 된다니까―. 잘해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줘야 좋은 건지를 몰라요―.”
“아, 뭐…… 나는 이 정도 먹으니까.”
아빠보다는 형이라고 해야 더 믿음이 가는 그 애의 젊은 아빠는 자기 아들을 실컷 놀리다가 내게 다 먹지 말라고, 머슴밥도 이렇게 멋없이는 안 줄 거라고 말하며 웃었다. 나는 스스럼없이 나를 대하는 그가 어색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가 이은섭을 쳐다봤다. 남겨도 되냐는 뜻을 담아.
“넌 이것도 다 못 먹냐…….”
“……아냐, 나 배고팠어.”
그리고 놓았던 젓가락을 다시 집어 차근차근 입에 집어넣었다. 이은섭이 덜 민망하게끔.
양이 많아 아주 천천히 식사를 마친 후에는 다시 그 애의 방으로 올라갔다. 그 애의 아버지는 간식이라도 가지고 올라가라고 했지만 내겐 무언가를 더 먹을 공간이 남아 있지 않아서 거절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기 전까지 그 애의 호의를 모두 소화하기에도 벅찼다.
“필요하면 내려올게. 아버지는? 오늘 늦으신대?”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오늘 은섭이 네 친구 오니까 일찍 오라고 했는데 일이 많은가 봐.”
계단참에 서서 대각선으로 몸을 기울여 제 아버지에게 허물없이 묻는 말은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아빠? 아버지?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람이 아버지이니 퇴근하고 집으로 올 사람은 엄마여야 하는 거 아닌가?
“영도야, 필요한 거 있으면 편하게 말해. 은섭이 방에 뭐 다 있긴 하겠지만.”
“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영도는 참 목소리가 좋다. 우리 은섭이처럼 성격이 방방거리지도 않고.”
“나도 좀 의젓하지 않아, 아빠?”
“의젓은 네 동생 은조가 백배는 의젓하지. 얼른 올라가, 영도 기다린다.”
이은섭은 제 아빠의 어깨를 가볍게 끌어안았다가 씩 웃으며 떨어졌다. 그리 닮지 않은 부자 관계여서 그런지 밖에서 본다면 불륜 관계로도 볼 수 있겠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 이제 뭐 할까, 너 다른 애들 집 가면 뭐 하는지 알려줘.”
“나? 어…… 나는 별로 다른 애들 집에 안 놀러 가봐서. 너는 뭐 하고 노는데 주로?”
“초3 이후로 친구 집에 데리고 오는 거 처음인데.”
“…….”
“……그냥 사는 얘기나 하자, 그럼.”
방에 들어가서는 마땅히 할 게 없었다. 이은섭은 FPS게임을 좀 한다고 했는데 나는 그런 건 아예 해본 적이 없었고, 돈 드는 취미는 가질 수 없는 형편인지라 책만 주야장천 읽는 나와 달리 이은섭은 독서에 취미가 없었다. 둘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대화뿐이라는 게 우리가 있는 공간의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드는 데 한몫했다.
문제는 둘 다 입을 열지 않는다는 거였다. 어, 어, 하고 말문을 열기 위해 머뭇거리는 소리는 나는데 문장다운 문장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적막한 분위기가 이어질수록 눈을 마주치는 것도 버거워져 결국 내가 입을 먼저 열었다.
“아버지께서 되게 젊으신 것 같아.”
“아…… 어. 우리 아빠 올해로 마흔이라. 근데 마흔보다 좀 더 어려 보이지? 한 서른둘 정도라고 해도 믿을 것 같기는 해.”
“응, 아빠 아니고 형인 줄 알았어, 처음에.”
“애만 넷을 낳았는데 형은 무슨.”
“어?”
“애 넷 낳았다고, 그 아저씨.”
그 애가 말한 두 가지 사항 모두 내게는 너무나 낯선 것이었다. 아저씨가 그 얼굴에 애가 넷이라는 것도, 그가 직접 애를 낳았다는 것도 내 편협한 사고로는 한 번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얼이 빠져 가만히 있던 나를 보고 크게 웃은 이은섭은 사실은, 하고 운을 뗐다.
“사실은 중학생 때 내가 애를 좀 팼거든.”
“응.”
“왜냐고 물어봐야지, 아, 태영도 왜 이렇게 흐름에 못 올라타니?”
“어어, 왜?”
“게이 새끼들 사이에서 무슨 애가 태어나냐고 해서. 그래서 존나 팼어. 죽사발 되도록.”
자기가 그때 애를 패는 바람에 부모님까지 소환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사정을 다 듣고 나서 낳아주신 아버지가 깽판을 치는 바람에 그 후의 학교생활이 잘 풀리지 않았다고. 이은섭은 자기 부모를 매도한 학생을 팬 걸 후회하지 않았는데 고등학교에 진학해서도 뜬소문이 돌자 그건 좀 곤란했다고 한다.
곤란했다는 말이 곧 외로웠다는 말과 같은 뜻이라는 걸 모를 수가 없어서 나는 그 애의 무릎을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교사와 학생 모두 외면했을 중학생 시절의 너를 조금 늦었지만 위로해주고 싶어서. 내 손의 테두리가 닿았을 무릎 윗부분이 잘게 떨렸다.
“이제 나 있잖아.”
“아, 그치. 어. 그렇지.”
“잘 팼네, 나 같아도 때렸을 거야.”
“나 아무나 안 때려. 태영도는…… 너는 나 때려도 봐줄게.”
그 애의 킥킥거리며 웃는 얼굴이 속 시원해 보였다. 웃는 낯을 지우지 않고서 그 애는 무릎 위에 얹어져 있던 내 손을 들어 올렸다.
“이런 손에 맞는다고 뭐 아프기나 하겠냐. 내가 너는 봐줄게.”
“내 손이 뭐가 어때서!”
“고사리손이죠, 우리 영도 손은―.”
대충 놀리고 손을 놓아줄 줄 알았는데, 이은섭은 한참 손가락 마디마디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아까 전에 이은섭이 손톱이 조약돌처럼 예쁜 사람을 이상형으로 꼽은 게 떠올랐다. 손에 또 땀이 찰 것 같아 그 애의 손안에서 연신 꼼질거리자 그 애의 뒷목이 삽시간에 벌겋게 달아올랐다. 누가 불을 댕기기라도 한 듯이.
연신 헛기침을 하면서도 이은섭은 내 손을 놓지 않았다. 그러다가 손목도 한 번 잡아보며 ‘너는 무슨 남자애 손목이 이렇게 가느다랗냐.’라고 가볍게 면박을 줬다. 나는 별달리 대꾸도 못 하고 ‘응, 그러게.’ 같은 맥 빠진 소리나 할 뿐이었다.
하복을 입기 시작해서 드러난 팔 위를 그 애의 손이 조심스럽게 거닐었다. 이은섭은 기어이 팔꿈치까지 살며시 감싸보았는데, 나는 가만히 두면 어디까지 만져질지 가늠이 가지 않았음에도 그 애를 말리지 않았다. 두렵다기보다는, 부끄럽지만.
“은섭아, 아버지 오셨다―!”
“아, 어!! 너, 너도 이제 가봐야 되지? 내려가자.”
“으, 응.”
그 애가 만지는 게 싫지 않아서였다.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바로 내게서 손을 뗀 이은섭은 맥이 풀린 듯 웃으며 문을 향해 턱짓했다.
“우리 집 꼬맹이들도 다 왔겠다. 아직 초등학교도 안 갔는데 맨날 운동이며 피아노며 배운다고 나보다도 더 바빠.”
“아아, 응. 이제 늦었으니까, 가방 챙겨서 내려가야겠다.”
“같이 가.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줄게.”
나쁜 짓을 하다가 걸린 것처럼 우리 둘 다 말에 조급함이 묻어 있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던 가방을 챙겨 일어나자 그 애는 방을 나가기 전 나를 돌아보고서 말했다.
“꼬맹이들 얼굴 밝혀서 너 보면 좋아라 하겠다.”
“어?”
“아냐, 내려가자.”
뒤통수를 벅벅 긁는 손이 내가 별말을 다 하네, 하는 것 같아서 괜히 나까지 어색해졌다. 이은섭은 친해질수록 사람 기분 이상하게 만드는 말을 잘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이은섭이가 친구를 데려왔다고?”
“그렇다니까요!”
“오빠가?”
“은조 오빠 말구 은섭 오빠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그 애의 가족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은섭은 도대체 왜 저러는지 모르겠다고 민망한 티를 팍팍 냈으나, 나는 가족끼리 화목하니 보기 좋고 부럽기만 했다.
이은섭의 뒤를 졸졸 쫓아 내려가자마자 본 건 그 애를 낳아주신 아버지에게 입 맞추고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이은섭의 젊은 아빠의 볼에 가볍게 쪽, 하고 떨어진 얼굴이 곧 나를 향했고 나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이은섭이 누구를 닮은 건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은섭이 친구 태영도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이은섭이가 친구를 데리고 온 적이 없어서 나는 우리 남편이 거짓말 치는 줄 알았는데 진짜였네. 이제 집에 가려고요?”
“아, 네. 집에서도 걱정하실 것 같아서요.”
“영도 군 오는 줄 알았으면 나도 좀 일찍 퇴근했을 텐데. 그래도 얼굴 보고 가니 다행이네요, 종종 놀러 와요. 이눔 새끼가 교우관계가 아주 엉망진창이어서…….”
“아오, 아버지는 내가 학교 어떻게 다니는지도 모르면서!”
“보나 마나 뭣같이 다니고 있겠지. 영도 군이 이은섭 많이 가르쳐줘요. 애가 많이 부족한데 친구분이 이렇게 착실해 보이니 내가 걱정이 조금 덜 되네요. 어이, 이은섭이. 친구 데려다드려.”
“안 그래도 데려다주려고 했거든요? 영도, 가자. 이놈의 집구석 맨날 나한테만 뭐라고 해.”
생김새만 보았을 때는 과묵할 줄 알았는데 이은섭을 닮은 중년 남성은 쉴 새 없이 말하며 이은섭의 속을 긁었다. 그 애는 자기 아버지가 하는 말에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그 애 동생들은 내 손등을 콕콕 찌르고는 궁금증을 여실히 드러냈다. 나를 올려다보는 두 여자애는 언뜻 봐도 이은섭 동생이구나, 할 정도로 선이 굵직굵직했다.
“우리 오빠 친구예요?”
“영도 오빠!”
“오빠 언제 또 놀러 와요?”
“내일 놀러 와!”
“어…… 나중에 또 올게. 다음에는 은섭이랑 같이 넷이서 놀자.”
“야 이, 너네는 오빠 친구를 언제 봤다고 바로 오빠라고 하고 있냐. 너네 얼른 들어가서 숙제해.”
“우리한테 오빠 친구 뺏길까 봐 그러지?”
이은섭과 닮은 여자애 중 하나가 메롱, 하고는 내 뒤로 숨었다. 어째 이 집안에서 이은섭은 아무나 마구 놀려먹을 수 있는 포지션 같았는데, 이런 애가 얼마나 화가 났으면 중학생 때 학급 친구를 팼을까 싶었다. 불과 한 달 전쯤만 해도 나는 이은섭과 짝이 되는 걸 무서워했는데 그새 좀 친해졌다고 그 애 편을 들게 된 게 줏대 없이 느껴졌다.
내 뒤에 숨어 저를 놀리는 동생들을 가볍게 흘겨본 이은섭은 아이들의 머리칼을 흩트리고는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무람없는 손길에 나는 아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하고 그 애의 곁에 바투 설 수밖에 없었다.
“……들어가라. 나 영도 데려다주고 올게요.”
“안녕히 계세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영도야, 또 와―, 다음엔 더 맛있는 거 해줄게.”
“조심히 가요, 영도 군.”
온 가족이 나를 배웅하는 게 어색해 집을 나와서도 몇 번이나 뒤돌아 인사를 하는 나를 보고 웃던 이은섭은 내게 바짝 붙어 걸음을 옮겼다. 그 애와 내가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걸을 때마다 손등이 가볍게 스쳤다.
“너 아버지 판박이더라. 처음에 뵀던 아버지 말고, 키 큰 아버지.”
“그런 소리 많이 들어. 근데 너 아까 저녁 무리해서 먹은 거 아니지?”
“응, 맛있어서 다 먹은 거야.”
“그럼 다행이고. ……난 또 나 때문에 먹기 싫은 거 다 먹었을까 봐.”
초여름이라 그런지 밤바람이 살짝 사늘하게 불었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움츠리고 걸었던 모양이다. 이은섭은 말을 하면서도 나를 연신 힐끔거리더니만 조용히 내 손을 잡아왔다. 나는 그 애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아주 살짝 힘을 줘 고분고분하게 잡혀주었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대화했지만 긴장감에 손에 땀이 차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중간중간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못 들어서 되묻기까지 하는 바람에 종국에는 아무 말 없이 손을 잡은 채 버스 정류장까지 도착했다.
“안 가?”
“너 버스 타는 거 보고.”
버스 정류장에는 우리 둘밖에 없었다. 이은섭은 내가 탈 버스가 올 때까지 손을 잡고 있다가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나중에 또 놀러 와. ……아무도 없을 때 부를게.”
그 말을 하며 내 손을 한 번 꾹 쥐었다 놓는 이은섭에게 아무런 대꾸도 못 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나는 뒤늦게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응, 또 초대해줘!”
내 대답에 애매한 표정이었던 이은섭은 환하게 웃으며 양팔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려 크게 반원을 그렸다. 조심히 가, 큰 소리로 말하는 이은섭을 향해 오래오래 손을 흔들어줬다. 이틀 후면 또 볼 걸 알면서도.

পহুৰ লগত নাচিবWhere stories live. Discover now